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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의 전당] 오바마 (정치. 첫 이야기)

오바마는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등록일 2022년09월08일 15시54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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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Shutterstock. Stock 사진 ID: 182558543 Barack Obama on stage for Barack Obama Presidential Campaign Rally, Keene High School gym, Keene, NH, January 06, 2008

 

 

*아래 글은 박병기 에디터의 공동 저서인 ‘언택트 시대의 마음택트 리더십’에서 전재했음을 미리 밝힙니다.

 

 

리더는 ‘나에 대해 깊이 알고, 이웃을 깊이 관찰해서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내어 타인을 위한 삶을 사는 자’이다. 더 나아가 리더는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사고를 하고 협력을 잘하고 좋은 인성을 가진 자로서 놓인 문제를 해결하며 세상을 이롭게 하는 자’이다. (박병기, 2020)

 

수많은 리더 중에 위 리더십 정의에 부합하는 시대적 인물이 있다. 바로 전 미국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다. 미국 역사상 첫 유색인종 대통령이 된 오바마의 삶을 살펴보면 ‘소외된 자’들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재임 중에 ‘가진 자’들의 집중포화를 받아 ‘바른 정치’를 하고도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많은 미국 국민은 그의 ‘리더십’ 특별히 서번트 리더십에 박수를 보냈다. 김종현(2008)은 그를 ‘검은 케네디’라고 칭할 정도였다. 조희전(2017)은 오바마를 구세주와 같은 존재라고 극찬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에게 오바마는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작은 예수라고 불리던 링컨이 그러했듯이 오바마 역시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어떻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살 수 있었을까?
 

 

가난한 자들 속에서의 삶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하면 떠오르는 게 있다. 그는 성장 과정에서 서민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밥과 함께 고추를 먹었던 사람’ ‘개고기와 뱀고기 그리고 튀긴 메뚜기를 먹었던 사람’ ‘가난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아시아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 등으로 기록됐다.

 

오바마는 어린 시절 인도네시아에서 산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아시안이 어떤 사람인지, 아시아 문화가 무엇인지 체험했다. 그는 어떻게 인도네시아에서 살 게 되었을까. 그의 모친인 스탠리 앤 던햄 덕분(?)이었다. 스탠리는 남자 이름인데 이는 그의 부모가 남자아이를 기대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오바마의 모친은 그래서 스탠리보다는 앤(Ann)이라는 이름으로 평생 불렸다.

 

앤 던햄(Ann Dunham)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직장을 얻은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로 이주했다. 공부를 잘해서 시카고 대학 등에서 장학금 제의가 있었지만 부모님은 그가 멀리서 살기를 원치 않았고 앤은 결국 하와이주립대에 입학하게 됐다. 여기서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뀐다.

 

1960년대 백인이 타인종과 결혼하는 것이 터부시됐던 시대에 앤은 아프리카 케냐에서 온 교환학생 버락 후세인 오바마와 결혼하게 됐다. 그리고 두 사람은 1961년 8월 4일 버락 오바마 주니어를 낳았다. 버락 오바마 주니어가 바로 미국 대통령이 됐다.

 

버락 오바마 시니어는 케냐에 가족이 있었다. 아내도 있었고 이혼한 상태가 아니었다. 앤 던햄은 오바마가 이혼했다는 말을 듣고 결혼을 결심했고 아이까지 낳았는데 나중에 공식적인 이혼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했다.


아들인 버락 오바마 주니어가 2세였을 때 아버지 오바마 시니어는 하버드대로부터 장학금 제의를 받게 됐다. 그는 아내와 아들을 하와이에 두고 하버드대로 향했다. 이후 이들은 오랫동안 서로 얼굴을 보지 못했다. 결국에는 앤과 버락 오바마 시니어는 이혼하기에 이르렀다.

 

앤 던햄은 오바마의 아버지와 이혼을 한 후 역시 하와이대학교의 교환학생이었던 인도네시아 출신 롤로 소에토로(Lolo Soetoro)와 재혼을 하게 됐다. 2년 동안 하와이에 살았던 소에토로는 인도네시아로 돌아가게 됐는데 그가 자카르타로 돌아간 1년 후 앤과 버락 오바마는 양아버지 곁으로 가게 됐다.

