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5.18 광주항쟁, 4.19 의거, 1987년 민주항쟁, 부마민주항쟁, 제주 4.3 사건, 촛불 혁명
2024년 12월3일 이후 한국 사회는 '무정의(無正義. injustice)'를 반복해서 경험하고 있다. 법은 존재하되 공정하지 않고, 권력은 존재하되 공적이지 않고 한 개인에 쏠려 있으며, 책임져야 하는 자들은 요리조리 피해가기만 하는 게 무정의 상태다.
이에 대해 시민이 느끼는 분노는 단순한 이념이 아니라 실질이다.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라, ‘정의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시민들은 멈춰 서 있다. 그리고 분노하기 시작했다. '내란 수괴'가 법꾸라지들의 잔머리로 '탈옥'을 할 때,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윤석열 탄핵이 기각되면 장시간 무정의에도 꾹 참아왔던 시민들이 계속 얌전히 가만히 있을 것으로 윤석열 탄핵 찬성파들은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기억하라, 대한민국 역사에서 “무정의 상태에 시민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 정신은 지금도 살아 있다. 윤석열 탄핵 소추를 위해 여의도에 모였던 수십만 시민들은 '무정의에 가만히 있지 않는 시민'들이다. 그리고 지금 그 숫자는 수백 만, 아니 수천 만명이 될 것이다.
수백, 수천 만 시민은 마음으로 경고를 하고 있고. 그들의 맥박은 거칠게 뛰고 있다. 정의가 없는 곳에 이념은 무의미하며, 법치는 껍데기가 된다. 한국 현대사는 이미 수차례 이런 순간들을 경험했다.
1960년 4월19일, 부정선거와 독재에 분노한 시민들은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렸다. 학생의 시신이 바다에 떠오르자 전국이 불탔고, 최루탄 속에서도 국민은 물러서지 않았다.
1980년 5월18일, 광주 시민들은 신군부의 총칼에 맞서 도시를 지키려고 했다. 시민 자치, 해방 광주,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은 도청의 함성은 국가폭력 앞에서도 정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외침이었다.
1987년 6월, 박종철의 죽음과 이한열의 피는 직선제 개헌으로 이어졌다. 시민들은 비폭력으로 민주화를 이끌었고, 정권의 호헌조치는 민심 앞에 무너졌다.
2016년, 촛불은 다시 광장을 밝히며 권력의 오만을 무너뜨렸다. 헌법 위에 군림하려 했던 정권은 국민의 평화로운 저항 앞에 무릎 꿇었다.
이러한 저항은 모두 자발적이었다. 정당의 조직도, 이념의 주술도 아닌 ‘정의가 부재한 상태’에 대한 감각이 사람들을 거리로 이끌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심판이 기각, 각하로 결정날 경우 역사상 다섯 번째 수백, 수천 만 시민의 외침이 있을 것이다. 만약 헌법의 정의가 아니라 정치적 계산이나 이념의 안경에 의해 이 사건이 기각되거나 각하된다면, 민심은 거대한 움직임을 보일 것이다.
탄핵되지 않고 대통령실로 돌아가 군통수권자 윤석열은 가만히 있을까. 다시 계엄을 선포하고 이승만, 전두환, 노태우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잔인하게 시민들을 짓밟을 수도 있다. 유혈 혁명이 일어날 것이 두렵다. 시민들의 움직임은 어떤 세력이 선동하는 것이 아니다. 두렵지만 천심이 민심을 움직일 것이다.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헌법의 약속이 무너질 때, 천심과 민심은 입술을 굳게 다물게 하지않을 것이다.
무정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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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있지만 강자에게만 관대하고, 약자에겐 냉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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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국민이 아니라 개인의 욕망을 위해 휘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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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는 처벌받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이는 고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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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은 더 이상 신뢰받지 못하며, 사회는 조용히 부패한다.
이것이 ‘무정의의 상태’다. 무정부가 물리적 붕괴라면, 무정의는 도덕과 질서의 붕괴다.
그리고 그 끝에서, 역사는 다시 광장을 호출한다.
이제 우리 사회는 다시 그 문턱에 서 있다. 만약 헌재의 판단이 정의와 국민이 아니라 권력과 이념에 복무한다면, 그것은 헌법을 훼손하는 일이자, 국민을 무시하는 오만이다.
“시민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협박이 아니라 경고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민심의 반사다.
왜냐하면 한국 역사에서 정의가 실종될 때 광장은 늘 살아났기 때문이다.
4.19 혁명과 5.18 민주화 운동, 6월 민주화 운동 때와 다른 점은 전 세계가 대한민국 시민이 무정의를 정의로 돌리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