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by Shutterstock. 기본소득은 영어로 Univeral Basic Income이다. 줄여서 UBI로 부른다.
#장면1. 결혼 8년차에 아이 둘을 둔 30대 전업주부 박지은(38)씨의 아침 일과는 7시쯤 눈을 뜬 후 스마트폰을 열고 사물인터넷(IoT)으로 연결된 전기레인지를 켜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날 밤에 ‘드론(무선전파로 조정할 수 있는 무인 비행기)’으로 배달 온 신선한 소고깃국과 달걀말이 등을 올려놓고 잠든 덕에 굳이 침대 밖을 나와 부산을 떨어가며 가족들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밥솥에는 예약을 걸어둔 밥이 김을 모락모락 내뿜으며 식욕을 자극한다. 인공지능(AI) 기반의 요리를 돕는 셰프 로봇은 가족들의 입맛을 책임진다. 이제 그가 할 일은 간단하게 밥상을 차리는 것뿐이다. 이 시간 가사도우미 로봇은 스스로 깨어나 집안청소를 시작한다. 6살 아들과 4살 딸을 잔잔한 클래식 음악으로 깨우고 등원준비를 돕는 것도 로봇의 몫이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아이들과 놀아주고 공부까지 시켜주는 로봇은 주부 박씨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최고의 ‘척척박사’ 도우미다.
박씨에게 주어진 집안일이라고는 식사 후 식기들을 세척기에 넣는 일,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가 되면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돌린 뒤 건조기로 옮겨 말리는 정도다. 이마저도 계속 더 업그레이드돼 시장에 속속 등장하는 각종 로봇 덕택에 곧 하지 않아도 될 세상이 온다고 한다. 남는 시간 박씨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좋아하는 커피를 내려 마시고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기도 하며 평소 배우고 싶던 미술과 수영 강습을 받는다.
가끔 아파트에 들러 이런 생활을 지켜보는 친정어머니는 드라마틱하게 변한 세상이 그저 놀랍고 감사하다. 딸이 나처럼 고생하지 않아 좋다고 하면서도 종종 “나 때는 말이야.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집안이 안 돌아갔다. 일찍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집 청소하고 빨래를 널고 개고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때부터는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며 이른바 ‘라떼’론을 펼치는데 박씨에게는 별로 와 닿지 않는 말이다. 그는 그저 지금의 삶이 흡족할 따름이다.
#장면2. 40대 가장 조성만(47)씨는 몇 달 전까지 로펌에서 근무하던 어엿한 변호사였다. 그러나 갈수록 어려워지는 업계 여건 탓에 회사가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결국 정든 직장을 나와야 했다. ‘e디스커버리’라는 AI 프로그램이 업계에 본격 도입되면서 지난 반세기 고소득 전문직의 대명사이자 가장 선망 받는 직업 중 하나였던 변호사들의 입지가 좁아졌다. e디스커버리는 4차 산업이 낳은 대표적인 서비스다. 사람 변호사를 쓰는 비용의 약 20%만으로 수백만 건의 법률 문서를 단시간에 분석해 최적의 판례를 제공한다.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는 게 비전이 없다고 판단한 조씨는 경력을 살려 법과 연관된 새로운 분야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에 도전하기로 했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사업자금이 필요한 건 물론이고 곧 대학생이 되는 아이들 뒷바라지에 무리해서 장만한 아파트 대출금은 당장 이자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압박감을 가져다준다.