 

버락 오바마의 인도네시아 삶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버락은 배리(Barry)로 불렸다. 배리는 자카르타에서 살면서 논밭을 놀이터 삼았다. 그는 또 코뿔소를 타며 놀기도 했다. 오바마는 당시를 회상하며 “작은 생고추를 쌀밥과 함께 먹게 되었고, 개고기, 뱀고기, 튀긴 메뚜기 등도 먹을 기회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됐다. 그리고 그는 가난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게 되었다. 그의 집 앞에는 많은 거리의 부랑자들이 거닐고 있었다. 오바마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삶은 내가 미국 시민권자로서 축복을 받았음을 알게 함과 동시에 환경이라는 게 어린이들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것, 그로 인해 누군가는 정말로 부자가 되고 누군가는 정말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버락 오바마의 양 아버지인 롤로 소에토로는 미국 유학파였지만 가난하게 살았다. 가난한 삶에 치여서였는지 소에토로는 약육강식을 자주 강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의 친모는 4가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를 아이에게 가르쳤다. 4가지는 정직, 공정성, 직설화법,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이었다.

 

리더는 ‘나에 대해 깊이 알고, 이웃을 깊이 관찰해서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내어 타인을 위한 삶을 사는 자’이다. 더 나아가 리더는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사고를 하고 협력을 잘하고 좋은 인성을 가진 자로서 놓인 문제를 해결하며 세상을 이롭게 하는 자’이다.

 

이 리더십 정의에 의하면 오바마는 타인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는, 특별히 가난한 자를 위한 삶을 살 수 있는 경험을 어렸을 때부터 했다. 그는 또한 완전히 다른 문화 속에서 이웃을 깊이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서번트 리더십의 장인이 될 준비가 마쳐진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삶

 

버락 오바마의 모친인 앤 던햄은 두 번째 남편인 롤로 소에토로와 함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살았다. 오바마도 6세부터 10세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살았다. 앤 던햄이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는데 이는 바로 의료시설 때문이었다.

 

어느 날 배리(오바마의 어린 시절 애칭)가 동네에서 놀다가 손을 다쳤다. 앤 던햄은 이웃의 자동차를 빌려 급하게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병원의 풍경이 가관이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두 명의 남자가 도미노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앤 던햄이 두 사람에게 의사가 어디 있느냐고 묻자 두 사람은 “우리가 의사다."라고 답했다.

 

배리 엄마는 두 사람에게 부상 정도를 설명하고 빨리 치료를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놀라웠다. 그들은 “게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배리는 이날 팔에 20바늘을 꿰매는 수술을 받았다. 이 일이 발생한 얼마 후 앤 던햄은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기로 했다. 배리가 의료 시설이 좀 더 좋은 곳, 교육 환경이 좋은 곳에서 살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앤 던햄은 부모님이 거주하는 하와이로 아들을 보냈다.

 

배리가 미국으로 가기 직전에 그의 가족 형편은 크게 좋아지고 있었다. 군 제대를 한 양아버지인 롤로 소에토로가 미국 오일 회사에 입사하면서 갑자기 경제적으로 풍요해졌다. 오바마는 당시를 회상하며 “우리는 큰 집으로 이사를 했고 자동차를 소유하고 운전사도 있었다. 당시에는 갖기 어려운 냉장고, TV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전에는 작은 방갈로에서 살았는데 이와 비교하면 삶의 질이 크게 달라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으로 보내진 이유는 어머니의 뜻 때문이었다. 교육, 의료 환경이 좋지 않은 나라인 데다가 양아버지와의 관계가 점점 멀어진 것을 감지한 앤 던햄은 1971년 오바마를 하와이로 보냈다.

 

오바마의 인도네시아 삶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다. 인도네시아 전통 복장을 하고 동네 아이들과 축구를 했던 기억은 그에게 생생하게 있지만 종교적인 배경이 복잡해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가 1968년 입학했던 세인트 프란시스 아시시 재단 학교는 인근 지역에서 교육환경이 가장 좋은 초등학교였는데 무신론자인 그의 어머니 앤, 그리고 모슬렘인 롤로에게는 가톨릭 학교라는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2년 후 아버지가 오일 회사에 입사하면서 이사를 하게 된 배리는 모델 프라이머리 스쿨 멘텡이라는 공립학교로 전학을 했다. 공립학교이기에 그는 일주일에 두 시간 정도는 모슬렘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의 정신세계는 다양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는 어머니가 철저한 무신론적 긍정론을 가르쳤고 양아버지는 모슬렘 교육을 했으며 가톨릭 학교에서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했기 때문이다.


