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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cer] 메시&마라도나 (아르헨티나) 비교해줘

어떤 선수가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포지션도 다르고 플레이 스타일도 다르기 때문이다.

등록일 2022년12월10일 18시13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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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Shutterstock.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나는 2022 카타르 월드컵 8강에서 네덜란드를 승부차기 끝에 누르고 4강에 진출했다. 축구하면 떠오르는 인물 두 명을 말하라고 한다면 브라질의 펠레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라고 하는 팬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아르헨티나에는 마라도나에 버금가는 스타가 한 명 있는데 바로 리오넬 메시다. 메시는 2022 카타르 월드컵 8강전에서 페널티킥으로 골을 기록해 통산 월드컵 10골로 마라도나(8골)를 이미 넘어섰고 바티스투타의 월드컵 10골과도 타이를 이뤘다.

 

요즘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오픈AI에서 만든 챗GPT(chatGPT)에게 메시와 마라도나를 비교해달라고 했더니 다음과 같이 답을 했다.

 

“리오넬 메시와 디에고 마라도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두 명으로 널리 알려진 아르헨티나 프로 축구 선수이다. 두 선수 모두 놀라운 드리블 능력과 불가능해 보이는 각도에서 골을 넣는 능력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두 선수 사이에는 몇 가지 주요 차이점도 있다. 메시는 공을 갖고 있을 때 스피드와 민첩성이 뛰어난 공격수라면 마라도나는 시야가 넓고 패스 능력이 뛰어난 미드필더였다.

 

업적을 보면 메시는 마라도나보다 더 많은 개인상을 받았고 찬사도 더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메시는 발롱도르(세계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상)를 6번이나 수상했다. 전 소속팀인 FC바르셀로나에서 그는 수많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반면 마라도나는 발롱도르를 단 한 번밖에 수상하지 못했고, 그의 가장 큰 업적은 1986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우승으로 이끈 것이다.

 

전반적으로 어떤 선수가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포지션도 다르고 플레이 스타일도 다르기 때문이다. 메시와 마라도나는 모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로 여겨지며 그들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계속 기념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역대 톱5 안에 드는 2명의 선수를 보유한 축구의 나라다.

 

아르헨티나에 축구가 소개된 해는 1882년이다. 당해 2월 왓슨 허턴이라는 교사가 스코틀랜드에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한 후에 축구가 소개됐다. 이후 허턴이 중심이 돼 아르헨티나에 축구리그가 탄생했고 그가 세운 세인트앤드류스학교가 1891년 우승을 차지했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이탈리아 등에서 이주한 이주민들이 축구에 더욱 집중하면서 아르헨티나는 축구의 나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의 이웃 나라인 우루과이도 같은 방식으로 축구가 발전하자 이미 1901년에 국가대항전을 벌이는 등 활발히 축구 문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Photo by Shutterstock. 리오넬 메시

 

 

1910년에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가 3개국 국가대항전을 열어 국제대회의 모습을 갖췄다. 이는 이후 남아메리카축구연맹이 창설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 무렵 영국의 유명 구단들이 아르헨티나를 비롯해 남아메리카 축구 방문을 하면서 축구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축구는 아르헨티나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노동계층이 축구를 장악하면서 대중 스포츠로서 자리를 굳혔다.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가 그렇듯이 축구는 아르헨티나 정치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1930년대에 아르헨티나의 노동계층이 축구를 장악했는데 중상류층이 이에 위기의식을 느꼈다.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주간지인 ‘엘 그라피코(El Grafico)’는 상류계층이 축구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되자 럭비와 크리켓으로 관심을 옮기고 있었다고 썼다.

 

하지만 계급과 부의 소유와 관계없이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대체로 축구에 몰입했다. 축구의 인기가 높아지자 아르헨티나는 남미에서 처음으로 축구를 프로화시켰다.

 

1930년대 아르헨티나에서 축구는 가우초(gaucho: 대초원 지대를 무대로 한 유목민), 아사도(asado: 구운 소고기 요리)와 함께 아르헨티나 국가를 상징하는 문화의 주요 일부가 됐다.

 

아르헨티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화가 된 축구는 이후 정치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1940년대 이후 아르헨티나 정권은 축구를 앞세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뤄내려고 했다. 축구는 페론주의 정권(1946-55)에서 주요한 대중문화가 됐고 이후 축구에서의 성패는 국민의 환희와 좌절에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에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고 국민의 관심을 정치 밖으로 돌리기 위해 월드컵 유치에 나서는 등 축구를 국민과의 갈등 해소 도구로 활용했다. 스포츠 경영학자인 지만스키는 1970년대 군사정권 당시 아르헨티나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축구에 대한 열정이 극에 달한 아르헨티나에서 독재자들은 축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1975년 FIFA는 1978년 월드컵 개최지를 아르헨티나로 결정했으나 그다음 해 아르헨티나에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상황이 벌어졌다. 권력을 잡은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라디오와 TV의 모든 프로를 중단시키고 군사 행진곡을 반복 방송했다. 방송이 허용된 유일한 프로는 폴란드와 아르헨티나 간의 축구 경기였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파산지경이었지만 국가 예산의 약 10%를 월드컵 대회 준비에 사용했다.”

