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김문수 지지를 선언한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오른쪽)와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 사진- NjT
2025년 5월21일. 하버드, 서울대도 그러더니 이번에는 옥스포드도 그러네?
22일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장을 찾은 기자는 너무나 깜짝 놀랐다. 영국 옥스퍼드대 정치학 박사 출신인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120원 커피"에 대해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120원 커피'는 완벽히 문맥/정황을 무시한(out of context) 발언인데 세계적인 명문대 출신 박사가 그 말을 하니 기자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미 세계적인 대학 하버드대 출신과 국내 최고의 대학 서울대 출신들이 줄줄이 120원 커피 발언을 해 적잖이 실망했는데 오늘 손학규 전 지사의 말을 듣고 '도대체 저들은 왜 저럴까'라는 질문을 던지기에 이르렀다. 기자는 종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명문대를 나온 소위 엘리트들은 왜 컨텍스트(context. 상황/정황/맥락)를 무시할까? 다음의 몇 가지 관점에서 분석해보았다. 물론 모든 엘리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밝혀준다.
제도화된 교육의 ‘형식주의’
하버드, 옥스퍼드, 서울대 등의 고등교육 기관은 텍스트 중심 분석을 강조한다. 특히 법학, 경제학, 정치학, 철학 분야는 "정의된 개념", "논리적 일관성", "문장의 정합성"을 중시한다. 하지만 이 방식은 때때로 인간사회의 감정, 맥락, 문화적 암묵지를 소외시킨다. 즉, ‘정답’ 중심 교육은 ‘상황 맥락’에 대한 민감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 명문대를 나왔어도 상황맥락지능이 떨어지는 이유다.
엘리트의 ‘보편성’ 욕망
엘리트일수록 보편적 기준, 객관성, 법칙 등을 중시한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진리"를 갈구하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모든 진실은 상황 속에서만 살아있다는 것을 많은 엘리트들이 무시한다. "당신이 말한 그 단어, 당신이 말한 그 순간, 당신이 선 그 자리"가 빠지면 말은 살아남지 못한다. 엘리트일수록 이 ‘보편주의 욕망’에 빠져, 실제 인간 상황에선 종종 무기력하다. 그들에게 상황은 주관적이고, 글자는 객관적으로 여겨진다. 보편주의는 상황보다 문자를 더 중시하고 있다.
권위 있는 말의 오남용
엘리트는 권위를 가진 언어, 논문, 판례, 데이터를 인용함으로써 '자신은 맥락 너머에서 말하는 존재'처럼 느끼기도 한다. 말하자면, "나는 인용하는 자", "나는 해석자가 아닌 판단자"가 된다. 이때 그들은 맥락을 읽기보다 문장 구조나 논리 정합성만으로 판단하려는 오류에 빠진다. 맥락과 정황은 빠른 동의를 얻기 어렵고 이는 권위 얻기를 늦추지만 문자와 숫자는 대중의 반응을 빨리 일으키기에 속도 있게 권위를 쟁취할 수 있다.
‘컨텍스트’는 학문이 아니라 삶에서 배운다
컨텍스트는 살아있는 사람과 부딪히고, 감정을 읽고, 실패하고, 눈빛을 보고, 침묵 속 의미를 듣는 비형식적 배움을 통해 습득된다. 그러나 엘리트 교육은 이를 커리큘럼으로 담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컨텍스트를 읽는 능력은 길거리, 가정, 고통, 사랑, 갈등 속에서 자란 사람에게 더 자주 나타난다. 소위 가방끈이 긴 사람들이 이런 컨텍스트를 읽는 능력이 없는데 높이 올라가 세상을 다스린다면 그 사회는 매우 불행한 사회가 된다. 맥락을 이해 못하는 리더와 함께 가기 때문이다.
결국, 실천이 부족한 지성의 결과
컨텍스트를 무시하는 엘리트는 실천하지 않은 채, 현장 밖에서 이론을 휘두르려는 지식인의 전형이다. 책으로 세상을 배운 자는 세상을 모르고, 세상을 산 자는 책을 말로만 배운 자를 경계한다. 지성과 공감의 간극이 여기에서 벌어진다.