손가락만 빨고 앉아있을 수 없던 조씨는 급한 대로 자신이 잘하는 운전 실력을 살려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기로 하고 가장 먼저 대리운전과 배달 일을 알아봤지만 여의치 않다. 불과 얼마 전까지 호황이던 배달업계가 금세 된서리를 맞았다. 드론이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물건을 나르는 시대가 성큼 다가왔기 때문이다. 대리나 택시 운전도 못할 일이 됐다. 눈 깜짝할 사이에 5단계(완전자율주행ㆍ운전자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은 완전자율운행 체제)까지 도달한 자율주행이 졸지에 일자리를 앗아갔다. 2020년 추산 전국 37만여 명 배달기사ㆍ20만여 명 대리운전기사ㆍ9만여 명 택시기사ㆍ5만여 명 택배기사들 상당수가 실업자로 내몰렸다. 전문직과 밑바닥 생계직종을 가리지 않는 4차 산업의 영향력 앞에 조씨는 무기력하기만 하다.
#장면3. 20대 취업준비생 김남선(27)씨는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 초ㆍ중ㆍ고를 거치면서 학업 성적은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했다. 지방 출신으로 자취를 하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대학공부에도 매진했다. 부모님들이 어렵게 벌어 자신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군대를 다녀온 뒤로는 그의 머릿속에 ‘취업’이라는 단 한 가지 목표만 자리 잡았다.
이제껏 별다른 좌절 없이 열심히 달려온 인생이지만 취업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남부럽지 않게 좋은 직장을 얻어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고 싶지만 대학 졸업 후 취업 재수생으로 전락한 현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이리저리 원서를 넣어보지만 실력과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어서 낙담이 크다.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비대면이 강화되고 그 여파로 경제가 크게 위축되면서 취업문을 뚫기가 더욱 팍팍해진 탓이다. 코로나 사태를 겪고 난 뒤 앞으로 사회가 또 어떤 일로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은 가뜩이나 답답한 가슴을 억누른다.
언제까지 고향에 있는 부모님에게 손만 벌리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용돈이라도 벌어보고자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알아봤지만 하늘의 별따기다. 대부분의 편의점이 직원을 ‘키오스크(무인 안내기)’로 대체한 지 오래다. 불확실한 미래에 사람들이 주머니를 닫고 온라인 비대면 화상 강의ㆍ로봇 강의가 활성화하면서 과외 거리마저 녹록하지 않다. 이럴 때 정부와 각 지방자치단체(지자체)에서 나오는 청년수당이나 미취업청년지원금은 김씨에게 가뭄의 단비와 같이 큰 보탬이 되고 있다. 다만 지속가능한 것은 아니라서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김씨는 괴로운 마음에 늦은 밤이면 방에서 ‘혼술(혼자서 마시는 술)’을 하는 날이 잦아지고 있다. 과자 부스러기를 놓고 홀로 술잔을 기울이면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소득원이 생기면 바랄 나위없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어본다. 한편으로는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는지, 이런 현실이 자신의 잘못 때문인지 사회구조의 잘못인지 명확히 답을 내리지 못한 채 또 하루 술기운에 기대 스르르 잠이 든다.
4차 산업혁명 시대 그리고 인간의 삶
장면 1~3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가상의 현실이지만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경험하게 될 현상이기도 하다. AIㆍ로봇 등으로 요약되는 4차 산업의 파고가 일상을 뒤바꾸고 그 여파로 직업 및 직종의 ‘패러다임(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틀이나 개념의 집합체)’ 전환이 불가피해졌다.
전통적 인기ㆍ생계 직업의 상당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공산이 크다. 새롭게 생겨나는 직업도 많을 테지만 균형을 맞추기에는 부족하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세계경제포럼(WEF)은 2020년 말 보고서에서 "AI와 로보틱스의 급속한 발전에 힘입은 새로운 세대의 스마트 기계들이 기존 인간 직업의 상당 부분을 대체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결론지었다. 현재 모든 작업의 약 30%는 기계에 의해 수행되고 나머지는 사람들이 한다. 하지만 2025년쯤 그 균형이 인간과 기계의 ‘50-50’ 결합이라는 극적인 변화를 맞는다. WEF는 "과거와 같이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겠지만 특히 스마트 머신의 비용이 감소하고 그 능력이 증가함에 따라 일자리가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짚었다.
