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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ports 100](5) 박종환 [Korea's All Time Best]

오직 축구만을 사랑했던 사나이. 한국 최초 FIFA 주최 세계 대회 4강 진출의 주역.

등록일 2023년10월15일 21시44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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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널리스트 투데이는 한국의 스포츠영웅 100인을 소개하는 K-Sports 100: Korea's Best라는 제목의 코너를 시작한다. 그 다섯 번째 주인공은 박종환이다. 

 

사진-대한축구협회

 

 

붉은 악마의 원조 

 

‘붉은 악마’는 한국 국가대표 축구 응원단의 이름이다. 이 표현은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 대회 (20세 이하) 당시 박종환 감독이 이끌었던 한국팀의 별명이었다. 당시 박종환 호는 기적과 같이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4강 진출에 성공했다.

한국의 의외의 활약에 외국 언론은 한국팀을 마치 무슨 '원한이 있는 여신(Furies)'처럼 상대를 몰아세우는 팀으로 묘사하며 Red Furies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박종환 감독은 고지 멕시코에서 열리는 대회를 대비해 마스크를 쓰고 훈련을 하는 등 선수들의 체력 강화에 전심을 다했는데 이는 선수들이 원한이 있는 사람처럼 뛰게 하는 원천이었다. 

1983년 대회 출전 선수들은 산소가 부족한 해발 2000m 이상의 고지대에서 대회를 치렀는데 박종환 감독은 이를 대비해 대회 전 46일 동안 선수들에게 마스크를 쓰고 연습하게 했던 것이 적중했던 것이다. 한국 선수들은 전후반 내내 쉬지 않고 뛰었던 반면 상대 선수들은 후반전만 되면 산소공급 부족 현상으로 걸어다니며 경기를 해야 했다. 한국 선수들은 단연 돋보였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레드 퓨리스(Red Furies)였다. 한국 언론은 이를 '붉은 분노'가 아닌 '붉은 악마'로 번역을 했다. '붉은 악마'라는 별칭은 한국의 4강 진출과 맞물려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이후 1998년부터는 한국을 대표하는 응원단의 이름이 됐다. 그때 응원단을 외국 팬들에게 소개하려고 하니 영문 표기가 필요했고 악마를 사전적으로 devils라고 번역하면서 Red Devils가 됐다.

‘붉은 악마’의 원조를 이끌었던 박종환 감독은 1983년 U-20 월드컵 예선 1차전까지만 해도 이런 파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를 받지 못했다. 예선 첫 경기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 0-2로 패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 언론은 ‘체력이 달려’ 승리를 못했다고 보도했다. 이틀 후에 열린 홈팀 멕시코와의 경기에는 무려 7만 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멕시코 팬들의 일방적인 응원속에 한국이 이길 것으로 예상한 전문가들은 없었다.

대회 전 스코틀랜드, 멕시코, 호주에 이길 가능성이 없으니 출전하지 말라는 권고도 있었다. 사실 한국은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3위에 그쳐 본선 진출권을 받지 못했기에 출전을 원치 않을 경우 출전권은 4위 국가에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아시아 지역 예선 2위였던 북한이 1983년11월 인도 뉴델리 아시안게임 준결승에서 쿠웨이트에 2대3으로 패하자 판정에 불만을 품고 태국인 심판을 폭행해 2년간 국제대회 출전 자격을 박탈 당했고 대신 예선 3위팀인 한국이 어부지리로 출전권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출전만류가 있었고 박종환 감독이 축구협 관계자 등을 설득해 극적으로 동의를 얻게 되었다.

박종환 감독의 마음이 하늘에 닿았던 것일까. 이 대회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한국의 신연호가 멕시코와의 경기 종료 30초를 남기고 극적인 헤딩골을 성공시켜 2-1 한국 승리를 이끌었다. 박종환 호의 성공신호가 울려퍼졌다. 예선 마지막 호주와의 경기를 남겨둔 박종환 호는 호주가 멕시코와 비기고 강호 스코틀랜드에 2-1로 승리해 승리 가능성은 낮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한국은 2-1로 호주에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세계 무대 8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박종환 감독은 예상 못했던 한국 축구의 영웅이 됐다. 8강 진출 직후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박종환 감독을 소개했다. 