현대 사회의 엘리트가 컨텍스트를 무시하는 이유는 ‘더 깊이 살아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은 논문과 숫자를 보지만, 사람을 보지 않는다. 그들의 귀는 인용을 듣지만, 침묵을 듣지 않는다. 소통은 말을 통해 하는 것도 있지만 무언의 소통도 매우 중요하다.
그들이 진실이라 믿는 그 말들은, 맥락을 잃고 나면 폭력이 되기도 한다.
오늘 첫 취재가 손학규, 김문수 주연의 국민의힘 취재였는데 그들의 맥락 없는 언어 살포에 나는 폭력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힘든 하루였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 사진- 개혁신당 공보국
2025년 5월21일. '나이 먹으면 죽어야지'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나
최근 보수 논객 김진은 이준석과의 채널A 방송 대담 중 "말하는 걸 보면 극우적인 요소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가 "내란은 12월14일날 끝났는데 민주당이 왜 내란 세력을 운운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김진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이준석 후보는 극우적 성향"이 있다고 진단했던 것이다.
기자는 이준석 후보가 극우적인 성향이 있다는 것에 동의하면서(그동안 여러 차례 극우적 발언) 또 한 가지 그가 문맥, 정황(컨텍스트)을 무시한 '텍스트' 위주로 토론을 하면서 젊은 남성들의 점수를 얻고 있다고 분석한다.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요즘 사람들은 '컨텍스트 리터러시(정황으로 판단하는 문해력)'가 부족하다.
예를 한 번 들어보겠다. 어떤 노인 분이 “나이 먹으면 죽어야지.”라고 한다면 그게 진짜 죽겠다는 말인가? 텍스트만 보면 '죽겠다는 말' 맞다. 그런데 컨텍스트(정황, 문맥)를 보면 “나는 이제 더는 쓸모없는 사람인가 봐.”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는 게 미안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 노인의 말을 듣고 '저 분이 죽겠다고 한다'라고 자살의 메시지라고 해석을 하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가족을 찾아 알려줘야 하나를 고민하게 될 수도 있다.
그 노인의 말 이면에는 맥락, 정서, 의도, 그리고 삶 전체가 실려 있다.
인간의 말은 텍스트를 통해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지만 의미는 맥락 속에서 전해진다. 그렇기에 “텍스트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경고는 오랜 역사 속에서도 반복되었다. 아래는 실제 사례다.
예수가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마태복음 27:25)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중세 이후 유대인 박해의 정당화 근거로 악용된 바 있다. 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까지 이어진 이 왜곡은, 문맥 없는 인용이 어떻게 수백 년간의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유대인 학살에 결정적인 텍스트였고, 성경 전체의 컨텍스트는 무시됐다.
이는 '컨텍스트 리터러시의 붕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오직 글자에만 집중하면, 말은 살아 있는 의미를 잃는다. 텍스트로만 해석하는 시대가 끝나야 한다. 텍스트는 맥락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말을 문자로만 이해하면, 결국 사람도 사회도 잃게 된다. 유대인의 경우처럼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잃게 만들 수도 있다.
실제 사회 전반에서 이러한 텍스트 중심 사고는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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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여론재판: 발언의 전체 맥락 없이 한 문장만 캡처되어 확산, 사회적 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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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프레이밍: 발언 의도와 상관없이 편집된 문장만 반복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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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증언 왜곡: 진술의 앞뒤를 제거한 부분 인용으로 사건의 진실 왜곡
전문가들은 지금이야말로 '컨텍스트 리터러시'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읽고, 듣고, 말할 때 '왜, 언제,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라는 배경 질문을 함께 묻는 훈련이 중요하다. 읽기는 더 이상 글자를 해석하는 능력이 아니다. 진짜 읽기는 그 사람의 시간, 감정, 사회를 함께 읽는 것이다.
말은 단지 종이에 찍힌 글자가 아니다. 즉 텍스트가 아니다. 말은 그 사람의 살아온 시간이고, 마음이고, 외침이다. 그것을 맥락 없이 끊어 듣는다면, 우리는 사람을 잃고, 진실을 놓친다.