심지어 미래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제레미 리프킨(2005)은 인간노동이 기계로 대체됨으로써 1995년 이미 ‘노동의 종언’을 선포했을 정도다. 직업은 먹고 사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삶 자체를 송두리째 흔들 만큼 파괴력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이 가져다줄 다양한 기술들은 사람들을 더욱 편리하고 여유롭게 해주겠지만 예기치 못한 여러 가지 부작용도 동시에 낳게 될 전망이다. 핵심은 AI와 로봇 등이 앗아갈 일자리 문제다. 수입이 없는 실업자가 증가할수록 사회는 불안해진다. 국가에는 보다 튼튼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할 임무가 주어진다.
세상은 변하고 언제나 그렇듯 사람은 바뀐 환경에 적응해간다. 과연 30대 주부 박지은씨처럼 4차 산업이 가져다줄 생활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면서 40대 실직자 조성만씨와 20대 취업준비생 김남선씨를 두루 만족시킬 뭔가 ‘신박(새롭고 놀라운)’한 해법은 없을까.
모든 걸 한 그릇에 담아 해결할 가장 이상적인 제도 중 하나로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것이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국민이라면 누구나 생계의 위협을 받지 않는 최소한의 소득을 정부로부터 지원 받는 이상향적 개념이다. ‘보편적 기본소득(UBIㆍUniversal basic income)’이라고 널리 알려진 기본소득은 시험이나 요건 없이 모든 시민에게 정기적으로 현금이 지급되는 이론적 정부 공공 프로그램이라고 정의된다.
나라에서 매월 안정적인 생활비를 주는 기본소득이 현실화한다면 세상은 획기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20대 취업준비생은 조바심을 치지 않고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꿈을 펼칠 기회를 모색하게 된다. 30대 주부는 기술의 발전을 한껏 향유하고 40대 가장은 먹고 살 걱정 없이 ‘인생 2모작’을 준비한다. 50~60대는 여유 있는 노년을 맞이하며 70대 이상에게는 안락한 노후를 보장해주는 세상이다.
‘21세기 기본소득’이란 책을 쓴 벨기에 정치 철학자 필리프 판 파레이스(1995)는 기본소득을 ‘모두를 위한 진정한 자유(Real freedom for all)’라고 표현했는데 기본소득이 있으면 실제로 개개인이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자유가 가능해진다고 그는 설명한다. 많은 사람이 기본소득 때문에 게을러질 것이라는 우려와는 달리 판 파레이스는 모든 구성원이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진정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기본소득이라고 주장한다.(Van Parijs, 2006; 2016)
기본소득은 경제 이슈이기도 하지만 ‘자유’에 관한 이슈라고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이 불러올 자유를 놓고 일각에서는 그것이 장차 우리 모두를 기업가(entrepreneur)로 바꿀 것이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우리를 게으름뱅이로 전락시킬 뿐이라고 우려한다. 자유는 인간을 더욱 가치있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방종한 인간으로 만들 것인가.
기본소득이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작용할지 확실히 검증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한때 ‘이상향’ 심지어 ‘망상’이라고까지 지적받던 것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요구로 떠오르고 있는 점만은 틀림없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대한민국 국민은 조건 없는 보편적 사회안전망을 경험했다. 이제 많은 사람이 일시적 긴급재난지원뿐만 아니라 불안한 미래 생활까지 보호받는 국가의 사회안전망을 기대하게 됐다. 이런 것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기본소득에 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구글 트렌드, 2020) 하지만 여전히 ‘공산주의’라든지 ‘인간이 게을러진다’든지 하는 프레임으로 기본소득 이야기를 토론조차 할 수 없게 하는 이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위 글은 '이재명과 앤드류 양은 왜 기본소득을 말하는가'의 출판사인 거꾸로미디어에서 허락을 받고 발췌한 것입니다. 글은 정재호 작가가 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