 

군사정권이 국민에게 만족을 주지 못함을 잘 알았기에 축구에 대한 만족감으로 대신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 한국에서 군사정권이 국민의 관심을 정치 밖으로 돌리는 도구로 스포츠를 사용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군사정부는 페루 군사정권에 3만5,000톤의 곡물과 5천만 달러를 무상으로 지원했는데 이는 페루와의 경기에서 4-0으로 승리해야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했던 일종의 뇌물이었다.

 

당시 막강 전력을 자랑했던 페루는 주전 4명을 빼고 0-6으로 패했다. 남미에서 축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이 대륙의 독재자들이 잘 쓰는 수법이었는데 아르헨티나에는 이미 1966년부터 1970년까지 군사독재자인 온가니아(Ongania)가 축구를 적절하게 정치적으로 이용한 바 있다. 그러한 일이 아르헨티나 현대 역사에서 계속 반복했다.

 

정부가 축구를 적절하게 이용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아르헨티나 국내리그가 세계적인 리그로 성장하는 데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르헨티나는 독재자들로 인해 대체로 국내 정세가 불안했고 축구리그가 안정되게 운영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축구 강국으로서 대접을 받은 나라이면서도 아르헨티나 국내리그는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꽤 오래전부터 아르헨티나 스타 선수들은 유럽에서 뛰기를 원했다. 유럽은 그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곳이었다.

 

아르헨티나 국내리그의 상황이 어느 정도 심각했냐 하면 1980년대 최강 클럽은 국제 클럽 대회에 2군을 내보내고 대신 출전료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유럽 순회 경기에는 1군을 보내 구단 운영비를 벌 수 있었다.

 

따라서 아르헨티나 축구 팬들의 클럽에 대한 충성심은 크게 낮은 편이었다. 세계 최강의 축구 국가에서 국내리그가 형편없이 운영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는 21세기 들어서도 크게 나아지고 있지 않은 형편이다.

 

Photo by Shutterstock.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축구를 즐기는 시민들.

 

 

아르헨티나 국내리그가 성장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바라스 브라바스 (Barras Bravas)’의 존재다. 일명 아르헨티나 판 ‘훌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영향력은 유럽의 훌리건 그 이상이다. 이들은 한 클럽 운영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영향력이 막강하며 조직의 폭력성까지 있어 사회적인 이슈로 등장할 때가 자주 있었다.

 

축구 클럽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팬들의 투표로 선출되는데 여기서 극성스러운 바라스 브라바스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클럽 운영자는 차후에 정치에 입문하는 경우가 많기에 이들은 정치적으로도 악영향을 끼치는 단체로 자라났다. 금품 살포는 기본이고 폭행과 살인으로 20년 형을 선고받은 바라스 브라바스 멤버도 있었다.

 

바라스 브라바스는 아르헨티나 국내리그의 성장을 막을 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쳐 결국 사회를 어지럽히는 존재들이 됐다. 그러면서도 이들을 사회에서 축출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정치인이나 경영자가 아닌 열렬한 축구 팬들이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국내 축구리그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는 분명히 있었지만, 상류층의 외면과 군사정권의 등장 그리고 국내 경제의 불안 등으로 제대로 뻗어 나가지 못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축구 시장은 21세기 들어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지만, 여전히 유럽의 빅리그와 견주면 왜소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아르헨티나는 계속 세계적인 스타 플레이어를 배출해내고 국가대표가 국제무대에서 계속 정상의 기량을 보이는 것은 역시 ‘민초’의 축구에 대한 사랑이 항상 정점에 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축구 스타들은 대부분(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배경이 초라하다.

 

이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폐허지나 슬럼가에서 성장하면서 축구 선수로서 큰 돈을 벌고 유명해지겠다는 일종의 ‘헝그리 정신’이 강하다. 축구 자체를 즐기는 분위기도 물론 있지만, 성공에 대한 꿈이 그들이 축구를 더 잘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국내리그는 빈약하지만 일단 아르헨티나 축구리그에서 축구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으면 부와 명예가 보장된 유럽 축구리그로 갈 수 있기에 어린 축구 선수들은 ‘안심하고’ 자신의 삶을 축구에 던진다.

