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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조던(5)] 에어 조던의 화려한 날갯짓: NBA를 지배하다

불스의 변화와 조던의 득점 행진: 시즌 1986-87 회고

등록일 2023년11월30일 21시50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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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셔터스톡

 

마이클 조던은 시즌이 끝나면 쉬는 게 아니라 캠퍼스로 갔다. 노스캐롤라이나대 출신인 그는 대학 3학년만 마치고 프로에 진출한 바 있다. 대학 졸업장을 받고자 그는 여름휴가를 반납했다. 그런 노력 끝에 조던은 대학 졸업장을 받게 됐다. 그의 전공과목은 지리학이었다. 1986년 학사 학위를 받은 조던은 “농구 선수가 안 됐더라면 기상전문가가 됐을 것”이다. 본인의 말이다.  


두 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지만, 조던의 불스는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그들은 이번에도 드래프트를 노렸다. 드래프트를 통해 미래의 불스를 짊어질 젊은 선수를 찾길 원했다. 조던은 듀크대 출신의 조니 도킨스가 불스에 지명되길 원했다.

그러나 제리 크라우스 불스 2년차 단장은 오하이오 스테이트 출신의 브래드 셀러와 오클라호마대의 스테이시 킹을 지명했다. 

 

조던은 그 어느 때보다 시즌을 위한 준비가 잘 되어 있었지만 이 지명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래도 지난 시즌 다친 발이 완벽하게 나아 그는 ‘에어 조던’으로 다시 활약할 수 있게 됐다. 체지방은 0에 가까웠을 정도로 그의 몸은 완벽했다.

1986-87시즌이 시작했다. 불스의 새 감독은 덕 콜린스였다. 

불스는 1986-87시즌부터 덕 콜린스를 감독으로 영입했다. 후에 NBA에서 가장 유명한 농구 해설자가 됐던 콜린스는 당시 루키 감독이었다. 35세였던 콜린스는 리그에서 가장 어린 감독이었다. 콜린스는 '변화'를 외쳤다. 지난 시즌 후 절반 이상의 선수가 떠난 불스는 콜린스, 조던을 중심으로 변화를 추구했다.​

 

조던은 1986년 10월7일자 시카고 트리뷴지와의 인터뷰에서 "루키같은 느낌으로 시즌에 임한다. 나는 배고프다. 우리 동료 모두 배고프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콜린스 감독의 데뷔 첫 경기에서 조던이 혼자 많은 슛을 쏘자 “혼자 다 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조던은 이에 “당신의 첫 경기가 패로 기록되길 원치 않는다”고 답했다. 조던은 이 경기에서 마지막 6분 동안 혼자 불스의 득점을 책임졌다. 결과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올린 시즌 첫 승이었다. 불스는 이후 6경기에서 5승1패를 기록했다. 조던은 한 달 동안 평균 39.4득점, 5.6리바운드, 2.8스틸을 기록해 이달의 선수상을 받았다. 

 

 

조던의 프로 데뷔 이후 세 번째 시즌은 ‘에어 조던’으로서 이미지를 굳히는 시즌이었다. 그는 9경기 연속 40+득점을 올리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윌트 체임벌린 이후 첫 최다 경기 40+득점 기록이었다. 조던의 이러한 득점 행진 기간 중 불스는 아이러니하게도 3승6패를 기록했다. 조던은 패스를 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비난의 여론도 있었다. 조던이 너무 혼자 농구를 한다는 말이 들렸다. 그의 득점 수가 높은 날 불스는 승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가지 에피소드를 말하면 조던은 몇 년 후 유타 재즈와의 NBA 챔피언 결정전에서 독감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맹활약을 펼친 바 있는데 이런 일은 1986년에도 있었다. 1986년 12월 27일 인디애나 페이서스와의 경기에서 조던은 독감에도 불구하고 44득점을 기록했다. 경기 후 조던은 "나는 아플 때 더 잘한다. 집중력이 훨씬 더 높아진다"라고 말했다. 

조던의 득점 행진은 이어졌다. 그는 NBA 득점 순위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그런데도 불스는 첫 42경기에서 21승21패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시즌 초반 뜨거운 출발에 비하면 평범한 성적이었다.

