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널리스트 투데이는 한국의 스포츠영웅 100인을 소개하는 K-Sports 100: Korea's Best라는 제목의 코너를 진행 중이다. 그 아홉 번째 주인공은 고우순(골프)이다.
고우순 선수 집에 걸려 있는 LPGA 우승 사진. 사진 제공 - 김지혜
“쇠 파이프” 들고 다니다 세계적인 골퍼가 된 고우순.
올드 타이머들에게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적 골프 선수를 꼽으라면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구옥희(2013년 작고)일 것이다. 그는 박세리가 등장하기 전 한국 여자프로골프의 ‘대모’이자 ‘선구자’였던 선수로 여겨진다. 그런데 박세리 등장 전에 국제적 골프 선수가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구옥희와 박세리를 잇는 선수 고우순(1964년생)이다. 그는 박세리가 혜성처럼 등장하기 전인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및 일본 여자 골프계를 이끌었던 선수다.
고우순 프로는 1985년 KLPGA에 정회원으로 등록된 이후 국내외에서 총 17차례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특히 그는 해외 진출을 통해 구옥희 선수와 함께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64년 4월 21일생인 고우순은 1985년 프로 데뷔를 한 뒤 미국 LPGA 투어 2회 우승, 일본 LPGA 투어 9회 우승, 한국 LPGA 투어 3회 우승의 기록을 갖고 있다.
1994년 11월 6일은 고우순 자신뿐만 아니라 한국 골프 역사에서 중요한 날이었다. 일본에서 열린 미국 LPGA 대회인 도레이 저팬 퀸스 컵 골프대회에서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누르고 챔피언에 올랐던 것. 이는 구옥희 선수가 1988년 챔피언에 오른 이후 두 번째 미국 LPGA 우승 기록이었다.
그때 그시절 경향신문의 기사를 잠시 읽어보자.
그는 합계 7언더파 206타를 기록해 LPGA 상금 랭킹 1위였던 벳시 킹과 동타를 이뤘고 연장 홀에서 킹을 누르고 챔피언이 됐다. 세계 최고의 선수를 누르고 챔피언이 됐던 것. 상금도 당시로는 엄청난 10만5천달러나 받았다. 킹은 LPGA 29승의 강자였고 그 대회에서 1승만 추가하면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30승을 눈앞에 둔 상황이었다. 킹은 그 대회에서는 고우순에 패해 30승에 실패했지만 이후 5개의 챔피언 트로피를 보태 총 34승으로 결국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뉴저널리스트 투데이는 고우순 프로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찬란했던 과거에 대해 물었다.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그때 상황이 기억이 나시나요? 세계 랭킹 1위 벳시 킹과 대결하면서 긴장되시지 않았는지요?
[고우순 프로] 그때가 일본에서 시합 나온 첫해고요. 한국에서는 미국 선수들을 신문이나 TV에서 볼 기회가 없어서 누구인지 잘 몰랐어요. 미국 LPGA 대회를 일본에서 1년에 한 번씩 개최했는데, 일본에서 뛰는 상위권 선수는 미국 LPGA 대회에 나갈 자격이 되었고 제가 그래서 나갔죠. 벳시 킹이 미국 상금 랭킹 1위였고 동 대회 전년도 디펜딩 챔피언이었지요. 그래서 다들 벳시 킹이 2연패를 할 거로 보았어요. 저는 첫 미국 대회를 나갔기 때문에 별로 정신적 압박도 안 받았어요. 4라운드까지 동타라 벳시 킹하고 플레이오프를 했는데 연장 홀에서 일반적으로는 제가 떨려야 하는데, ‘상대는 세계 랭킹 1위니까 내가 져도 2등이고 이기면 1등이다’라고 생각하면서 편안하게 경기했어요. 제가 편안하게 하니 오히려 벳시 킹이 압박을 받는 것 같았어요. 연장 첫 홀에서 벳시 킹은 보기를 기록해 제가 우승했지요.
벳시 킹. 사진 출처 - LPGA 홈페이지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세계 랭킹 1위를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 기분이 어떠셨어요?
[고우순 프로] 제가 그때 일본에서 4주 만에 신기록으로 일본 대회 우승을 했거든요. 미국대회도 첫 출전이었는데 큰 무대에서 그런 대회를 우승했기 때문에 정말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죠. 당시 골프 경기를 TV 중계하지 않았는데 제가 우승한 다음 날 모 방송에서 녹화 중계를 했다고 하더라구요. 구옥희 프로님이 1988년 LPGA 첫 우승을 했을 때는 TV 중계가 없었는데 제 우승 경기가 첫 LPGA 중계 방송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KLPGA의 김승희 회장님께서 축전도 해 주시고 반응이 좋았습니다.
