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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산책(1)] 불어 모른채 파리로 가다

김양석 작가의 좌충우돌 프랑스 이민 이야기

등록일 2022년12월29일 19시47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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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Shutterstock

 

 

가족을 두고 프랑스를 떠나 서울에 돌아 온지도 벌써 12년이 흘렀다.

 

서울에 와서도 나름으로 열심히 살아왔고, 이렇게 얻은 수많은 경험은 다양한 이야기 소재로 변화하게 되었다. 별생각 없이 일상적으로 바쁜 하루를 보내던 중, 문득 그동안 겪었던 경험을 글로 적어보는 것이 괜찮겠다고 생각하였다.

 

이후 글을 쓰고자 하는 첫 번째 소재를 고민하다가, 일반인들은 경험하지 못한 프랑스 정착 과정이 나름대로 경쟁력이 있겠다고 판단하였고, 당시의 추억들을 하나씩 소환하여 글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3년 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직장생활이 바쁘다는 핑계와 함께 글을 쓰는 작업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글쓰기가 수시로 중단되기를 반복하다가 이제야 완성을 볼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별도로 글 쓰는 시간을 할애하기도 힘들었고 작업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았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내가 글을 써도 누군가 읽어줄 사람이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이러한 생각들이 자꾸만 머릿 속에서 맴돌다 보니까 글쓰기가 더욱 힘들었고, 이 글을 써서 큰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수시로 작업이 중단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남들이 이 글을 읽어줄까?’라는 고민으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글 쓰는 작업에 더욱 집중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이왕 시작한 글쓰기를 멈추지 말고 마무리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도 도출하였다. 나름대로 결론을 도출한 이후로는 작업시간에 가속도가 붙었고, 빠른 속도와 함께 그동안 미뤄왔던 글쓰기를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평소 글을 써본 적이 없는 비전문가이기에, ‘이 글이 일반인에게 어필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0여년간 프랑스에서 생활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일화로 엮은 수필형식의 내용이다. 특별히 어떤 계층을 대상으로 글을 쓰지는 않았으나, 유럽 특히 프랑스에 대하여 호기심을 갖고 있는 분들에게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별도로 책을 읽고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면 메일로 문의 바라며, 가급적 이른 시일 내에 답장을 드리도록 하겠다.

 

[글: 김양석(서울 한서고등학교 이사장), 메일 : franceguid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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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에 첫발을 내딛다
 

내게 2000년 1월 5일은 절대 잊히지 않는 날이다. 프랑스어는 ABC도 배운 적이 없었고 그런다고 영어 또한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던 상태에서 가족들과 함께 무작정 프랑스로 건너갔으니 그저 무모하다는 단어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무엇보다도 프랑스에는 친인척은 물론이거니와 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사람조차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세상의 이치를 너무나도 몰랐기에, 그 당시 가족들을 데리고 낯선 이국땅에 갈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2000년은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민주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으며 새로운 민주 정부가 출범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았던 시점이었고, 2000년이 되어서 20세기가 마감되고 새로이 21세기가 시작되는 등, 여러 가지로 뜻깊은 시기였다. 그 시절 외국, 특히 유럽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학생 시절 열심히 운동권에 참여하였고, 자신은 대한민국에 남아 있고 싶지만, 주변 환경이 너무나 위험하였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이민을 선택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반면에 내 경우는 단순히 '나도 외국에서 살 수 있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작용한 것으로써,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한다면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의 표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가족들을 데리고 프랑스에 갈 생각이 있냐고 누군가 질문을 해온다면 결단코 No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만큼 아는 사람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 생활, 특히 가진 것 없이 외국으로 이주한다는 것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일인 것이다.


외국에 가기로 결정하고 그 대상 국가를 프랑스로 선택한 이유도 무척이나 우연이었다. 나는 원래 음악 듣기를 좋아했으며 클래식, 재즈, 대중음악 등 특정 장르를 구분하지는 않았다. 학창 시절 독일 가곡이라는 분야에 깊이 심취해 있었고 그중에서도 슈베르트에 대한 동경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저런 사유로 개인적으로는 한 번쯤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라서 독일어권에 대한 정보를 유학원에서나 겨우 구할 수 있었는데, 서울 시내에서 독일유학원을 찾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어느 날 우연히 아내와 같이 프랑스대사관을 지나치는데 프랑스유학원 하나가 눈에 띄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곳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유학원에서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프랑스란 국가에 대하여 안내해 주었다. 유학원 상담자는 주로 프랑스의 복지정책, 예를 들어 의료보험이나 주택보조금 등을 설명하는데, 현재의 관점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이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내용들이었다.