양아버지인 롤로는 그러나 독실한 모슬렘은 아니었다. 그는 아내와 배리에게 모슬렘 신앙을 가질 것을 권유하긴 했지만 이유는 이웃들과 교제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앤 던햄은 배리에게 “종교 자체는 존중해야 하지만, 너무 빠져들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양아버지 롤로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그는 양아들 배리가 강한 남자가 되길 원한다고 해서 호랑이 고기를 가져와 먹였다. 그는 철저하게 약육강식을 가르쳤다. 롤로는 또한 복싱글러브를 집으로 가져와 배리에게 복싱을 가르쳤다. 개고기, 뱀고기, 메뚜기를 가져와 먹인 사람도 양아버지였다.

 

친어머니 앤 던햄도 독특함에서는 뒤지지 않았다. 미국에서 타인종과의 결혼이 금기시됐던 당시 아프리카 및 아시아 출신 교환학생과 두 차례 결혼했던 것만으로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배리의 인도네시아에서의 삶은 다양성과 독특함이 키워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우기가 되면 물이 허리까지 차는 일을 경험했고, 연을 갖고 놀았으며, 닭싸움을 지켜봤고, 찬물 목욕에 익숙해져 있었고, 모기와 밤마다 싸웠다. 그는 또한 변기 대신 땅을 파고 그곳에서 변을 보는 것이 무엇인지 실제 생활 속에서 경험했고, 가난, 질병, 부자와 빈자의 분리가 무엇인지 인도네시아에서 배웠다.

 

인도네시아에서 거주한 지 6개월 만에 그들의 언어와 풍습에 완전히 익숙해진 배리는 교육열이 강했던 모친 덕분에 미국적인 사고방식도 잃지 않았다. 앤 던햄은 매일 새벽 4시에 배리를 깨워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준비를 시켰다. 학교 공부를 도우면서 앤 던햄은 정직해야 하고 공정해야 하고 판단력이 있어야 하고 미래를 위해 자신을 가꿀 신념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더는 ‘나에 대해 깊이 알고, 이웃을 깊이 관찰해서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내어 타인을 위한 삶을 사는 자’이다. 더 나아가 리더는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사고를 하고 협력을 잘하고 좋은 인성을 가진 자로서 놓인 문제를 해결하며 세상을 이롭게 하는 자’이다

 

이 리더십 정의에 의하면 오바마의 인성은 어머니로 인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직, 공정성, 직설화법,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을 강조한 그의 어머니로 인해 비교적 혼란스러운 삶 속에서도 바른 인성의 소유자로 조금씩 성장할 수 있었다. 그의 서번트 리더십은 인성에서 나온 것이다. 서번트 리더십의 장인으로서 기초를 닦고 있었던 것이다.


 

Ann Dunham with her father and children during Ann’s brief stay with her family in Hawaii during the mid-1970s. Bishop Hall, on the campus of Punahou School, in the background. Source, credited there as ”Courtesy of Obama for America”

 

 

아버지를 통해 자신을 보다

 

여섯 살 때부터 열 살 때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살았던 버락 오바마(이하 배리)는 10세 때 하와이로 터전을 옮겼다. 모친은 인도네시아에서 그대로 살고 배리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됐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백인이다. 외할머니 매들린이 은행에서 일했기에 배리는 사립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의 첫 미국 학교 이름은 푸나호우 사립학교(Punahou School)였다.

 

열 살 때 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배리는 그해 크리스마스 날 큰 선물을 받았다. 바로 친아버지의 미국 방문이었다. 케냐 출신 버락 오바마 시니어는 처음으로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배리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헤어졌기에 아버지와의 추억이 전혀 없었다. 그저 어머니에게서 들은 말이 전부였다. 이 만남을 통해 배리는 케냐에 배다른 남매 6명이 있음을 알게 됐다.