1994년 고우순은 올해의 선수로 뽑혔다. 1994년 조선일보 기사를 돌아보자.
고우순은 이듬해인 1995년 11월 5일, 역시 일본에서 열렸던 같은 대회에서 2연패를 차지했다. 그는 합계 9언더파 207타로 챔피언에 올라, 미국 LPGA 대회 2회 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1995년대회에도 아니카 소렌스탐, 레셀로테 노이만, 헬렌 알프레드슨, 베스 다니엘, 멕 맬론, 로지 존스 등 세계적인 선수가 대거 출전했다. 우승 상금은 10만5천달러였다.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이듬해 또 우승하셨어요.
[고우순 프로] 당시 일본 선수나 한국 선수가 실력이 많이 향상됐는데 일본 선수들은 미국 대회를 우승할 마음, 뭐라 그럴까 자신감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미국 LPGA 첫 우승을 하니까 일본 프로들이 ‘너는 참 운이 좋다’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물론 운도 좋았지만, 제가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내년에도 우승할 것이다.’ 제가 약속한 대로 미국의 주요 선수들을 다 제치고 우승을 또 했죠. 그때야 비로소 일본 선수들이 ‘고우순 우승은 운이 아니었다’라고 말해줬어요.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두 번째 우승하니 어떠셨어요? 미국 선수들과 플레이하면 주눅 들지 않으셨어요?
[고우순 프로] 저는 이상하게 일본에서 대회를 할 때 미국 선수들이 오면 굉장히 힘이 났어요. 미국 대회이긴 하지만 일본에서 시합하는데 우승을 내어줄 수는 없잖아요. 저는 월드 클래스 선수들과 함께 플레이할 때 대부분 성적이 좋았어요. 외국을 나가면 자신감이 생기고 미국 선수들을 만나면 성적이 늘 좋았지요. 미국 가면 성적이 이상하게 좋더라고요. 미국 본토에서 우승한 적은 없는데 나비스코 다이나쇼어 같은 대회에 갔을 때도 박세리 등 한국 선수가 23명인가 나왔고 미셸 위가 14살 때였는데 저는 일본 상금 랭킹 3위 안에 들어 초청받았어요. 그때 한국 선수들이 그렇게 많고 실력도 좋았는데 제가 그 대회 출전 한국 선수 중 성적이 제일 좋았었어요.
고우순 프로의 2연패 관련 AP 뉴스를 아래에 소개한다. 우승자였던 고우순 선수는 인터뷰에서 "마지막 홀에서 나의 버디 펏은 110% 실력이 나온 것이었다. 이 대회가 너무 좋았다"라고 말했다.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고우순 프로님은 성품이 긴장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한다, 그렇게 봐도 될까요?
[고우순 프로] 그렇죠. 즐겁게 골프를 해서 그런 것 같아요. 해외에 나가면 더 즐겁게 하고요. 골프를 취미처럼 해서 그런 것 같아요. 골프는 그리고 저와의 싸움이니까 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되는 것이지요.
고우순은 그렇게 한국 골프계의 자랑스러운 선수가 되었다. 그녀의 골프 사랑은 직업을 넘어섰다. 고우순 선수의 일본프로골프협회(JLPGA) 프로필에는 여전히 취미가 '골프'라고 적혀있다. 이는 그녀가 골프를 단순한 경기가 아닌, 인생 그 자체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다.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프로필에 취미를 골프라고 쓰신 것은 놀라운 일인데, 보통 그렇지 않잖아요, 그 이야기를 좀 해주시겠어요?