 

소속팀이 평범한 시즌을 보내고 있었지만, 조던은 올스타 경기 팬 투표에서 무려 140만 표를 받았다. 이는 매직 존슨의 최다 득표 기록을 갈아치우는 역대 최고 기록이었다. 올스타전 슬램덩크 콘테스트에 출전한 조던은 1976년 줄리어스 어빙(닥터 J)이 성공시킨 자유투 라인 슬램덩크를 시도했다. 성공이었다. 이 덩크로 조던은 더욱 유명해졌다. 그는 챔피언이 된 후 “약간의 변화는 줬지만, 닥터 J의 덩크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음은 시카고 트리뷴지의 일본계 미국인 기자 밥 사카모토가 슬램덩크 챔피언 당시의 상황을 시애틀 현지에서 쓴 것이다.

"환상적인 움직임으로 마이클 조던은 슬램덩크 챔피언이 됐다. 그는 마치 림에 입술을 닿을 듯 점프를 했고 레전드의 스토리를 썼다. 올스타전이 열리기 전 조던은 동료들에게 '내가 슬램덩크 챔피언이 되어 우승상금 12000달러를 받으면 1000달러씩 나눠주겠다'고 했다. 팀 동료들은 당연히 조던을 TV 수상기 앞에서 응원했다. 조던은 이벤트 후 '찰스 오클리가 TV 수상기 앞에서 환호하는 게 보였다.'라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결승에서 포틀랜드의 제롬 커시를 눌렀다. 조던은 동료를 너무나 아끼기에 실제 상금을 나눴다. 포틀랜드의 스타 클라이드 드렉슬러는 '동료를 위해 아끼지 않는 그는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라고 칭찬했다. 조던은 자신의 덩크에 대해 '관중들의 응원 힘으로 나는 평소보다 점프를 더 했던 것 같고 림에 얼굴이 닿을 것 같았다. 내가 점프한 것 중에 가장 높이 뛴 것 같다'라고 현장 상황을 설명했다."

 

콜린스 감독은 정규 시즌 후반기부터 존 팩슨과 서데일 스레트가 출전시간을 얻도록 조던을 스몰 포워드로 뛰게 했다. 조던의 득점 행진은 계속 이어졌다. 40득점 이상을 기록한 날이 많았다. 

 

조던은 1986-87시즌을 평균 37.1득점으로 마쳤다. 37.1득점은 개인 통산 한 시즌 최다 평균 득점 기록이다. 그는 득점 기계로 이미지를 굳혔다. 조던의 맹활약에도 불스는 시즌 전적 40승42패를 기록했다. 이전 시즌보다는 10승 더 보탠 것이지만 그래도 조던과 함께 올린 승수치고는 낮았다.

조던의 불스는 3년 연속 5할 승률에 실패했다. 그러나 불스는 3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조던은 약속을 지켰다. 불스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 탈락은 그러나 많은 팬을 실망하게 했다. 이전 시즌에도 조던의 맹활약에 불구 보스턴 셀틱스에 무릎을 꿇었던 불스는 셀틱스에 3전 전패로 완패했다. 조던은 이 시리즈에서 평균 35.7득점, 7리바운드, 6어시스트로 고군분투했지만 거함 셀틱스를 넘어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팬들은 조던이 슛을 난사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야투성공률 48.2%를 기록했고 수비에서도 뛰어난 선수임을 보여줬다. 그는 200개의 스틸과 100개의 블록샷을 기록한 역사상 첫 번째 선수가 됐다. 그는 또 체임벌린 이후 한 시즌에 3,000득점 이상을 기록한 첫 번째 선수가 됐다. 그의 맹활약에도 팀 성적이 평범해 시즌 MVP상은 매직 존슨에게 돌아갔다.


 

조던의 팀 동료인 존 팩슨은 1987년 4월 29일 셀틱스에 패해 탈락한 후 시카고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던의 3000득점 시즌은 놀라웠다. 이보다 더 좋은 시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어시스트, 리바운드 등은 아직 최고 수준까지 오지 않았다. 그는 더 좋은 올-어라운드 선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던은 37.1득점, 5.2리바운드, 4.6어시스트, 2.9스틸로 시즌을 마쳤다.

 

팩슨의 말처럼 조던은 1987-88시즌에 완벽한 선수가 되어 리그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 앞길을 막아선 팀은 이번에는 셀틱스가 아닌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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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기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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