 

이 만남에서 배리는 아버지가 자신감 넘치는 사람임을 알게 됐다. 아버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나쁜 기억도 배리에게 남겨졌다. 아버지는 어머니 그리고 외할머니와 언쟁을 했는데 이는 배리의 TV 보는 습관이 원인이 됐다. 아버지는 배리가 공부하는 시간보다 TV 시청 시간이 더 길다고 생각했고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언쟁이 오간 것은 배리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다.

 

배리는 아버지와의 만남을 통해 부모가 결혼에 실패했고 친부는 가족에 대한 책임을 포기했음을 알게 됐다. 이전까지 친부에 대해 좋은 말만 들었던 배리에게는 혼란스러운 경험이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내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의 잠재력을 현실화시키지 못한 분이었다. 그는 똑똑한 분이었지만 그의 인생은 혼란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한편, 모친 앤 던햄(Ann Dunham)은 두 번째 남편인 롤로 소에토로와 관계가 나빠졌다. 앤은 롤로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하와이에서 롤로를 만났을 때 앤은 둘이 힘을 합하면 인도네시아인들을 위한 봉사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롤로는 강한 자의 편에 서길 원했다. 앤은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더욱 커졌다. 이러한 이상이 서로 다르자 두 사람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1971년 인도네시아에서 하와이로 돌아온 배리는 조부모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조부모는 손자를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앤은 배리의 교육비나 생활비를 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배리의 양육은 조부모의 몫이었다. 할아버지는 생명보험 세일즈맨이었는데 돈벌이가 신통치 않았고 다행히 외할머니 매들린이 하와이 은행의 부사장으로 승진하면서 배리의 교육에 더욱 투자를 할 수 있었다.

 

배리가 다녔던 푸나호우 학교는 호놀룰루에서는 최고의 사립학교였다. 배리는 장학금을 받기는 했지만 남은 학비는 조부모가 책임을 졌다. 이 학교는 다양한 인종과 종교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다녔던 곳으로 유치원생부터 12학년생까지 입학할 수 있었다. 76에이커의 큰 땅에 세워진 푸나호우는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사립학교였다.

 

1971년 가을부터 5학년으로 이 학교에 들어간 배리는 처음에는 인도네시아에서 갖고 온 샌들을 신고 옛 분위기가 나는 옷을 입고 다녔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이방인임을 철저히 깨달았다. 입학 몇 달 후 친구를 사귀게 되어 적응을 할 수 있었던 배리는 “좋은 학생이었고, 착하고, 마냥 행복하고 자신을 지킬 줄 아는 학생이었다.” 배리에게 산수와 과학을 가르쳤던 팰 에드렛지의 말이다.

 

배리는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평균 B+는 유지했다. 그는 공부 외의 다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독서를 즐겼다. 고등학생이 됐을 무렵 배리는 농구에 푹 빠졌다. 친부인 버락 오바마 시니어가 아들에게 농구공을 선물로 보내줄 정도로 그는 농구 마니아가 됐다. 그는 학교에서 항상 농구공을 드리블하면서 다녔다. 그리고 기회만 되면 농구 연습을 했다. 더운 날에도 그는 아스팔트 코트에서 슛 연습을 했다.

 

고교 시절 그의 코치였던 크리스 맥래클린은 “배리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체육관 쥐(gym rat. 체육관에서 사는 연습벌레라는 의미)였다."고 회상할 정도로 배리는 농구를 좋아했다. 배리는 11학년, 12학년 때 학교 농구팀에 들어갔다. 배리는 팀에서 포워드로 활동했다.

 

배리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그의 곁에는 친모 앤 던햄과 여동생 마야가 있었다. 앤은 두 번째 남편 롤로와 헤어지고 하와이로 돌아왔다. 오바마 가족은 작은 아파트를 임대해서 살았다. 배리는 농구에 빠져 살면서 동시에 하와이의 천국과 같은 삶을 즐겼다. 그는 고교 시절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방과 후에는 해변에서 수영을 하거나 서핑을 했다. 그리고 농구팀에 들어간 후에는 농구에 열정을 쏟았다.

 

배리 가족의 재정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모친 앤은 하와이대의 인류학 석사과정에 들어가 경제활동이 많이 제한됐다.