[고우순 프로] 취미를 골프라고 쓴 사람은 일본 여자 프로 선수 중에 저밖에 없다고 JLPGA 고바야시 회장이 저에게 말해주더라고요. ‘어떻게 취미를 골프를 하냐?’고 하시던데요. 저는 지금도 여기 가까운 호도가야라고 명문 골프장에서 레슨을 하는데 골프가 좋아서 하기 때문에 피곤하지도 않고 레슨이 끝나고 나면 1시간 더 가르쳐드리곤 해요. 이는 골프가 좋고, 취미이기 때문이지요. 보통 프로들이 1시간씩 추가로 안 가르쳐주잖아요. 저는 레슨을 한 후에 복습을 해야 한다고 강조해요. 그렇게 해야지 골프가 늘지 레슨 끝나자마자 집으로 가면 골프가 늘지 않는다고 말해줘요. 노력한 만큼 결과가 잘 안 나오는 게 골프에요. 학교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칠 때 힘들잖아요. 교사와 학생이 마음이 통해야 잘 전달이 되는 것처럼, 훈련받는 사람의 마음과 제 마음이 통해야만 레슨이 제대로 돼요.
일본여자골프투어 홈페이지에 있는 고우순 선수의 프로필
제가 그런 마음으로 레슨을 하니까 배우는 분들이 클럽 챔피언도 하고 여러 대회에서 우승하곤 했어요. 제가 가르친 사람이 향상되어 좋은 성적을 내어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면, 저도 마음이 뿌듯해지고 ‘내가 가르치는 골프가 잘못되지는 않았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요.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언론 기사를 보니까 일본에서 라운딩을 함께 하고 싶은 3인 중 한 명으로 뽑히신 적도 있으셨다고 들었어요. 레슨하는 프로로서 인기가 많으시겠어요?
[고우순 프로] 한국에서는 나이가 들면 젊은 프로들이 많기 때문에 나이 든 프로는 라운딩 및 레슨 부탁도 없고 그렇잖아요. 일본도 젊은 프로들이 많이 있지만 저에게 레슨 의뢰가 많이 들어와요. 제가 성심성의껏 레슨을 하면 그런 내용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 같아요. 어프로치 퍼트는 고우순 프로한테 가서 배워야 한다는 소문이 났어요. 샷이야 보편적으로 다 기본적이니까, 쇼트게임이 골프에서는 제일 중요한데 그러다 보니 여러 사람의 의뢰가 들어와서 제가 현역 투어 프로보다 라운드를 더 많이 하게 되었어요. 바쁘다 보니 한국에 갈 여유도 없을 정도예요. 그래서 스케줄이 지금부터 내년 7월까지 잡혀 있어요. 보통 6개월 전부터 약속을 잡으려고 해요.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이렇게 일정이 꽉 차 있는데도 즐거우세요?
[고우순 프로] 저에게는 골프장 가는 게 오히려 쉬는 거예요. 저는 집안일을 잘하지 못하겠어요. 며칠 집에서 쉬는 것보다 골프장에 가야 몸이 더 가벼워져요.
고우순 프로는 어린 시절부터 골프에 대한 꿈을 키웠다. 경주에서 농사를 짓던 가정에서 자라난 그녀는 일본 진출의 꿈을 품고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골프 인생은 미군이 골프 하는 모습을 본 후 미군 파일럿으로부터 골프공을 받은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그는 골프에 대한 열정과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어렸을 때 미군 파일럿으로부터 골프공을 받는 순간 골퍼의 꿈이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그때 상황이 기억나시면 말씀해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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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순 프로] 작은아버지가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셨거든요. 저하고 나이가 동갑인 사촌이 있는데 겨울방학 때는 사촌이 경주로 할머니한테 오고, 우리가 큰 집이니까 여름이 되면 제가 서울을 가곤 했어요. 방학 때 삼촌 댁에 머물며 삼촌 점심 도시락을 사촌과 함께 미군 부대에 갖고 가곤 했어요. 자전거를 타고.
미군 부대 안에서 삼촌이 도시락 드실 동안 골프장이 너무 잔디가 멋지고 그린에서 미국 파일럿들이 골프를 치는 게 멋지게 보였어요. 자기들끼리 영어로 말하면서 골프를 하니까 멋져 보였고 ‘이렇게 좋은 데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때 경주에는 골프장이 하나도 없었었거든요. 골프 자체를 아는 사람도 아마 지방에서는 거의 없었을 때예요.
