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뉴스등록
포토뉴스
RSS
자사일정
주요행사
맨위로

[하퀴즈온더블락] "고행中 감사" 박병기 교수

죽음의 앞에 서도 후회없는 삶이란 무엇일까

등록일 2023년01월09일 05시41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기사글축소 기사글확대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 '하퀴즈 온더 블락'은 NJT 하민혜 인턴 기자가 각종 직업군에 있는 이들을 찾아가 그들의 노고 등을 들으며 人터뷰를 하는 코너입니다. 앞으로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Photo by NJT

 

 

첫 번째 만남. '가진 게 없는 부자' 박병기 교수 

 

하퀴즈 온더 블락의 첫 인터뷰 손님인 박병기 교수를 찾아 경기도 용인시로 향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줌(Zoom)에서였다. 박병기 교수가 웹 3.0 시대에 대해 가르치는 온라인 강연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당시에도 설렌 마음으로 그를 만났는데 12월27일 매우 추운 날 설렘과 반가움으로 용인으로 향했다. 네비게이션이 도착지를 알리고 한참을 갔더니 그가 일하는 사무실이 있는 깔끔한 외관의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깔끔한 새 건물이었지만 주차장은 외관에 비해 매우 비좁았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이렇게 좁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박병기 교수가 언젠가 말했던 '좁은 길'이 생각났다. 그는 6년 전 '좁은 길'에서 한국 살이를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6여 년간 힘겨운 길은 마치 그가 일하는 건물 아래 주차장으로 가는 길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주차장 아래에로 들어가니 놀랍도록 탁 트인 공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려가는 길은 도저히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을 만큼 좁은 길이었는데 정작 주차공간은 넓직했다. 힘겨운 길을 통과하면 넉넉한 자리가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힘겨운 길은 웬만해서는 들어서는 사람이 없기에 그 길을 지나면 나를 기다리는 자리는 늘 넉넉하게 기다린다.

 

좁은 길을 지난 박병기 교수는 지금 어쩌면 넉넉한 공간에 와 있는지 모른다. 그는 한국에 와서 재산이 0인 상태가 6년 전과 그대로이지만 넉넉한 자만이 세울 수 있는 여러 일을 동료들과 해냈다. 아우라 유니브로 불리는 NFT 플랫폼, 언론사이트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그리고 미래교육을 하는 증강세계관학교 등이 그에게는 넉넉한 공간이 되었다. 그는 최근엔 인세진 교수가 중심이 된 'e메타 잉글리시'라는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게 되어 기독교 명문인 벨헤이븐 대학을 비롯한 미국 및 외국 대학에 한국 학생들을 보내는 일을 준비 중에 있다.

 

이는 지난 6년간 벌어진 일들이다. 지난 6년 동안 일어났던 일을 좀 더 상세히 들어보았다.



NJT 하민혜: 미국에서 26년간 지내신 걸로 압니다. 한국에 오기로 결정하셨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어떤 계기로 한국에 와서 언론과 교육에 관련한 일들을 펼치시기로 한 건지 궁금합니다.

 

인터뷰이 박병기: 주변에 반대가 심했습니다. 모두 저에게 제정신이 아니라며 한국에서 꿈을 꾼 것에 대해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남자로서 한창 나이인 40대 중반에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을 포기해야 했으니까요. 사회적인 위치나 재정에서 안정되게 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내려놓고 왔습니다. 저의 한국행에 대해 의아해하거나 염려해 주시는 분들이 많으셨어요. 1년 동안 기도하고 준비하며 가족의 동의를 구했습니다. 맨땅에 헤딩하는 느낌으로 한국에 들어올 당시 제 자녀는 미국에서 태어난 고등학교 3학년, 중학교 2학년에 있는 친구들이었습니다.