 

아르헨티나가 낳은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난한 집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0세 때부터 축구를 시작해 훗날 펠레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로 성장한 바 있다.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와 같은 선수를 유럽에 잃고 싶지 않았지만 국내리그의 여건상 그가 이탈리아로 떠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르헨티나 축구 팬들은 1930년대에도 이탈리아에 대거 선수를 빼앗기고 그들이 국적을 변경해 이탈리아 대표로 뛰는 것을 보면서 분노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에 프로리그가 생겼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난 21세기에도 아르헨티나 축구 스타들의 꿈은 결코 국내 리그에서 뛰는 게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성공해서 유럽의 빅리그 구단과 계약을 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소망이다. 그러한 그들의 희망은 거의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아르헨티나가 단순히 스타 영향력 때문에 축구를 종교적으로 좋아하는 것만은 아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축구는 삶의 중요한 방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축구로 인해 행복해하고 축구로 인해 일치단결이 된다.

 

아르헨티나에서 계층 간의 화합이 일어나는 유일한 문화가 축구이다. 축구에 대해서는 빈부의 격차도, 사회적 지위도, 명예도, 학력도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르헨티나 축구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인들은 축구를 통한 화합을 지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경험했다. ‘축구 투쟁의 역사’라는 책을 쓴 사이몬 쿠퍼(Simon Kuper)는 당시 상황을 증언한 한 아르헨티나 국군장교의 말을 다음과 같이 받아 적었다:

 

“모든 시민이 길거리로 나와 기뻐했다. 진보주의자들은 페론주의자들와 껴안았고 가톨릭 신자는 개신교 신자, 유대교 신자와 부둥켜안았다. 우리는 아르헨티나 국기를 들고 한마음이 됐다.”

 

한국인이라면 2002년 월드컵 당시의 상황과 1978년 월드컵 당시의 상황과 비슷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986년에도 월드컵 우승팀이 된 아르헨티나의 축구 팬과 대화를 나눌 때 축구 전문가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대부분 축구 선수이거나 축구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국내리그가 성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한국을 연상하면 안 된다. 그래도 축구가 대표적인 문화 현상인 나라이기에 아르헨티나 국내리그는 세계적인 수준은 아니더라도 활발하게 움직여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만 무려 24개 프로 구단이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그래서 도시를 대표하는 개념보다는 동네를 대표하는 개념이 더 강하다. 팬들은 자신이 사는 지역의 구단을 응원하는 것보다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곳을 근거지로 한 구단을 응원한다.

 

Photo by Shutterstock. 2021 코파 아메리카 결승에서 브라질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 아르헨티나 선수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24개 프로 구단이 있지만, 대표적인 구단은 라 보카(보카 주니어스), 리베르 플라테, 인디펜디엔테, 산 로렌소 등이다. 라 보카(보카 주니어스)와 리베르 플라테의 경기는 아르헨티나 전 국민이 관심을 갖는 라이벌전이다. 최고의 라이벌전이 도를 넘어서 살인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지난 1994년 4월 보카주니어스의 팬들이 두 명의 리베르플라테 팬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런데 섬뜩한 사실은 클럽들은 폭력적인 서포터들에게 대가를 지불했다는 것이다. 상대팀의 선수나 관계자에게 폭력을 사용하고 위협과 협박을 하는 서포터에게 수고비가 지불됐다.

 

아르헨티나는 그야말로 ‘축생축사’(축구에 살고 축구에 죽는)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는 2018년까지 총 17차례 월드컵에 진출해 우승 2회, 준우승 3회, 81차례 경기에 43승15무23패를 기록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남미 예선에서 아르헨티나는 콜롬비아, 칠레, 우루과이 등 강호를 눌렀지만, 페루, 베네수엘라, 파라과이 등에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하는 묘한 결과를 남겼다. 아르헨티나는 18경기에서 7승7무4패를 기록해 브라질, 우루과이에 이어 3위에 올라 본선 진출을 이뤘다. 본선에서 아르헨티나는 16강에 진출했으나 대회 우승팀 프랑스에 패해 비교적 일찍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남미 예선에서는 아르헨티나가 11승6무로 브라질(14승3무)에 이어 가볍게 본선 진출 티켓을 받았다. 이 예선에서 아르헨티나의 젊은(78년생) 감독 리오넬 스칼로니는 메시를 꼭 필요한 공격 상황에서만 활약하도록 하는 파격적인 운영을 했다. 이전에는 메시가 공격의 모든 상황에 관여했지만 예선 때부터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한편, 한국 대표팀은 아르헨티나와 A매치에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무승부도 기록하지 못하고 모두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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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기 편집장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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