사촌이 ‘저게 골프’라고 말해줬고 저는 ‘오늘부터 골프를 좀 배워야 되겠다’라고 말했어요. 사촌은 여자들이 하는 게 아니고 남자들이 하는 스포츠라고 말해줬지만 저는 골프의 매력에 빠졌죠. 사촌이 ‘야 넌 열심히 공부나 해, 무슨 골프를 여자가 하냐?’ 그랬어요. 그런데 저는 골프가 너무 매력적인 스포츠 같다고 생각했고 미래에 좋은 여흥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미군이 골프 치는 걸 앉아서 봤어요. 보면서 골프를 배우게 되었지요. 그렇게 보고 있는데 골프가 끝나고 미군이 저에게 와서 골프공 세 개를 줬는데 그걸 받아서 집에 오니 삼촌 집에 골프채가 많이 있더라고요. 미군들이 몇 년 있다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준 골프채였어요. 삼촌은 그 골프채로 골프를 치는 게 아니라 고철 모으러 오는 사람 오면 골프채를 현금과 바꿨던 거지요. 고철로 팔 것이니 제가 숙모께 ‘숙모, 나 이거 3개만 가져가야 되겠다’고 해서 3개를 받았지요.
골프채의 길이가 어떤 건 짧고 어떤 건 길고, 번호도 있고 그랬는데, 속으로 ‘무슨 의미가 있나 보다’ 하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언 3개였지요. 이 골프채를 신문으로 싸서 경주로 돌아갔어요. 집 마당에서 골프 스윙을 혼자 하면서 연습했는데 엄마가 ‘여자가 그런 걸 휘두르면 시집도 못 간다’고 하고 마당에서 연습하다가 그릇 다 깨고 하니까 연습장이 필요했죠.
그러다가 경주에 작은 연습장이 하나 생겼어요. 저는 한 4년 정도 집에서 연습하다가 연습장이 생겨서 반가운 마음으로 아이언 3개를 들고 연습장을 찾았어요. 갔더니 아르바이트하러 왔냐고 묻더군요. 저는 골프를 치러 왔다고 했고 그분이 ‘경주에 이렇게 어린 골프 치는 사람 있냐?’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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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널리스트 투데이]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계속 이야기해주세요.
[고우순 프로] 연습장에 프로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어요. 옛날에는 프로 라이센스가 있고 그런 것은 아니고 조금 잘 치면 프로라고 불렸죠. 그분은 한 80개쯤 치는 프로였던 것 같아요. 그때 막 개장이라 손님도 하나도 없고 그랬어요. 제가 갔더니 제 아이언 3개를 보고 그 프로라는 분이 놀라서 왜 풀세트가 없냐고 물었고 제가 ‘세트 같은 게 있냐?’고 되물었죠.
그분의 풀세트 이야기를 듣고는 제가 직접 드라이버를 만들려고 했는데 만들어서 쳐보니 잘 안 쳐지더라고요. 그래서 연습장에 오신 손님들 채로 한 번씩 쳐보고 그랬어요. 어느 날 그 프로라는 분이 전해주기를 ‘구옥희 프로 등 여자 프로 3명이 탄생했는데 시합이 없어서 내년에 일본 투어를 신청했다’고 그러더라고요. 귀가 번쩍 열렸죠. 저희 부모님이 원래 일본 나가사키에 사셨거든요. 원폭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오셨죠. 엄마는 제가 5살 때부터 일본으로 가라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일본이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부산에서 바다를 건너가면 있다고 그러셨어요. 저는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것도 모르고 수영해서 가야 하는 줄 알고 정말 열심히 수영을 했어요. 그때 잘 모르고 수영을 한 게 나중에 운동할 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연습장의 프로라는 그분께 ‘어떻게 하면 프로가 되는지’ 물었어요. 프로 테스트가 있다고 답하셨죠. 저는 그때부터 새벽 5시에 연습장에 가서 하루 2천 개 가까이 공을 쳤어요. 그렇게 연습을 하니까, 사람들이 추천해주고 해서 경주 신라 컨트리 골프장에서 혼자 라운딩하기에 이르렀죠. 새로 개장한 신라 컨트리 골프장에는 좀 더 수준 높은 프로가 계셨는데, 그 프로한테 레슨도 받고 그래서 저는 1985년도에 프로 테스트를 받게 되었죠.
1985년 첫 번째 프로 테스트에서 한 점 차이로 떨어졌어요. 떨어지고 나니까 너무 화가 나서 더 열심히 연습했었지요. 아침 새벽에 라운드하면 볼이 안 보였는데 연습이 끝나도 역시 볼이 안 보이는 밤이 되었죠. 골프를 혼자 치면 고독하지만 이걸 더 재밌게 만들었어요. 저는 공을 2개로 쳤어요. 2개로 치면서 스코어 카드도 두 장을 기록했죠. 한 장은 제 이름, 다른 한 장은 친구 이름을 적었죠. 저 혼자 치면서 저와 시합을 한 거예요. 엄청 재밌더라고요.