 

배리는 엄마를 잘 도왔다. 가게에서 물건을 산다든가, 동생을 돌보는 일, 빨래하는 일 등을 도왔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에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했다. 배리는 흑인으로서 당하는 차별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백인 여성과 엘리베이터를 타면 흑인인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

 

리더는 ‘나에 대해 깊이 알고, 이웃을 깊이 관찰해서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내어 타인을 위한 삶을 사는 자’이다. 더 나아가 리더는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사고를 하고 협력을 잘하고 좋은 인성을 가진 자로서 놓인 문제를 해결하며 세상을 이롭게 하는 자’이다.

 

이 리더십 정의에 의하면 오바마는 자신에 대해 깊이 알았던 사람이다. 그는 어렸을 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혼란에 빠지고 결국은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백인과 흑인의 자녀로 태어난 그는 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했다. 정체성을 확립하며 나아가는 자가 바로 서번트 리더이다. 그는 자신을 서번트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찾아갔던 청소년기 시절

 

버락 오바마(이하 배리)는 고교 시절 인종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는 흑인, 어머니는 백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특별하게 인종 이슈에 대해 고민했다.

 

배리의 친구는 대부분 백인이었다. 그의 백인 친구였던 바비 팃콤(Bobby Titcomb)은 데이비드 멘델과의 인터뷰에서 “배리는 평범한 하와이 사람이었다. 하와이에 베스트 프렌드 5명이 있으면 그중 한 명은 중국인, 한 명인 일본인, 한 명은 하와이 원주민 등이었다. 다인종이 섞여서 사는 게 평범한 삶이고 여기에 흑인 친구까지 있으면 쿨한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팃콤의 증언과는 달리 배리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흑인 친구 키스 가쿠가와(Keith Kakugawa)와 인종 문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자주 나눴다. 일본인 아버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가쿠가와에 따르면 배리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고 부모에게 버림받은 느낌이 있었다고 한다. 배리는 부모가 없는 청소년기에 대한 느낌, 인종 이슈, 정체성을 두고 고민을 많이 하는 10대 시절을 보냈다. 배리는 고교 시절 백인 친구들에게는 웃음이 가득한 평범한 친구처럼 대했고 흑인 친구들에게는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눴던 것은 분명하다.

 

여담이지만 가쿠가와는 오바마의 대선 때 걸림돌이 될 뻔했다. 그는 코케인 소지 및 복용 혐의로 감옥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바마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오바마 반대파는 오바마가 무숙자가 된 옛 친구 ‘레이(오바마가 지어준 애칭)’를 돕지도 않는 무정한 사람이라는 투로 그를 비난했다. 이에 오바마는 대선 캠페인 도중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알았던 사람들 모두가 신문의 1면을 장식하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돈을 요구했는지에 대한 ABC뉴스 기자의 질문에 가쿠가와는 “나는 무숙자다. 오바마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돈을 달라고 부탁한다.”고 말했다. 대선 당시 가쿠가와는 핫이슈를 제공한 인물이었다.

 

백인 친구인 팃콤도 배리가 특이한 점이 있긴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보통 어린아이들은 남을 놀리는 것을 쿨하다고 생각하는데 배리는 달랐다. 다른 사람이 놀림을 당하는 장면을 보면 배리는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그것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한편, 버락 오바마는 2008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하와이에서 휴가를 보낼 때 팃콤과 7시간 동안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배리는 청소년기부터 자신이 흑인임을 깨닫고 흑인으로서 살게 됐다. 정체성 혼란 가운데 자신이 흑인이라고 결정했다. 자신이 흑인이라고 생각했을 때 정작 흑인 친구들은 그를 ‘완전한 흑인이 아니다.’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배리는 테니스팀에 소속했는데 테니스 코치가 흑인에 대해 인종적인 농담을 하자 곧바로 팀을 떠났다. 그는 또한 학교 공부를 하기보다는 흑인 작가들의 글을 읽는데 방과 후 시간을 보내곤 했다. 배리는 랭스턴 휴즈, 랄프 엘리슨, 제임스 볼드윈, 리처드 라이트, W.E.B. 드브와 등 흑인 작가들의 글을 읽었고 말콤 X 자서전을 탐독했다.

 

배리는 다른 흑인 친구들처럼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였다. 혼란의 시간에 그에게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그래서 TV나 영화에 출연하는 흑인들을 흉내 내곤 했다.