"박종환 감독은 축구에 미친 사람이다. 1982년 서울시청팀을 이끌고 제37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 우승했을 때도 그는 자신의 분신같은 선수 이태엽, 김창호, 이태희, 최기봉, 박윤기 등 제자들을 아낌없이 실업과 프로팀으로 보냈다. 가정이 찢어지게 어려운 이들을 데려다 사재를 털어가며 키웠지만 제자들이 팀을 옮겨 그팀의 축구가 나아질 수만 있다면 아낌없이 선수들을 놓아주곤 했었다. 그는 무명선수의 조련사다. (중략) 훈련은 철저한 스파트타식으로 웬만한 정신력이 없이는 인정사정 없이 몰아치는 훈련을 견딜 수 없다. 그러나 일단 훈련을 떠나면 자상하고 자애롭기가 부모나 친형을 능가한다. 항상 허름한 잠바를 입고 큰 경기가 있어도 그 흔한 귀빈석에 한 번 앉지 않은 채 꼭 외야스탠드에 살며시 앉아 있다가 사라진다."

부인 故 안홍석 씨도 화제의 인물이 됐다. 안 씨는 서울시청축구팀의 합숙소에서 박 감독과 함께 살면서 선수들 뒷바라지를 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선수들의 합숙소는 늘 박감독의 집이었다. '결혼 생활 17년을 송두리째 남편따라 축구에 바친 안홍석 씨가 우승 제조기가 아닐까'라는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축구에 미친 감독, 그 감독에 헌신하는 아내가 한국 축구의 기적을 일으켰던 것이다.

U-20 월드컵 4강 진출의 신화 

 

우루과이와 8강에서 맞붙게 된 박종환 호는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2-1로 승리를 거두고 4강에 진출했다. 아무도 한국이 우루과이를 누를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기에 기적과 같은 승리였다. 당시 외국 언론은 '빠른 패스, 거센 도전, 쉴새 없는 질주가 한국 승리의 원동력' '한국의 볼컨트롤, 훌륭한 팀웍 번개같은 반격이 축구 거인 우루과이를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배로 몰아넣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국내 언론은 1면 톱 기사로 한국의 4강 진출 소식을 전했다.

우루과이 언론은 '한국팀에 진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실력에서 졌다. 한국팀의 투지와 정신력은 대단하다. 한국팀의 현재의 상승세를 이어간다면 결승 진출이 무난하다'고 보도했고 영국의 언론 데일리 텔레그래프도 ‘이번 대회에 가장 충격적인 경기는 우루과이와 한국의 8강 대결이었다. 한국은 '멈추지 않는 전쟁 모드(non-stop battling)'로 상대를 몰아세워 2-1 승리를 거두고 4강에 진출했다고 보도했다. 

4강 전 상대는 축구 최강 브라질이었다. 한국은 축구 열기로 가득했다. 축구의 변방 국가인 한국이 세계 최강 브라질과 세계 무대에 4강에서 맞붙는다는 것은 만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였다. 브라질과의 4강전은 모든 학교와 직장 등에서 TV로 생중계를 볼 수 있게 할 정도로 국내에서 관심이 대단했다.

우루과이 언론의 예상이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한국은 브라질과의 4강전에서 전반 14분 김종부가 중거리슛을 성공시켜 1-0으로 앞서나갔다. 환희도 잠시. 브라질의 스타 올리베이라는 8분 후 동점골을 넣었고 후반 38분에는 산토스가 결승골을 넣었다. 아쉬운 1-2 패배였다. 그러나 한국 팬들은 박종환 호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박종환 호의 이번 대회 준비는 계속 화제가 됐다.

 


동아일보는 1983년 6월16일자 기사에서 "선수들이 멕시코로 떠나기 직전까지 태릉선수촌에서 46일간 뼈를 깎는 훈련을 했다. '호랑이 감독' 박종환 씨의 질타 아래 땀에 젖은 유니폼이 한시도 마를 날이 없었다. 태릉선수촌의 복도에 지금도 걸려 있는 40만원 상당의 대형 거울은 바로 이들의 땀과 눈물의 열롱한 결정"이라고 소개했다. 거울은 박종환 호 선수들이 선수촌에 기증한 것이다. 당시 선수단은 "이 거울은 우리들의 정말 티없는 마음으로 오직 훈련에만 정진했음을 나타내주는 우리의 땀의 결정"이라며 기증의 이유를 썼다.