“나이 먹으면 죽어야지…”
그 말의 진짜 의미는, “살고 싶다고 말할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일지 모른다.
컨텍스트를 무시한 텍스트 비판을 바탕으로 커피숍 주인들과 만났던 김용태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사진- 김용태 위원장 페이스북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말한 '커피 원가 120원' 논란은 완벽하게 컨텍스트를 무시한 텍스트 위주의 비판이었다. 그 비판에 김용태, 이준석과 같은 젊은 리더들이 참여했다. 필자는 이 논란이 이는 것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정말 합리적인 보수란 말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커피 원가 120원은 이렇게 원가가 낮기에 커피숍 주인들이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었다.
이재명 후보는 “너무 비싸게 판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지난 5월 16일 이 후보가 군산 유세에서 한 본래 발언은 “(성남시 계곡에서 장사하는 분들에게) 5만 원 주고 땀 뻘뻘 흘리며 한 시간 (닭죽) 고아서 팔아봐야 3만 원 밖에 안 남지 않냐. 그런데 커피 한 잔 팔면 8천 원에서 만 원 받을 수 있는데 원가가 내가 알아보니까 120원이더라. 그래서 이것을 깨끗하게 정비하고, 유럽의 관광지처럼 산책로도 정비하고, 주차장도 만들고”이다.
이재명 후보의 발언은 경기도지사 재직 당시 계곡 정비과정에서 시민들의 이용권과 영리활동을 하는 자영업자분들의 생계를 모두 보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취지였다.
그런데도 김용태, 이준석 등은 이 후보가 커피숍 자영업을 하신 분들이 마치 폭리를 취하는 것처럼 비난한 것으로 왜곡했다. 여기에 '준우 아빠'라는 자가 거짓 스토리를 만들어 SNS에 뿌리면서 마치 여론이 들끓는 것처럼 왜곡시켰다.
이재명 후보는 경기도지사 재직 당시 커피 한 잔에 들어가는 원두의 원가를 말한 것이고 그 외의 인건비나 부자재비, 인테리어비 등 제반비용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컨텍스트를 완전히 무시한 비판이 김용태, 이준석 등에 의해 가해졌던 것이다.
김용태, 이준석과 같은 자칭 합리적 보수로 여겨지는 이들이 컨텍스트를 무시하는 발언을 계속 한다면 우리나라 정치의 미래는 매우 어둡다고 할 수 있다.
2025년 5월13일. 국민의힘이 되찾아야 할 것은 권력이 아니라 신뢰다
“하라는 건 안 하고, 하지 말라는 건 꼭 하는 아이.”
처음 들으면 고집 센 자녀 이야기를 떠올리기 쉽지만, 요즘 국민의힘 지지층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는 없다. '이 아이'는 단순히 반항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되갚는 방식으로, 과거에는 순응하는 척했지만, 이제는 기대를 일부러 저버리며 감정을 표출한다. 이런 감정의 회로가 ‘보수정당’이라는 조직 안에서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
이제 국민의힘 구성원은 리더십의 말을 듣지 않는다. 아니, 듣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권성동이 “이재명은 절대 안 된다”고 외치는 순간, “그래도 너보단 낫다”는 반응을 내보낸다.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역류다.
조직 심리학에서는 이를 ‘정서적 거리두기’ 혹은 ‘조용한 저항’이라 부른다. 냉소는 신뢰가 무너진 조직에서 가장 먼저 피어오르는 감정이다.
정치학자 제임스 C. 스콧은 『약자의 무기』에서 권위적인 리더에 대한 민중의 대응 방식으로 '숨은 저항'을 말한다. 겉으론 따르되 속으론 비웃고 외면하며, 때로는 엉뚱한 쪽으로 기회를 몰아주기도 한다. 지금 국민의힘 지지층이 보여주는 반응이 바로 그렇다. 권성동이 이재명을 막으려 할수록, 오히려 지지층은 ‘차라리 李(이)가 權(권)보다 낫다’며 반작용으로 돌아선다. 이는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정서적 보복이다.