 

한국으로 가리라고 결심했던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다. (한국에 와 보니 세월호는 정치적인 이슈와 정쟁화가 되어 이 이야기는 처음으로 꺼낸다며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내용을 정치적인 관점으로 보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2014년 4월, 전라남도 진도군 관매도 부근 해상에서 세월호가 침몰한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승객 중 299명이 사망하고 5명이 영구 실종된 다시는 없어야 할 국민 대참사였지요.

 

미국에서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한국에서 잘 알려진 김OO 변호사와 만나 토론을 하고 대화를 했습니다. 김OO 변호사는 꽤 격앙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자녀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당시 미국에 연수 중이던 김OO 변호사가 서둘러 한국에 가야겠다고 했고, 저는 박사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들어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조국을 위해 내가 할 일이 없는지 고민하다가 교육과 언론 분야에서 기여할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왔는데 지난 2022년 10월, 이태원에서 300명이 넘는 압사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저는 현장 취재를 갔습니다. “왜 우리말을 안 들어주냐”며 통곡하는 아버지를 보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부모로서 찢어지는 그 마음을 느꼈습니다.

 

두 사건을 정치화하며 싸우는 여야 모두 답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부모와 희생된 이들을 생각하며 정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할 일은 교육과 언론을 통해 조금이라도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성이 넘치고 창의적인 아이들의 입을 닫게 하는 교육에 조금이라도 자극을 주며, 국민의 아픔보다는 책임을 면하거나 힘만 키우기 바쁜 파워를 가진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싶었습니다.

 

이런 일을 하고자 하는 목적이 돈이나 명예였다면 미국에 그대로 있었을 것 같아요. 저는 무엇을 가지기 위해 이런 일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혹시라도 오해 없으면 좋겠습니다. 
 

 

Photo by NJT.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직후 현장 취재를 했다. 아픔을 잠시라도 함께 느끼기 위해서였다고.

 


NJT 하민혜: 처음 한국에 오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때로는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인터뷰이 박병기: 처음 인천 공항에 도착했던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환영하거나 픽업해주는 이가 없었죠. 공항버스를 타고 한 교회에서 제공하는 선교관으로 가서 그곳 문을 여는데 ’ 내가 왜 여기에 왔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거처를 마련하기 전에 가족들과 함께 두 달간 선교관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미국 거지가 여기는 뭐 하러 왔느냐'는 그런 시선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 좋은 뜻으로 왔는데 반기는 이 없으니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가진 것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이들에게 실망하면서 왠지 한국살이가 서글프기도 했던 것 같아요.

 

마음을 추스르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수원에 작은 도서관(거꾸로 도서관)을 여는 일이었습니다. 소박하지만 한국의 아이들과 책을 읽으며 토론하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한데 예상 외로 한국의 학부모님들이 자녀의 독서에는 관심이 높지 않았습니다. 교육의 중요성이 온통 입시로 맞춰져 있는 형국이니까요. 그래서 강연, 소모임 등을 열어 꾸준히 사람들을 모으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기같은 것을 겪었어요. 이건 마치 미국에서 총기를 절대 없앨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변혁이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들고 좌절하고 낙담하는 날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가족들도 한국에서의 생활에 혼란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교육을 변화시키겠다는 신념 하나로 버티기에 힘겨운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를 붙잡아준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이 저에게 힘을 줬습니다. 미국에서 지인들은 후원도 해주고 격려도 해줬습니다. 온라인 자원봉사도 해주시고.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언론이 한국행 6년만에 시작되었습니다. 기적처럼 NJA(뉴저널리스트 아카데미) 1기 분들을 만났고 24주간의 수업을 통해 제가 큰 힘을 얻었습니다. 외롭고 힘겨운 길을 함께하겠다는 분들이 많다는 것에 놀랍고 감사했습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나 지금이나 제가 가진 자산은 여전히 0원입니다. 그럼에도 꿈만 같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블록체인 플랫폼, 증강 세계관 학교, 지금의 NJT(뉴저널리스트 투데이) 등은 모두 기적같이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감사한 마음이 샘솟습니다. 지난 6년간의 모든 역경과 고난 속에서 지금같은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기적같이 느껴집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죽을 때가 찾아온다면 한국에 온 일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NJT 하민혜: 교수님은 그야말로 개척자의 정신을 지니신 것 같아요. 교육과 언론에 힘을 써 주시는 데에 감사를 드리고 존경스럽다는 마음이 듭니다. 실례하지만 교수님의 근무 시간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많은 스케줄을 소화하시느라 몸과 마음이 흐트러지고 느슨해질 때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그럴 때 다잡으시는 방법이 있으실까요?

