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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꿈은, 체육 교사였다.
시간이 지나고 우연히 고등학교 1학년 생활기록부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장래 희망란에 ‘체육 교사’라고 적혀있었다. 수능을 볼 때까지 장래희망이 몇 번 바뀌어서 잊고 있었는데, 체육 교사라는 꿈을,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조금은 놀라기도 했다.
계획대로 체육교육과에 입학하고 잠시 혼돈의 시간이 있었지만, 군대를 다녀와서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복학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운동해서, 어느 정도 괘도(?)에 올라섰다. 함께 공부하고 운동하던 선배나 동기들도, 내가 임용 고시에 합격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유아 체육 강사’였다. 전공을 살리면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라 마음에 들었다. 아이들을 좋아했기에,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체육을 가르치는 게 재미있었다. 초등학생은 축구와 농구 그리고 줄넘기를 비롯한 학교 체육을 가르쳤다. 체육 교사가 된 기분까지 들었다. 그렇게 3년 정도 강사 생활을 하면서, 이 직업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나 밖에서 가르치나 체육 교사는 같은 거 아닌가?’
임용 고시는 매년 선발인원을 발표한다.
지역별 그리고 과목별 인원을 발표하는데, 인원이 점점 줄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나를 설득하고 있었다. 어차피 체육을 가르치는 건 같은 게 아니냐고 말이다. 불확실한 시험에 도전하는 것보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이 길이 더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결정을 하고 임용 고시를 포기했다. 하지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이랄까?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아쉬움이 남았다. ‘지금 시험에 도전해 보지 않으면, 평생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은데?’
유아 체육을 포기하고, 시험 준비를 다시 시작했다.
손을 놓고 있던 기간이 있어서인지 머리가 잘 안 돌아갔다. 몸이 둔해진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그해에 난 결혼을 했다. 무조건 합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있었다. 그렇게 6~7개월을 미친 듯이 공부하고 운동했다. 필기시험 전날 동기들과 숙소를 잡고 함께 시험 정리를 했다. 그때 우연히 친구의 노트를 보게 되었다. 어떤 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3가지를 답하는 내용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내용과 달랐다. ‘어?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시험장에서 시험 문제를 받았다.
‘앗!’ 어제 대수롭지 않게 넘긴 문제가 나왔다. 그것도 6점이라는 큰 배점이 달렸다. 잠시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른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마지막 문제까지 다 푼 다음, 맨 앞으로 돌아갔다. 2번 문제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쓸 것인가? 친구의 노트에서 본 내용으로 쓸 것인가? 한참을 고민했다. 종료 5분 전, 최근에 본 내용 그러니까 친구의 노트에 있던 내용으로 답을 써서 제출했다.
마음이 찝찝했다.
그래도 다른 문제는 수월하게 풀었으니 괜찮다고, 나를 위로하면서 그렇게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시간이 지나고 합격자 발표가 났는데, 떨어졌다. 암담했다. 2번 문제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른 문제는 수월하게 풀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임용 시험 정답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다. 이의가 있어서 신청하면 열람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학원가에서 발표한 2번 답은, 내가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답을 썼으면 맞을 수 있던 문제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왜 틀렸느냐보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가 더 큰 문제였다. 첫째 출산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통로가 꽉 막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걸었던 밤거리의 차가운 기운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시간이 지나도 아쉬움은 남는다.
시험 문제에 대한 아쉬움도 남고, 다시 도전하지 못한 아쉬움도 남는다. 체육 교사가 되지 못한 아쉬움도 남는다. 사실 잠시, 시험 전날 노트를 보여준 친구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 노트만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붙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커트라인과 학원에서 배포한 공신력(?) 있는 답안을 비교했을 때 1점 정도의 차이가 났는데, 6점짜리 문제를 날렸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더군다나 나는 필기보다 실기에 더 강했다.
아쉬움이 남지만, 깨달은 것도 있다.
이렇게 질문을 해봤다. “노트를 보여준 친구가 잘못인가? 그 노트를 본 내가 잘못인가?”, “노트를 보고 무엇이 다른지, 왜 살펴보지 않았나?”, “내가 오랜 시간 공부한 내용을, 왜 믿지 못했나?” 등등. 문제를 풀 때, 내가 믿고 있던 답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출처가 확실하지도 않은 다른 것에 마음이 쏠렸다. 그래서 나는 정답을 쓰지 못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내 잘못인 거다.
삶에서 마주하는 많은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자신이 지금까지 간직하고 지켜온 소신(所信)이 있다. 그 소신이 가끔 흔들릴 때가 있다. 당장 내가 필요한 게 눈앞에 아른거릴 때다. 배가 고플 때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는 빵은, 그 어떤 음식과 견줄 수 없다. 궁핍한 상황인데 누군가 그 상황을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제안을 한다면,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일 거다. 하지만 출처와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면 어떨까? 심지어 내 소신을 저버려야 하는 상황이라면?
내가 상황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묻고 또 물어야 하는 질문이다. 그 기준을 지키기 위해 내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또한,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 기준을 명확하게 붙들고 있지 않으면, 언제 어느 때 다가올지 모를, 위험한 상황에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명하는 정당성이 아니라,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당위성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을 위해서라도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