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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를 찾아서] 마틴 루터 킹 Jr.

인류 역사상 가장 빛나는 아우라를 뿜어낸 흑인

등록일 2023년01월17일 20시21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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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Minnesota Historical Society. Martin Luther King, Jr., speaking against the Vietnam War, St. Paul Campus, University of Minnesota


 

 

어제(1월16일) 이곳 미국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탄생일(영어: Martin Luther King, Jr. Day)이었고 미국의 연방 공휴일이었다. 1월 셋째 월요일이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기리는 날이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Michael King, Jr. 1929년 1월 15일 출생 - 1968년 4월 4일 타계)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침례교 목사이자 인권운동가였다. 그는 1955년부터 민권 운동의 가장 저명한 대변인이자 지도자로 활동했다. 1957년 마틴 루터 킹은 당시 싹트고 있던 민권 운동에 새로운 지도력을 제공하기 위해 결성된 조직 남부 기독교 지도자 회의(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의 회장 선출을 받아들였다. 

 

킹 목사는 1955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이끌면서 인권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킹 목사는 덱스터 애비뉴 침례 교회에서의 담임 사역을 위해 1954년 몽고메리로 이사했다. 당시 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 지부 비서였던 로사 팍스(Rosa Parks. 추후에 역사적인 인물이 됨)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 양보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것이 킹 목사가 인권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발단이 되었다. 

당시 42세였던 로사 팍스(Rosa Parks)는 피곤한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클리블랜드 애비뉴 버스에 승차했다. 버스가 경로를 따라 이동할 때 백인이 앉는 흰색 구역의 모든 좌석이 채워졌고 몇 명의 다른 백인 승객이 버스에 승차하게 되었다. 

 

백인들이 많이 타자 버스 운전기사가 그녀를 포함한 네 명의 흑인에게 자리를 비워 뒷좌석으로 옮길 것을 요청했다. 로사 팍스는 이를 거부했고 백인 버스 기사는 경찰을 불렀다. 팍스는 흑인 백인 분리에 관한 몽고메리시 조례 위반 혐의로 출동한 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경찰 조사를 받고 풀려난 팍스는 NAACP에 도움을 청했고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이 시작되었다. 유인물 3만 5000여 장이 몽고메리 전역에 배포되었다. 이 유인물에는 ‘버스에서 흑인이 평등하게 존중받을 것’ ‘흑인 운전기사를 고용할 것’ ‘먼저 탄 순서대로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게 할 것’ 등이 제시되었다. 당시 흑인 교회들이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에 동참했다. 흑인들은 출퇴근을 위해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 다녔으며, 그 결과 버스 좌석의 대부분이 빈 채로 운행됐다.

당시 시위대가 조직되었고 이 그룹은 50마일을 행진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전국적 관심이 일어났고 1965년 선거권법으로까지 이어졌다. 1965년 제정된 선거권법(Voting Rights Act of 1965)은 투표에 관한 차별을 엄격하게 금지한 것이다. 인종이나 피부색 때문에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정하거나 줄이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었다.

선거권법 개정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박사와 그의 동료에 의해 촉발되었다. 킹 목사는 미국 의회가 미국 빈민을 위한 경제적 권리 장전을 만들도록 워싱턴DC로 행진했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비폭력 시민운동을 진행했다. 그는 또한 다인종 그룹을 만들어 미국 전역을 다니며 당시 법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유색 인종 선거권, 각종 인종 차별 철폐, 노동자 권리 및 기타 기본적인 시민권을 요구하는 행진을 이끌었다. 킹 목사는 유색 인종을 위한 운동과 함께 1960년대 아메리카 원주민 권리 찾기 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바 있다. 마틴 루터 킹 박사의 이러한 운동의 근저에는 기독교 신앙과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행동주의가 있었다. 그는 예수와 간디를 롤모델 삼아 비폭력 시민운동을 펼쳤다. 비폭력 시민운동은 잘못된 것에 대해 저항은 했지만, 폭력이 수반되지 않는 운동을 의미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본명은 Michael King, Jr.(1929년 1월 15일 출생,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1968년 4월 4일 사망, 테네시주 멤피스)이다. 침례교 목사이자 민권 운동을 이끈 사회 운동가. 1950년대 중반부터 1968년 암살로 사망할 때까지 미국에서 킹은 민권을 달성하기 위해 대규모 워싱턴 행진(1963)과 같은 비폭력 전술을 장려한 남부 기독교 지도자 회의의 수장으로서 국가적 명성을 얻었다. 196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매년 1월에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를 기념하는 날이 있다. 킹 주니어 목사는 미국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부조화에 대해 경종을 울렸던 역사적인 인물이다. 흑인인 그는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일에 백인 목사들과 함께하려 했고 미국인들에게 화해(reconciliation)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그렇게 늘 화해를 강조했다. 킹 목사는 미국 사회가 화합하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흑인이나 소수계 민족들이 백인을 상대로 폭력적 투쟁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서로 화해를 통해 나누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존경받는 백인 지도자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과거 한 방송에 출연, "만약 당신이 손 한 번 흔들어 이 세상의 문제 딱 한 가지를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인종적 분리와 갈등입니다."라고 답한 적이 있다. 