 

인터뷰이 박병기:  보통 우리는 '9 to 3’ 근무시간이 있는 곳을 꿈의 직장이라고 합니다.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오후 3시에 퇴근하는 걸 말하지요. 저희도 9 to 3입니다. 좋은 직장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3’은 오후 세시가 아닌, 새벽 3시를 말합니다.(웃음) 함께 고행을 하고 있습니다. 사명감이 없다면 그리고 즐겁지 않다면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근무 환경이죠. 업무 시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신적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몇명 되지 않지만 직원들이 한마음 한 뜻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데요. 제게 힘을 주는 것도 사람이고, 힘을 빼앗아가는 것 역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나름의 기준을 세웠고 에너지를 뺏어가는 사람들을 곁에 두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에너지를 계속 뺏기면 제가 이 일을 포기할 것 같아서입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 되려면 에너지가 엄청 빼앗기게 되거든요. 저는 힘겹고 어려울 때 또 대부분의 상황에서 성경의 예수님을 리더십 모델로 생각합니다. 그는 모든 상황에서 완벽한 리더십을 보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NJT 하민혜:  교수님의 말씀에서 그리고 눈빛에서 굳건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덩달아 제 가슴도 뛰는데요. NJT(뉴 저널리스트 투데이)는 어떤 언론으로 만들어 나가실지 각오와 앞으로의 계획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인터뷰이 박병기:  미국에서 언론을 할 때에 저를 포함해 3-4명의 기자가 매일 엄청난 분량의 글을 썼습니다. 3-4명이서 잡지까지 만들어냈으니까요. 당시 2002년 월드컵 축구가 열렸을 때였는데, 미선이 장갑차 사망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한국 여학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사건이었습니다. 월드컵 대회가 한창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 기사를 쓰지 않았습니다. 당시 한국 축구 대단했잖아요. 하지만 저는 그 아이들이 내 자녀라면 그렇게 넘어갈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고, 저희가 그 기사를 비교적 크게 다뤘습니다. 저희 사이트가 나름 당시에 영향력이 있는 편이었거든요. 다른 언론들은 대회가 끝나고 한참 지난 후에서야 이 사건을 다뤘는데 저희는 그것을 대회 중에 다루며 사람들을 깨우려고 했습니다. 

 

또 하나의 좋은 예가 있다면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사격 금메달 후보였던 강초현 선수가 은메달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금메달 후보가 금(金)을 받지 못하면 '아쉬운'이란 말을 잘 쓰고 마치 큰 죄인 다루듯 했는데요, 그걸 너무나 잘 아는 강초현은 은메달을 받고도 우는 거에요. 여고생이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은메달을 받았는데 왜 울까 하면서 저희는 '강초현 울지마라'라는 칼럼을 올렸고 이것이 게임 체인저가 되어 이후에는 다른 언론들도 약간 그런 관점으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어요.