자기 멋대로 하는 리더는 흔히 권위로 조직을 다스리려 하지만, 그 권위가 한 번 깨지면 구성원은 ‘의도적으로 반대’하는 전략을 쓴다.
이는 심리학자 알프레트 아들러가 말한 ‘권력 투쟁’의 표현이기도 하다. 즉, 명령에 따르지 않음으로써 자기 의지를 확인받는 것이다. 지금의 국민의힘 지지층은 상처 준 리더를 벌하려는 데 더 많은 감정을 쏟고 있다.
그들에게 권성동은 자신들을 무시하고 기만했던, 상처 준 아버지 같은 존재다. 기득권을 움켜쥐고 위선을 덧씌운 채 여전히 설교하려는 그의 태도는, 수치나 논리로는 설득되지 않는다. 권위를 잃은 리더의 말은 '텍스트'가 아무리 옳아도 '컨텍스트'가 듣는 자의 마음을 공허하게 만들어버린다.
설득이 아니라 분노를 부른다.
물론 국민의힘은 권성동이라는 인물 하나를 치워낸다고 이 위기를 넘길 수 없다. 문제는 한 개인의 말이 아니라, 그 말을 여전히 가능케 하는 조직의 태도(context)에 있다. 지금 필요한 건 정권을 향한 구호가 아니라, 상처받은 구성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언어다. 그러려면 완전한 물갈이가 필요하다. 지도부가 안 바뀌면 국민의힘 구성원들은 계속 이탈하거나 지금처럼 반항할 것이다.
결국, 국민의힘이 되찾아야 할 것은 권력이 아니라 신뢰다.
권력은 선거로 되찾을 수 있지만, 신뢰는 공감과 성찰 없이 회복되지 않는다. 자기 멋대로 하던 리더가 침묵하고, 조직이 귀를 기울일 때에야 비로소 지지층은 말없이 등을 돌린 이유를 다시 되짚게 된다.
그때서야 잃어버린 공동체는 천천히 회복되기 시작할 것이다.
2025년 2월10일. 비명의 이재명 비판 상황(context)이 적절한가?
소위 말하는 비명계가 최근 이재명 더불어 민주당 대표를 일제히 비판했다. 비판 내용을 보면 충분히 그런 말이 나올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재야 정치인 유시민 작가는 “그렇게 하면 당이 망한다”고 비명 비판에 대해 비평했고 민주당 고민정 의원은 유시민 작가 발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역비판을 했다.
“망하는 길로 가는 민주당의 모습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이 됐다. 이 대표를 때로는 풍자할 수도 있고, 때로는 비판할 수도 있는 게 민주주의 사회의 당연한 순리인데, 지난 몇 년 동안 비판하면 ‘수박’이라고 멸시와 조롱하는 현상이 끊이지 않고 벌어졌다.”
고민정 의원 그리고 앞서 이재명을 비판한 김경수, 김부겸, 박용진 등의 말은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민주당에서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이다. 민주당은 국민의힘 보다는 다양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지만 여전히 세계로 뻗어나아가는 대한민국을 만들기에는 여전히 ‘획일화된’ 부분이 분명히 있다.
유시민 작가의 지적도 맞았다. 그러나 유시민 작가가 비판자 한 명 한 명을 지적하며 스스로 “입틀막”하라고 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비명이든 유시민 작가든 그들의 텍스트(text)는 모두 충분히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는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은 여전히 탄핵 정국이고 또다른 내란이 일어날 위험에 있기에 컨텍스트(context)는 그런 말들을 꺼낼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오피니언 리더들이 기억해야 한다.
context 안에 text가 있다. ‘text'를 ‘포함한다(con)’라는 의미가 컨텍스트(con+text)다. 지금은 맞는 말(text)보다는 적절한 상황(context) 판단이 필요하다.
2024년 4월25일. 어도어 민희진 "박지원의 컨텍스트 없는 텍스트"
당시 하이브 CBO였던 민희진의 이 기자회견은 전 세계적인 화제가 됐다. 그의 여러 발언 중에 아래 내용은 특별히 뉴저널리스트를 집중시켰다.