킹 목사, 그레이엄 목사와 같은 이들의 노력으로 미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인종 문제와 갈등을 많이 해결한 게 사실이다. 멜팅팟(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섞여 하나의 동질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 샐러드 보울(다양한 문화가 샐러드의 여러 재료처럼 각각의 독특한 특징을 잃지 않은 채 조화되는 사회)과 같은 말이 나오는 것도 어쨌든 간에 여러 인종이 어울려서 살기 때문이었다.

 

Photo by 미드저니

 

 

다음은 NJT 기자가 과거에 작성했던 기사의 일부이다. 

 

미국에서 인종의 벽은 야구에서 깨졌다. 야구는 '니그로 리그'라고 해서 흑인들만의 리그가 있었는데 재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진출 후(1947년) 인종의 벽이 깨졌고 농구도 1950-51시즌에 나다니엘 클리프턴이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NBA 드래프트에서 지명돼 첫 번째 흑인 NBA 선수가 됐다. 단 박스데일은 1953년 처음으로 NBA 올스타전에 출전한 흑인으로 기록됐다.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 야구에 입문한 바로 다음 해에는 제임스 바스켓이라는 배우가 남자 흑인 배우로는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1960년대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주도했던 인권운동 이후 미국은 유색인종의 주류 사회 진출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흑인이 리더가 될 수 없다는 이전 분위기를 깬 사건은 프랭크 로빈슨이 역사상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흑인 감독이 된 일이다. 1975년은 흑인의 주류 사회 진출이 본격화된 해였다고 볼 수 있다. 당해 흑인 사성장군(대니얼 제임스 주니어)이 탄생했고 같은 해 흑인과 백인 커플의 삶을 조명한 TV 시리즈가 등장해(더 제퍼슨스) 미국인들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렸다. 1975년 수퍼 보울에서는 역사상 첫 흑인 MVP(프랑코 해리스)가 탄생했고 애덤 웨이드라는 연예인은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게임 쇼'(CBS) 진행을 맡았다.

80년대와 90년대에 흑인의 주류 사회 진출은 봇물이 터졌으며 21세기 들어서는 버락 오바마(민주당)가 흑인 대선 후보로서 사상 처음으로 코커스(아이오와)에서 승리를 하는 기념비적인 일이 발생했고 그는 이후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2007년 수퍼 보울에서는 흑인 감독(토니 던지, 러비 스미스)이 지휘하는 두 팀(인디애나폴리스 콜츠, 시카고 베어스)이 맞붙는 귀한 일이 있었다. 2008년 수퍼 보울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심판인 마이크 캐리가 레프리로 나섰다.

이 밖에 스포츠계에는 아시아계 선수들이 속속 진출해 진정한 샐러드 보울이 됐는데 여전히 차별은 존재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유색인종 차별이 가장 심한 스포츠는 야구다. 비슷한 실력이라면 백인에게 더 기회를 주는 분야다. 메이저리그에서 흑인의 수가 줄어든 이유다. 한편으로는 백인에 대한 차별도 있다. 농구나 풋볼에서 백인은 웬만큼 뛰어나지 않고서는 기회를 얻기 쉽지 않다.