 

다른 흑인들처럼 스포츠에 몰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농구, 해변에서 시간 보내기, 파티에 참여하기가 그의 일상생활이 됐다. 파티에서 한 일화가 있다. 배리는 두 명의 백인 친구를 흑인이 주최하는 파티에 데려갔는데 서로 불편하게 생각하자 분노했다.

 

그가 농구에 열심이었던 이유는 농구 스타들은 대부분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줄리어스 어빙(당시 필라델피아 76ers)을 좋아했다. 그가 농구를 좋아했던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농구를 하는 순간만은 인종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농구를 할 때 인종과 가족의 수입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농구 코트에서만큼은 그가 어떤 집단에 속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농구를 잘해서 그의 친구들은 그를 ‘배리 오바머'(O’Bomber)로 불렀다. 강력한 핵폭탄 슛을 던진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농구를 열심히 했지만 고교농구팀에서 주전 선수로 뛰지는 못했다. 어느 시점에서 3-4경기 내내 벤치만을 지키게 되자 그는 어느 날 코치에게 강력히 항의하기도 했다. 이 언쟁에서 인종적인 폭언도 들었다고 한다. 오바마는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도 씁쓸해한다.

 

어머니가 인류학 연구를 위해 다시 인도네시아로 갔을 때 배리는 조부모와 함께 살게 됐다. 어머니 앤 던햄은 배리에게 자주 편지를 썼는데 여기에는 ‘학점을 올려서 대학 갈 생각을 하라’는 권유가 있었다. 배리의 성적은 그러나 고교 졸업반이 되었을 때 더욱 떨어졌다. 배리가 졸업반이었던 12학년 때 어머니 앤 던햄은 다시 하와이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배리의 떨어진 성적에 굉장히 놀랐다.

 

앤 던햄은 아들에게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조금은 늘어지는 듯한 배리의 삶은 다시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배리는 호놀룰루에서 대학을 다니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미국 본토에서 공부하기를 원했다. 배리는 2-3개의 본토 대학에 지원했는데 LA 인근 옥시덴탈 칼리지에서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배리는 옥시덴탈 칼리지로 가기로 했다. 1979년 배리는 정체성 혼란이 계속됐던 고교 시절을 졸업과 함께 접고 본토로 향했다.


English: President Barack Obama takes a shot during a game with Cabinet secretaries and members of Congress on the White House basketball court, Oct. 8, 2009.8 October 2009. Source: The Official White House Photostream

 


이웃을 관찰하고 자신을 더욱 깊이 발견한 시기

 

LA 인근 대학인 옥시덴탈 칼리지에 입학한 버락 오바마는 입학 초기부터 인종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특히 흑인 문화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그의 어머니는 흑인문화에 대해 아들에게 가르칠 게 거의 없었다. 그저 격려만 할 수 있었다. 오바마는 주로 옥시덴탈 칼리지의 흑인 단체 학생들과 교제를 했다.

 

교제 가운데 그는 흑인도 다양한 생각과 문화를 가졌음을 인식했다. TV에서 보는 획일화된 거친 흑인만 있는 게 아님을 그는 알게 됐다. 흑인도 백인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생각과 다양한 행동을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오바마는 당시 캠퍼스에서 진행 중이던 남아공의 차별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남아공은 흑백 차별정책으로 전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는 상황이었다. 차별정책으로 백인은 각종 특혜를 받았지만 흑인은 반대였다. 그가 이 운동에 참여하면서 발견한 게 하나 있었다. 그가 목소리를 높일 때 사람들이 그의 말을 경청했던 점이다.

 

고교 시절 농구와 파티에만 빠져 있던 오바마는 옥시덴탈 칼리지에서 드디어 자신이 해야 할 다른 일을 발견했다. 그는 토론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는 학우 및 교수들과 토론하기를 즐겼다. 해변이 아닌 커피하우스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단순히 토론만 즐긴 게 아니었다. 오바마가 다녔던 학교는 토론을 잘하는 남학생이 여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오바마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솔직히 그런 점도 있었다. 여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커피숍에서 가장 똑똑한 남자가 되어야 했다.”라고 고백했다.