"박지원 사장(하이브의 CEO)과 이렇게 저렇게 (카톡) 대화를 편하게 했었던 부분이 마치 욕쟁이 할머니가 계산할 때 ‘손님 왜 계산 안하세요’라고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그런 공격과 같다. 박지원 사장과의 대화가 친분이 있는 상황에서의 대화이고 부드러운 상황에서의 대화가 대부분이었다. 컨텍스트는 다 빠져 있다. 친한 것인지 부드러운지 그런 상황 없이 캡처된 대화 내용이 이렇게 나오니까 (그들이 원하는) 프레임에 맞춰질 수 있다."
민희진의 이 발언은 대표적인 텍스트 공격이었다. 컨텍스트(정황, 상황, 관계 등)는 무시한 채 카톡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발언만 빼서 공개하는 것을 민희진 CBO는 잘못됐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컨텍스트가 빠진 텍스트로 사람을 죽이는 사회가 되었다.
2006년 11월25일. 미국에 살면 풋볼(미식축구)을 알아야 하는 이유
(당시 미국에 거주했던) 기자는 '풋볼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미국을 알기 위해서'다. '풋볼을 알면 미국을 다 안다'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의 중고대학생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가 풋볼이고 성인 남성들도 최고의 스포츠를 풋볼로 들고 있는 데다 일요일에는 종교 생활도 포기하고 풋볼을 보는 사람들이 급증하는 것을 보면서 미국 이민자로서 '왜 그들은 풋볼에 빠져 있나'를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풋볼을 알아야 풋볼이 그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쳐 어떻게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들었는지 알 수 있다. 풋볼이 이민 생활의 목적(end)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풋볼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컨텍스트(context)를 알면 이민자로서 미국에서 사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에 스포츠에 마음이 열린 팬이라면 풋볼에 관심을 둘 것을 권한다. 풋볼은 우리에게 좋은 도구(mean)가 될 수 있다. 풋볼에 관심을 둬야 할 이유를 한 가지 더 든다면 자녀(남자 아이)와 공통 관심사를 갖기 위해서다. 그리고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 컨텍스트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2006년 11월25일. Out of Context
스포츠 스타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out of context(아웃 오브 컨텍스트)'라는 말이다. '상황에 벗어난' '문맥에 맞지 않은'이라는 의미의 'out of context'는 앞뒤 정황과 주변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했던 '말만' 가지고 기자들이 일을 확대시킬 때 선수들이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자주 쓴다.
A라는 선수가 B라는 선수에 대해 평가를 했는데 90%는 칭찬이었고 10%는 건전한 비평이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언론에서 10%의 건전한 비평에만 집중했다면 이는 out of context다.
(당시 NBA 스타) 코비 브라이언트를 비난한 것으로 알려진 필 잭슨 감독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증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애정'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코비에 대한 애증(愛憎)이 함께 있었던 책에서 주류 언론 기자들은 '미움'만 뽑아내 싸움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잭슨은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욕했던 브라이언트와 다시 한 팀에서 일하게 됐으니 말이다.
최근 LA 타임스가 보도한 아널드 슈워제네거(캘리포니아 주지사)의 인종차별 발언도 사실은 'out of context'라고 할 수 있다. 슈워제네거는 "(보니 가르시아 공화당 의원이) 쿠바출신인지, 푸에르토리코 출신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피가 섞여서 다혈질이다"고 사석에서 말했는데 그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가 공개되면서 많은 사람이 곤욕을 치렀다.
이에 대해 당사자인 가르시아 의원은 "그의 말은 완전히 문맥에서 벗어나게 나온 것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다(Not only were the brief remarks taken completely out of context from a much longer conversation)"고 말했다. 이 대화 테이프의 전체 내용을 들어본 사람들에 따르면 슈워제네거 주지사는 가르시아 의원에 대한 칭찬을 많이 했다고 한다.
성서에 나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에게는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했던 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최대한 인내하며 말했던 이유는 바로 주변 또는 사람의 관계적 '상황(context)'이 달랐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상황을 보지 않고 짧은 말만 보면 오류가 계속 발생한다.
조지 스타인브레너 뉴욕 양키스 구단주의 말로 이 칼럼을 맺는다.