 

화제가 되었던 기사들은 이 외에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사진 왼쪽이 강초현. English: Silver medalist Cho-Hyun Kang of Korea, during the medal ceremony for the women’s 10 meter air rifle competition at the 2000 Olympic Games in Sydney, Australia, on Sept. 16, 2000, 16 September 2000 https://www.defense.gov/Multimedia/Photos/igphoto/2001239667, DoD photo by Tech. Sgt. Robert A. Whitehead, U.S. Air Force. (Released)

 

 

NJT(뉴저널리스트 투데이)를 2023년 3월에 창간합니다. 제가 꿈꾸는 것은 다방면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언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고, 다르게 보는 시선을 갖춘 취재와 기사글이 펼쳐져 있는 곳 말입니다. 인품, 글품, 발품을 가진 언론으로 성장하여 우리만의 독특한 기사글이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NJT(뉴저널리스트투데이)에 가면 고급 기사를 마음껏 볼 수 있다.' '고급 정보가 필요하면 NJT(뉴저널리스트투데이)에 가봐야지'라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면 좋겠습니다. 마치 글을 검색하려면 네이버와 구글에 가는 것처럼 고급 기사나 글은 NJT로 가서 검색해봐야지 하는 그런 언론을 만들고 싶습니다. 

 

지난 11월 저희 팀은 2주 정도 인도를 다녀왔는데요. 상당한 실업률로 곯머리를 앓는 인도에서는 현재 NJA(뉴 저널리스트 아카데미)와 AI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저희는 NJT 인도 버전을 만들고 또 20여개국에서 NJT 각국 버전을 만들어 한 달에 약 20,000건 이상의 기사를 쏟아내는 통신사 사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경우 많은 분들이 굉장히 영어를 잘하기 때문에 NJA에서 수료하는 이들이 기사를 쓰도록 하고 더 나아가서는 이들을 미국, 영국, 호주 등 영어권 국가로 연결해 일자리를 얻도록 하는 데이터베이스 구축까지 계획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기독교 사립 명문 벨헤이븐大와 지난 11월 체결한 MOU로 한국과 인도에서 자격증 과정, 학위 과정을 진행하게 됩니다. 여기에 제2 외국어로서의 영어 과정, 평생 교육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게 됩니다. 이는 언론, 블로체인과 유기적으로 진행됩니다. 앞으로의 일정 중 다음 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릴 CES(세계 최고의 가전 전시회)에 현장 취재와 비전 캐스팅을 위해 출국할 예정입니다. 

 

손을 잡고 함께 가려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몸은 고단하지만 매일 아침 기적을 맞이하는 느낌으로 눈을 뜹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고, 현재도 그런 줄 알지만, 그럼에도 같이 가려고 하는 분들에게 힘을 얻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분들과 함께 하면 좋겠다는 소망은 있지만, 일편으로는 열두 명이면 충분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NJT 하민혜 기자 후기] 인터뷰를 하는 내내 박병기 교수의 단단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간의 고생길에도 불구하고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을 생각하며, 무엇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가 그에게서 느껴졌다. 가진 것보다 이룬 것을 값지게 여기는 마음으로 돌자갈이 가득한 비좁은 길을 담대하게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엇을 더 가질지에 몰두하며 남이 가진 것과 내가 가진 것을 비교하기 급급한 시대에 그의 걸음걸음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온실과 지름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소유를 늘리기 위해 타협하지 않았다. 오직 사명만 보고 나아가는 그의 족적은, 우리네 삶이 결코 좀 더 가지며 위로 올라가는 일만이 능사가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그가 미래 교육에서 강조하는 미래저널 문답에 ‘왜 일하는가’ 그리고 ‘왜 사는가’를 매일 묻고 답하는 스스로 수도 없이 질문하고 답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본 기사는 유료기사로 기사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 결제 즉시 유료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디지털 콘텐츠 특성상 환불되지 않습니다. (단, 미사용시 환불 요청 가능)
- 결제한 내역은 마이페이지 결제내역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 환불 및 변경 문의와 관련해서는 메인페이지 하단 [이용약관 및 고객지원]을 통해
더 자세한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 정기회원권은 회원가입 후 이용이 가능합니다.
- 정기회원권은 마이페이지 또는 사이트 우측 상단 이용권결제를 이용해주세요.
하민혜 인턴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올려 8 내려 0

가장 많이 본 뉴스

뉴스 인물 교육 시리즈 짘놀

포토뉴스 더보기

현재접속자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