 

한 커피숍에서 토론하던 중에 여학생이 오바마에게 그의 이름을 물어봤다. 오바마는 ‘버락’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버락’의 뜻은 아랍어로 ‘신의 축복을 받은’이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 여학생은 오바마에게 “앞으로 버락으로 불러도 되겠냐”고 물었고 오바마는 미소만 지었다. 오바마는 ‘배리’ 대신 원래의 이름인 ‘버락’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오바마는 옥시덴탈 칼리지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조모인 매들린 던햄은 버락이 이 대학에서 1979년부터 1981년까지 2년 동안 지내면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산 것 같다고 말했다.

 

옥시덴탈 칼리지의 로저 보시라는 교수는 오바마에게 잠재력을 극대화할 것을 종용했다고 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버락은 놀라운 재능을 가진 젊은이였다. 그가 재능을 발휘하도록 나는 그에게 쓴소리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오바마는 이 학교에서 자아를 중심으로 한 사고 방법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보시 교수는 오바마의 두뇌를 자극했다. 오바마는 옥시덴탈 칼리지에 다녔던 당시를 회상하며 “내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 외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 공헌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보시 교수의 거센 교육 방법이 오바마에게는 자극이 됐다. 그는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1981년 봄 오바마는 옥시덴탈 칼리지의 규모가 작고 자신이 얻을 것은 다 얻었다고 판단해 컬럼비아대학교로 전학하기도 했다. 컬럼비아대는 뉴욕에 있는 유명 대학이었다. 오바마는 큰 도시에서 더 얻을 게 있다고 생각했다.

 

1981년 가을 학기에 컬럼비아대학에 등록한 오바마는 또 다른 신세계를 경험했다. 뉴욕은 LA와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도시였다. 차량 경적이 끊이지 않고, 길거리는 사람으로 가득했으며, 지하철이 발달해 있고, 24시간 움직이는 도시였다. 컬럼비아대학에 다니면서 오바마는 하루 3마일을 걸어 다녔고 일요일에는 금식했다. 그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배운 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기를 썼고 때로는 시를 작성하기도 했다. 또한 독서량은 엄청났다. 오바마는 니체, 에르만 멜빌, 토리 모리슨이 쓴 책을 탐독했고 성경도 열심히 읽었다. 독서에 빠진 그를 두고 모친인 앤 던햄과 동생인 마야는 ‘수도승처럼 산다’고 놀려대기도 했다.

 

이 대학에 입학한 2년 후 졸업을 하게 된 오바마는 정치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이 2년은 오바마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이곳에서 소위 ‘오바마 사상’을 만들었다. 그는 외로웠기에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을 많이 했다. 마치 사상가처럼 살았다.

 

그가 학위를 받았을 즈음에 케냐에서 비보가 들렸다. 아버지 버락 오바마 시니어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리더는 ‘나에 대해 깊이 알고, 이웃을 깊이 관찰해서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내어 타인을 위한 삶을 사는 자’이다. 더 나아가 리더는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사고를 하고 협력을 잘하고 좋은 인성을 가진 자로서 놓인 문제를 해결하며 세상을 이롭게 하는 자’이다.

 

이 리더십 정의에 의하면 오바마는 대학 시절 ‘타인을 위한 삶을 살기’를 결심했다. 오바마는 비로소 창의적이고 융합적이고 협력을 잘하는 자가 되는 준비를 마쳤다. 그는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서번트 리더로서 꽤 많은 것을 갖춰가고 있었다.

 


인성, 정체성, 이웃 관찰, 타인을 위한 삶 그리고…

 

컬럼비아대학교에서 2년은 정치인 버락 오바마에게 가장 중요한 2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그는 엄청난 분량의 독서를 했다. 오바마는 데이비드 멘델과의 인터뷰에서 “2년 동안 나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외로웠다. 그때 생각하는 남자가 자주 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2년 동안 소위 ‘오바마 사상’의 기초를 세운 그는 1983년 정치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졸업 후에도 맨해튼에서 계속 살았다. 그러면서 오바마는 외국에서 사업을 하는 기업을 위해 컨설트를 해주고 뉴스레터를 제작하는 회사에 취업하게 됐다.

