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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그후손] 안중근 의사 손자 인터뷰

할아버지 아버지의 부재로 고된 삶을 산 후손들

등록일 2023년01월02일 22시08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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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영웅이란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다. 상영 중인 영화 '영웅'은 안중근 의사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영웅의 뒤에는 항상 그를 믿고 응원하는 이들이 함께한다.

 

영화 속에서는 독립운동가들과 가족들이 함께 한다. 그중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안중근 의사가 흔들리지 않도록 나라를 위한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안중근 의사의 죽음을 지지한다. 안중근 의사의 사형 장면을 보면 나라를 위하는 마음과 가족을 위하는 마음을 알 수 있다.

 

영웅 안중근 의사이기에 나라를 위한 마음에 집중되어 있는데 안중근 의사의 가족과 그 후손들의 삶.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은 어땠을까? NJT는 안중근 의사의 사촌 손자를 독점 인터뷰 했다.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1939년생 안계성이라고 하는데 어릴 적에는 기복이라고 불렸다. 그때는 “기”자 돌림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중간에 신고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안중근 의사와 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나의 할아버지(안홍근)와 안중근 의사는 사촌지간이다. 나의 증조 할아버지(안태현)와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안태훈)가 형제이다.

 

-안중근 의사를 직접 만난 적이 있으신가요?

안중근 의사를 만난 적은 없다. 당시 할아버지(안홍근)도 별로 만나지 못했다. 만주에 살다가 황해도에 왔을 때 할아버지(안홍근) 과수원에서 3개월 생활했는데 그때 함께 생활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고향이 어디 신가요? 

만주이다. (북한성 해로니) 일제 강점기에 안 씨 집안의 자손들은 만주에서 살았다. 만주에서 생활할 때 아버지(안도생)는 집에 없었다. 가끔 들렸는데 권총을 본 기억이 있다. 어머니(서정희)는 누가 물어보면 아버지가 보따리 장사 갔다고 말하라고 했다. 그때 내 나이가 여섯살이었다. 나의 원적은 황해도 신천군 두리면 청계리이다.

 

-김구 선생님이 사 주신 신발을 신었다고 했는데 이야기를 들려 주시겠어요.

만주에 살다가 6살쯤 황해도 옹진에서 과수원 하는 (안홍근)할아버지 집에 3개월 살다가 남한으로 왔다. 서울에 자리 잡을 때 김구 선생님의 주선으로 아주 큰 집을 받았는데 얼마 살지 못했다. 어느 날 미군이 와서 사무실로 사용해야 하니 나가라고 하여 서울 장충동 피난민 수용소로 쫓겨났다. 그때 집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김구 선생님은 당시 생활하기 힘들다고 어머니(서정희)에게 100원을 주었고 어머니는 그 돈으로 나의 구두를 맞추어 주었다. 가죽구두는 금방 작아져서 얼마 신지도 못했다.

 

-아버지(안도생), 할아버지(안홍근)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들려 주시겠어요.

만주에서 생활할 때 아버지(안도생)를 별로 만나지 못했다. 해방 이후 서울 장충동 피난민 수용소에서 생활하는 것을 보고 안병역이라는 분이 을지로 6가의 집을 내주었는데 어느 날 동네 반장이 찾아와 아버지를 끌고 간 것이 마지막이다. 할아버지(안홍근)에 대한 기억도 3개월 함께 생활한 것이 전부이다.

 

-할아버지(안홍근)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1996년 어머니(서정희) 장례식에서 한 지인이 할아버지(안홍근)와 아버지(안도생)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당시 증명할 방법도 모르고 사는 게 힘들어서 듣기만 했었는데 이명박 대통령 임기 시 할아버지(안홍근)가 독립자금을 운반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해방 이후 아버지(안도생)는 만두 장사, 찐빵 장사를 하다가 서울에 간장, 된장을 만드는 장 공장에 취직을 했는데 그때가 좋았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6·25전쟁으로 또 피난을 가야 했고 이후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그때는 아버지 할아버지의 힘보다는 어머니(서정희)의 힘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살아왔다. 독립유공자 후손의 삶이 쉽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이 있지는 않으신가요?

북한성 해로이 만주에서 태어나서 6여 년을 생활했고 6살 때 황해도로 왔다. 다시 남한으로 피난을 가야 했고 좋은 집에서 생활하는 것도 잠시였다. 집을 빼앗기고 피난민 수용소에서 생활했는데 생활이 힘들어지면서 형은 사진기술을 배우면서 소사에서 생활하였고 누나는 고모의 친척 집에 보내졌고 나는 고아원에서 생활했다. 이후 어머니(서정희)는 천주교 전도회장을 하였고 전도를 위해 전국을 다녔다. 당시 루시아 중·고등학교(6년제)를 졸업한 여성은 흔치 않았기에 어머니를 따라 전국을 다녔고 어머니는 전매청 촉탁 교수, 천주교 전도회장을 하면서 월급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다. 당시 아버지와 할아버지 보다 어머니의 힘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자라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존재는 부재였다. 어차피 그 시절에는 다 그렇게 살기는 했는데 독립운동을 위해 부재였다는 것이 다행이기는 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부심!!!

 

[취재 후기] 

 

기자는 취재하는 중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너무나도 현실감 있게 들을 수 있었다. 인터뷰이는 이름과 장소에 대해 기억을 잘 하고 계셨는데 어머니(서정희)를 따라 다니면서 6살에 방송 국민학교를 입학하였는데 어린애를 입학시킨 이유는 잘 모르겠다며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이후 기독교 재단의 새들 고아원에서 중학교에 다녔고 다시 부산 감천에 있는 천주교 재단의 고아원으로 옮겨와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어머니를 따라 충북 보은에서 농고를 2년 다녔고 마지막으로 부산 배정고등학교에서 3학년을 하고 졸업을 했다고 한다.

 

당시 이모부의 도움을 받으면서 생활을 하였는데 밀가루 포대 공급일을 하던 이모부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어머니(서정희)의 고향은 원산이었는데 두만강을 부른 고 김정구 선생님이 어머니(서정희)의 집에 함께 살았다고 하면서 몇 살인지 모르겠지만 원산에 가서 처음으로 도루묵을 먹었다고 얘기하면서 웃긴 노래를 불러 주셨다.

 

당시 팔도를 흉내 내면서 했던 “황해도 방구잡이, 함경도 물장구, 강원도 감자바위, 전라도 깽깽이, 경상도 문딩이, 경기도 깍쟁이....” 라는 노래를 맛깔나게 불러 주었다. 나도 함께 어린 시절 아버지가 불러 준 “돼야지국에 이밥을 말아무니 맛이 베베함메....”라는 노래를 떠 올리며 취재를 재미 있게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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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영 인턴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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