한국은 3,4위 전에서 폴란드에 선취골을 얻어냈으나 후반 33분 크라우제에 동점골을 허용했고 연장전에서 1골을 더 허용, 결국 1-2로 패하고 4위로 대회를 마쳤다.

 

세계 축구에 새로운 패턴 제시 - FIFA

한국의 3,4위 전 패배에도 세계 축구 전문가들은 박종환 호를 극찬했다. FIFA 부회장이었던 케이반은 '한국이 세계축구계에 새로운 패턴을 제시했다'라고 했고 블라터 사무총장은 '이번 대회를 가장 빛낸 팀으로 이젠 세계축구강국의 대열에 올라 한국 축구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또한, 하인즈 FIFA 기술위원은 '조직적 팀 플레이와 속공은 일품이었다. 문전 볼처리만 보강하면 세계 최강이 될 것'이라고 극찬했고 라파엘 가사필로 멕시코 축구협회장은 '한국은 축구를 좋아하는 멕시코인들을 흥분하게 했으며 세계 축구의 새로운 장을 펼쳐보였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멕시코 팬들은 멕시코 경기를 제외하면 “꼬레아”를 외치며 한국을 응원할 정도로 한국팀의 인기는 높았다.

이 대회에서 베스트11에 뽑힌 인물은 신연호도 김종부도 아닌 김판근(왼쪽 풀백)이었다. 김판근은 당시 17세의 어린 선수였다. 베스트11에 선정된 그는 몇 개월 후 국가대표로 선발돼 17세 242일의 나이로 A매치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박종환 감독은 대회가 끝난 후 한국 축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도자를 세계 무대에 내보내 공부하게 하고 무엇보다 천연잔디구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해 한국 축구의 미래에 밝은 신호탄을 쏜 바 있다. 당시 한국 축구 선수들은 대부분 맨땅에서 축구를 하다보니 국제 무대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것을 박 감독은 지적했다. 

선수단이 귀국하자 전두환 대통령은 천연잔디구장 건립을 약속했고 박 감독의 어린 시절 절친인 유명 코미디언 이주일 씨는 천연잔디 구장을 위해 1천만원을 후원했다.

  

한편, 4강전에서 한국에 승리를 거둔 브라질은 결승에서 아르헨티나를 1-0으로 누르고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박종환 감독은 지난 2023년 10월7일 향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지안니 인판티노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 고(故) 박종환 감독의 별세를 애도하는 추모 메시지를 대한축구협회에 공문으로 보낼 정도로 그는 세계 축구계에서도 인정 받는 지도자였다. 다음 추모 메시지다.

 

“대한민국 축구대표팀과 U-20 대표팀, K리그 클럽 등을 이끌며 오랜 기간 뛰어난 지도자로 한국축구 역사에 기여했던 고인이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한다. 전 세계 축구인들을 대표해 유가족과 그를 사랑했던 모든 분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이 메시지가 슬픔에 젖은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의 평화와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그가 남긴 족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80년대 한국 축구의 아이콘 

 

박종환 감독은 1983년 이후 한국 축구의 아이콘이 되었고 일화의 K리그 3연패(1993년 ~ 1995년)를 이끌며 3년 연속 감독상을 받았다. 1995년 아시아 클럽챔피언십 우승, 1995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올해의 감독상 수상의 족적을 남겼다.


그는 대한민국의 여자 축구계에 관심을 가졌던 축구인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여자 축구가 열악한 기반에도 지소연, 여민지 같은 새싹을 발굴하며 여자 축구가 자리를 잡은 데 큰 역할이 크다. 실제로 그는 2001년 한국여자축구연맹 초대 회장이 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사재 3억 원을 털어서 숭민원더스를 창단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TV조선의 스타다큐 마이웨이와의 인터뷰에서 “다시 태어나도 축구를 할 겁니다. 삐둘게 차면 삐둘게 가고 바로 차면 바로 간다"며 축구를 통해 그는 인생을 배웠고 인생을 영위했음을 밝혔다. 