"언론이 잘하는 일은 바로 문맥 밖으로 발언을 뽑아내는 것이다. 언론인은 그런 것을 좋아한다. 나는 그것이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언론은 그 중에서 몇 가지 단어를 뽑아내 원하는 방법대로 보도한다. 이는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One of the things you people in the media do is take things out of context. The press loves to do that. To me, that's a violation of trust. I'll say a sentence and they'll pick four words and make it sound like they want it to sound. It happens over and over again.)"
[Log 들어가는 말] '컨텍스트 리터러시'가 필요한 이유
“그 말 자체는 맞는데, 왜 이렇게 불편하지?”
남편이 반복적으로 '미안하다'고 할 때 아내는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 '미안하다'는 사과는 분명히 했는데 그 안에 진정함이 느껴지지 않고 남편은 그 '미안한 짓'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말을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낫기에 아내는 사과를 받아내지만 매번 찜찜하다. 남편과 아내가 바뀌어도 마찬가지다.
'미안하다'는 말, 즉 ‘텍스트(text)’ 자체는 아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 그 말이 던져진 상황, 타이밍, 듣는 자의 느낌, 분위기, 말하는 자의 신뢰성 등, 즉 ‘컨텍스트(context)’가 뭔가 어긋나 있기에 불편함이 발생했던 것이다.
‘컨텍스트(Context)’라는 영어 단어는 라틴어 contextus에서 유래한다. con-은 ‘함께’라는 의미다, text는 원래 ‘짜다’라는 뜻에서 왔다. 즉, ‘함께 짜여진 것’, 그것이 곧 '컨텍스트'다. 텍스트(text)는 지금은 '문장'으로만 해석되지만 어원에서보면 ‘엮여 있는 말’이란 의미다.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이 어디에서, 누구에게, 왜 말해졌는가가 진짜 의미를 결정한다. 즉 텍스트는 컨텍스트 안에서만 제대로 된 의미를 지내게 된다.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œur)는 『해석이론』에서 모든 해석은 '상황적(contextual)' 지평을 전제로 한다고 말했다. 언어는 혼자 떠다니지 않는다. 해석이란 텍스트의 외곽선을 넘는 작업이다. 그는 “텍스트는 언제나 그 바깥을 동반한다”고 단언했다. 문맥 없는 인용은 해석이 아니라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경고다.
즉, 남편이 마음에도 없는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면 아내는 사실상 폭력을 당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물론 법적인 처벌이 없는 폭력이다. 추후 이혼 사유는 될 수 있겠다.
20세기 언어철학의 거장 존 오스틴(John Austin)은 우리가 말을 할 때 단지 ‘문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수행한다고 말했다. “I now pronounce you husband and wife(나는 지금 당신들을 부부로 선언합니다)”를 친구가 말했다고 하자. 결혼이 성립되는가. 자격 없는 사람이 그 말을 해봤자 공식적인 결혼은 성립되지 않는다. 결혼식이라는 맥락(context) 속에서 말해질 때에만 사회적 효력을 갖는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사회가 다시 읽어야 할 개념은 ‘문맥빠진 텍스트’가 아니라 ‘적절한 컨텍스트’다.
지금은 틀린 말 하나보다 타이밍 없는 맞는 말이 더 큰 해악을 부를 수 있는 시대다. 수많은 말들이 떠다닌다. 인용이 왜곡되고, 말꼬리가 잘려나가며, 일부만 발췌된 텍스트가 무기로 쓰인다. ‘진실’은 텍스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가 도착한 자리와 관계 맺은 방식에 있다.
수사학자 로이드 비첼(Lloyd Bitzer)은 말한다. 수사학이란 상황이 부르는 말이다. 텍스트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누군가의 입, 혹은 손, 혹은 화면 위에서 맥락 속에 깃든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텍스트 리터러시(text literacy)’가 아니라 ‘컨텍스트 리터러시(context literacy)’다. 문장을 해독하는 능력보다, 문장의 타이밍과 맥락을 직감하는 통찰이 더 절실하다. 정답보다, 적정한 컨텍스트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