그래도 미국 사회는 인종 차별을 근절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감독을 고용할 때 유색인종과의 인터뷰를 의무화하는 제도는 뛰어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킹 목사의 영향력은 21세기에도 살아 있다. 그 한 일화를 소개한다. NJT 기자가 과거 작성했던 글이다. 

킹 목사는 대부분의 설문조사에서 미국 역사의 영향력 있는 인물 10위 내에 뽑힐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미국의 '인종차별 완화'와 '평화운동'에 지대한 공을 세운 바 있다. 물론 그를 도왔던 아내(코레타 스캇 킹)와 가족 그리고 지인 흑인 및 백인 인권운동가들이 없었더라면 그는 위대한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 모두를 기념할 수 없기에 미국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대표로 내세워 그들의 공로를 칭찬하고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으려고 한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간접적으로 스포츠 스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수년 전의 일이다. '원수'처럼 지내던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NBA 로스엔젤레스 레이커스의 스타)가 2006년 1월16일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날에 화해했다. 두 선수 모두 "킹 목사를 기리며 화해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어둠은 어둠을 제거할 수 없다. 오직 빛만이 어둠을 사라지게 한다. 미움이 미움을 제거할 수 없고 오직 사랑만이 미움을 녹일 수 있다"라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말이 생각나게 하는 '아름다운 화해'였다.

변방에서 주류 사회에 진출해 성공한 흑인 선수 중에는 가난한 흑인 사회로 돌아와 시간과 금전으로 봉사하는 선수들이 있는데 '해군제독' 데이빗 로빈슨(전 샌안토니오 스퍼스)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은퇴 후에도 샌안토니오 지역에 다인종 학교를 세워 '교육적 변방인'들이 높은 수준의 교육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했다. 그를 비롯해 흑인 사회로 돌아와 봉사하는 흑인 선수들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다음과 같은 말에 감동을 하였다.

"대부분의 흑인은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피부 색깔로 인해 대부분 실패합니다. 흑인에게는 정상적인 교육 환경이 제공되지 않을 뿐 아니라 정상적인 사회적 경제적 기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기회를 얻고자 할 때 사람들은 '네가 네 힘으로 시작해 자립하라'고 말하지만, 흑인은 맨발이라는 사실 그것이 자립을 어렵게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간과합니다."

홈리스를 돕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전 LA 레이커스 스타 로버트 오리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마틴 루터 킹 주니어(MLK)다. 흑인 선수 중 그를 존경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MLK와 그의 동료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흑인 선수들이 프로 스포츠에서 주류가 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또한 목숨을 내건 그의 사투 덕분에 미국에서 유색인종 이민자들이 이 정도로 대접을 받고 살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This photo is in the public domain

 

 

기자가 챗GPT에게 킹 목사의 업적을 세 가지로 정리해달라고 했더니 다음과 같이 적었다. 

1. Martin Luther King Jr.는 미국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인종 차별과 차별을 종식하기 위해 노력한 민권 운동의 핵심 지도자였다. 
2. 그는 1963년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에서 인종차별 종식과 모든 사람의 시민권을 촉구했습니다.
3. 그는 또한 사회 변화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비폭력과 평화적 시위를 옹호했으며, 이는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선거권법이 통과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기자는 마지막으로 챗GPT에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두 문단으로 요약해 달라고 했다. 

"I Have a Dream"은 1963년 8월 28일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했던 연설의 제목이다. 이 연설에서 킹은 인종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대우받는 미래에 대한 자신의 꿈에 대해 말했다. 그는 인종 차별과 인종 간의 분리의 종식을 촉구하고 정부가 모든 사람,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갖도록 조처를 할 것을 촉구했다.

킹은 또한 이 연설에서 통합의 중요성과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힘에 대해 말했다. 그는 모든 인종의 사람들이 함께 노력하여 변화를 가져오고 분열을 일으키는 인종주의와 증오의 세력을 거부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차별과 억압의 족쇄에서 해방되는 '자유의 새 탄생'을 그는 촉구했다. 연설 내내 킹 목사는 강력하고 감동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군중을 고무하고 마음을 움직였다.

이 내용을 다른 사람이 말했더라면 그다지 감동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살아왔던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독려했기에 세상이 그의 말을 들었던 것이다. AI가 아무리 좋은 정보를 많이 줄지라도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인공지능이 아니라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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