그래도 프랑스어라는 걸림돌이 있어서 어학에 관하여 질문을 하였는데, 담당자가 우리 부부의 전공을 질문하기에 '영어학'이라고 답변하였다. 상담을 진행하시던 분이 그 답변을 듣더니 " '영어학'을 전공하셨으면 프랑스어는 쉽게 배워요"라고 결론을 내주었다. 결국 그 말만 믿고 프랑스라는 국가에 유학을 하겠다는 결정을 했는데 그 당시 왜 그렇게 용감한 생각을 했던지?


일단 프랑스에 가기로 결정하니까 그다음부터는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침 작품 활동 겸 미술 공부로 프랑스에서 체류 중인 한 분을 소개받았고 그분의 도움으로 프랑스 동부에 위치한 디종(Dijon)이라는 도시에서 거주하시는 조르쥬(Georges) 할아버지 집에서 당분간 머물기로 약속을 하였다. 따라서 파리 드골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디종(Dijon)으로 떠나는 기차를 타야만 했다. 당시에는 나와 아내 둘 다 프랑스어를 전혀 못 하는 상태였기에 바로 공항 내에 있는 SNCF 기차역으로 가는 것조차도 우리 부부에게는 큰 어려움이었다.

 

장시간의 비행과 시차 적응의 문제, 그리고 낯선 땅에 도착하였다는 스트레스로 인해서 극도의 피곤함이 몰려들었던 것 같았다. 만 3세였던 큰아이를 챙겨주기도 쉽지가 않았고 가지고 갔던 수화물도 많았기에, 타인이 보기에도 그런 우리 가족의 모습이 무척 어눌해 보였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정신을 바짝 차린다고 했지만,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가지고 갔던 가방 하나가 없어졌다. 그 가방 안에는 아내가 아끼는 액세서리들이 들어 있었는데, 그것들이 전부 없어진 것이다. 처음부터 꼬이기 시작한 프랑스 생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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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파리 드골공항에 도착한 후 일어났던 프랑스에서의 첫날을 생각하면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을 갖는다. 언젠가는 그 잃어버렸던 액세서리들을 다시 아내에게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행에 옮기질 못하고 있다. 시간적 여유, 거리상의 문제점도 있겠지만 여전히 금전적인 문제로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아내에 대해 미안함과 스스로에 대한 무능함의 자책만 있을 뿐이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드골공항뿐만 파리 시내 전역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유럽의 주요 관광 도시에서는 여행객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좀 도독들이 무척 많다고 한다. 유럽에는 파리뿐만 아니라 런던, 로마, 베니스, 그리고 바르셀로나 등 워낙 유명한 관광지가 있으며, 이러한 도시에는 해마다 수많은 인원이 몰려들 것이고, 따라서 이들을 노리는 도독들 또한 많아서 해마다 크고 작은 도난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파리에서 거주하는 동안에는 가급적 허름한 복장을 하고 다녔기에, 얼핏 보기에는 아주 힘들게 사는 사람의 모습으로 보였다(실제로 프랑스에서 체류하던 동안에는 그렇게 여유 있는 생활을 하지 못하였다). 이런 나의 모습을 프랑스 사람들은 별 관심 없이 일반적인 한 사람으로 대하여 준 반면에, 한인사회에서는 조선족이냐는 말로 무시하는 듯한 질문을 던졌다.
 

사람의 외모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인들이 너무나 외모에 치중하는 것 같아 씁쓸할 뿐이었다. 디종(Dijon)에 도착하니 조르쥬 할아버지가 미리 나와서 우리 가족을 맞이해 주었다. 당시에는 너무나 고마웠고 낯선 프랑스 땅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한명은 있다는 생각에 우울한 마음이 사라지고, 약간의 희망을 느끼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집으로 우리 가족들을 데리고 갔다.

당시 우리 가족은 무척이나 피곤한 상태였는데 할아버지는 머무를 방을 보여주지는 않고, 전혀 소통되지 않는 대화를 이어 가려고 했기에 너무나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때부터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와 생존 회화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터득해 나갈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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