 

TV조선 스타다큐 마이웨이 방송 화면 캡처

 

​박종환 감독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맡은 ‘박종환 호 황태자’ 신연호 감독은 “호랑이처럼 무섭고 야속했지만, 타국에서 선수들에게 손수 김치찌개를 끓여 먹일 만큼 정 많은 분이었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많은 이가 그의 무섭고, 매서운 스타일을 싫어해 그를 떠났고 그는 쓸쓸히 축구의 중심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그의 축구에 대한 사랑은 아무도 못 말린다. 그는 아마도 대한민국 땅에서 태어난 사람 중 가장 축구를 사랑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대한축구협회는 지난 2023년 10월13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튀니지와의 국가대표팀 친선경기 킥오프에 앞서 박종환 감독을 추모하는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사진 - 대한축구협회

 

다음은 신연호 감독의 추도사 전문이다.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을 안고, 저는 오늘 박종환 감독님이 떠나시는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호탕한 목소리로 노익장을 과시하며 축구장을 누비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니 황망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건강이 조금 안좋으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나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때늦은 후회지만, 자주 찾아뵙지 못해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대한민국 축구의 역사 속에, 축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감독님의 이름 세 글자는 영원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제가 감독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82년 금호고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저를 청소년대표팀 멤버로 뽑아주셔서 태극마크를 처음 가슴에 달 때의 그 기쁨은 이루 말할수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감독님은 저에게 마치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감독님이 없었다면 저 신연호는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선수로 감독님과 함께했던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대회는 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멋진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한국 축구 전체에도 ‘이제는 아시아를 벗어나 우리도 세계 무대에 도전할수 있다’, ‘성공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감독님이 안겨준 그 자신감이 훗날까지 이어져서, 2002 월드컵 4강을 비롯해 세계 정상에 도전하는 지금의 한국 축구를 만들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멕시코로 가기전 고지대에 적응하기 위해 태능선수촌에서 마스크를 쓰고, 그 고통스런 체력훈련을 계속할 때는 솔직히 감독님이 너무 야속했습니다.  연습경기에서 한골을 먹을 때마다 경기후에 운동장 열바퀴씩을 도는 그 극한의 고강도 훈련을 할 때도 감독님이 정말 미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런 선견지명과 철저한 준비가 있었기에, 세계의 강호들을 만나서도 밀리지 않고 압도하는 축구를 할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독님을 '스파르타식 훈련'과 '혹독한 지도 방식'으로만 기억합니다. 하지만 축구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은 시대를 앞서 나간 분이었습니다.

 

변화무쌍한 전술과 선수들의 잠재력을 끄집어 낼줄 아는 예리한 분석 능력이 없었더라면,  K리그 최초의 3년 연속 우승을 비롯해서 축구팬들을 열광시킨 그 다이나믹한 경기들은 결코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감독님은 겉으로는 호랑이처럼 무섭고 엄한 분이셨지만, 속으로는 축구에 대한 열정과 따뜻한 정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에 처한 여러 선수들을 감싸고 보살폈던 이야기는 축구인들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숙소에서 선수들에게 직접 끓여주신 그 맛있는 김치찌개와 우족탕의 맛을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렇게 의리와 정으로 후배 축구인들을 이끌어 주셨기에, 저 뿐만 아니라 수많은 축구인들이 감독님의 가르침을 지금 현장에서 이어가고 있습니다.

 

감독님은 진정으로 축구를 사랑하셨기에 낯선 길도 흔쾌히 걸어가셨습니다. 여자축구와 시민구단의 초대 감독부터, 풀뿌리 축구에 이르기까지, 어떤 상황에서도 그 마음은 변치 않으셨습니다. 남은 우리들도 감독님의 축구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기억하면서, 한국 축구가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독님이 떠나시는 날, 우리 선수들이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이제 하늘에서 후배들의 경기를 편안히 지켜보시면서, 늘 웃으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려 유가족 한분 한분에게도 거듭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  큰 슬픔을 이겨내시고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축구가족들과 더불어 삼가 故 박종환 감독님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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