 

그는 이 회사에서 1년 동안 리서치, 기사 쓰기, 기사 편집 등의 일을 했다. 그는 그곳에서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양복을 입고 일하는 게 좋긴 했지만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자신의 꿈과는 맞지 않는 직업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1년 만에 그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간신히 월세를 낼 수 있을 정도만 월급을 받고 할렘과 브루클린에서 일을 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러던 중 제리 켈만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바마에게는 중요한 연락이었다. 켈만은 시카고 저소득층 지역에서 그들을 도울 사람을 찾고 있었다. 백인 유대인인 켈만은 시카고에 개발 지역 프로젝트(DCP)라는 단체를 시작했다. 오바마가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은 주민들과 힘을 합해 더 좋은 지역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운동가의 역할이었다.

 

켈만이 맨해튼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한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눴다. 켈만은 오바마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켈만은 대학 교육을 받고 비교적 낮은 임금에도 일할 흑인을 찾고 있었는데 오바마는 적격자였다. 켈만은 오바마가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있음을 발견하고 더욱 그를 고용하고 싶었다.

 

오바마는 일 자체도 마음에 들었지만 시카고라는 생소한 도시에서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게 좋게 느껴졌다. 결과적이지만 이곳에서의 경험은 오바마가 정치인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5년 6월 시카고에 도착한 오바마는 23세의 청년이었다. 그는 시카고에서 일하면서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지를 배웠다. 시카고의 사우스 사이드(South Side)는 미국에서 흑인이 집중된 가장 큰 지역이었다. 오바마는 그곳 주민들을 위해 일할 기회를 얻었다. 오바마는 한 번 맡겨진 일에 빠지면 깔끔하게 일을 해냈다. 물론 자주 실패를 경험했다. 켈만은 끊임없이 오바마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눴다. 그는 오바마에 대해 “남을 돕겠다는 사명에 불탄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켈만은 이어 “오바마는 야망도 있었지만 항상 봉사 정신이 그것과 섞여 있었다.”고 덧붙였다. 켈만은 오바마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처럼 큰일을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우스 사이드에서 일하면서 오바마는 이곳 주민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까지 오바마는 종교적인 믿음은 없었다. 오바마는 이곳 주민들이 교회와 목사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오바마는 따라서 교회 예배에 참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교회와 목사가 존경받는지 알고 싶었다. 제러마이아 A. 라이트 목사는 그가 출석한 교회의 목사였다. 교회명은 트리니티 연합 교회였다. 라이트 목사는 오바마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라이트 목사는 이후 오바마의 멘토이자 선생이 됐다. 라이트는 오바마에게 흑인의 인생에서 기독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줬다. 라이트 목사는 또한 오바마가 종교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자에서 기독교 실천가가 될 수 있도록 도왔다.

 

오바마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미 상원의원에 출마했을 때 성경을 항상 갖고 다녔다. 그는 성경이 이웃을 돕고 이타적인 내용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알고 이것이 자신의 신념과 맞는다고 생각했다. 오바마는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는 주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열심히 듣기 시작했다. 그는 하루에 20-30명씩 만나 그들의 고충을 들었다. 이곳 주민들은 자신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며 정부도 빈곤층 흑인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오바마는 알게 됐다.

 

그는 또한 빈곤층의 주택문제, 환경문제, 건강 문제 등을 보게 되었고 이를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그가 시카고에서 커뮤니티 개발 사업에 참여하면서 배운 것은 이상은 현실과 함께 가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바마는 1987년 최초의 흑인 시카고 시장이 된 해롤드 워싱턴이 이곳 흑인들의 희망적인 존재임을 알게 됐다.

 

한편, 케냐의 아버지 버락 오바마 시니어가 사망한 후에도 버락 오바마 주니어는 배다른 동생인 아우마와 계속 연락을 하고 지냈다. 아우마는 독일 유학생이었다. 아우마는 버락을 만나고자 시카고를 방문했다. 아우마는 버락과의 만남에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아버지는 케냐에서 꽤 명망 높은 경제학자였는데 당시 케냐의 대통령이었던 조모 케냐타에 직언했다가 쫓겨났다고 했다. 이후 그에게 직장을 주지 말라는 대통령의 명령으로 인해 아버지 오바마는 무숙자가 됐다. 이후 다시 직장을 얻게 됐지만 아버지 오바마는 이미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있었고 음주운전 사고로 사망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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