18홀을 돌면 저는 36홀을 친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그때는 신라 컨트리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혼자서 라운딩을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일본 관광객들이 많이 왔어요. 함께 라운딩하며 일본어도 배웠는데 나중에는 ‘일본에 언제 오냐? 일본에 빨리 오라’고 응원해주고 그랬어요. 얼마 후 1985년 두 번째 프로 테스트에서 저는 1등을 하고 통과하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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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널리스트 투데이] 지금까지 이야기를 논스톱으로 들었는데, 정리를 해볼까요? 처음에 미군에 가서 골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몇 살 때였죠?
[고우순 프로] 14세였어요.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경주 골프장에서 혼자 골프 치고 이미지 트레이닝 하며 골프 치는 게 몇 살이셨어요?
[고우순 프로] 18세였지요.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학교나 그런 곳에서 배운 것도 아니고 혼자 골프장에 가서 골프를 마스터하신 거네요.
[고우순 프로] 네, 혼자 종일 골프만 한 거지요. 제 친구들이 ‘너 뭐 하냐?’ 그러면 ‘나 바쁘다. 엄마 일 도와주느라’라고 답하곤 했지요. 제 친구들은 제가 무엇을 하는지 몰랐어요. 숨어서 골프 친다고 하면 욕할 것 같아서 그랬지요. 아버지도 처음에는 제가 골프하는 걸 반대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일본어를 잘하시는 아버지가 골프장에 저를 찾으러 왔다가 함께 라운딩했던 일본 분들을 만나서 ‘딸이 골프 하는 걸 반대한다’고 말했더니 일본 사람이 ‘아버님, 그러시면 안 된다. 일본에는 프로가 많고 앞으로 골프는 장래성이 있는 스포츠다. 당신 딸이 일본에 오는 게 좋을 것이다. 따님은 골프를 잘한다. 일본 프로들을 봐도 이렇게 잘 치는 프로는 거의 없다.’라고 말을 해준 거예요. 그때 저는 한국 프로가 되기도 전인데도 그렇게 그분들이 얘기를 해줘서 아버지가 그날 저녁에 ‘한국에서 잘해서 일본으로 한번 가봐라’ 이렇게 말해주셨죠. 저는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았어요.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최고의 순간이었겠네요.
[고우순 프로] 네. 아버지 허락을 받았으니 그때부터 대놓고 골프를 치러 나갔죠. ‘나 골프 하러 간다’ 그랬더니 동네 할머니들이 ‘야, 쟤는 맨날 선머슴처럼 쇠 파이프를 들고 다닌다’ 뭐 이렇게 얘기하고 그랬어요. 나중에 제가 미국 LPGA 대회에서 우승하고 TV에도 나오니까 동네에서 플래카드를 3개월 동안 붙여놓을 정도로 자랑스러워했죠. 그때 쇠 파이프 얘기했던 할머니들이 ‘쟤가 나쁜 짓을 한 게 아니었구먼’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더라구요.
쇠 파이프 이야기하신 할머니들에게 ‘저는 골프로서 세계무대로 나갈 겁니다. 저는 할머니들처럼 이 시골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있으면 안 됩니다. 세계로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말했더니 할머니들이 ‘저게 미쳤나’라고 답하시더라고요. 그분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니까.
고우순 선수는 할아버지의 꿈속 지도에서도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꿈속 가르침을 통해 퍼팅과 쇼트게임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게 되었다고 했다.
[고우순 프로] 제가 미군 부대에서 관전하면서 골프를 시작했잖아요. 그립을 어떻게 잡는지도 몰랐는데 제가 혼자서 마당에서 연습할 때였어요. 제 할아버지는 제가 100일 때 돌아가셨거든요. 골프도 안 치셨던 할아버지가 꿈속에 나타나셔서 골프를 가르쳐주셨어요. 할아버지는 훈장이셨다고 해요. 당시 학교가 많이 없으니까 서당의 훈장일을 하셨는데 그 할아버지가 꿈속에 나타나셔서 ‘골프 할 때 머리를 들면 안 된다’는 등의 코칭을 해주신 거예요. 여러 내용의 골프를 너무너무 많이 가르쳐주셨어요. 매일 꿈에서 나타나셨지요.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할아버지께서 해주신 조언을 더 소개해주시겠어요?
[고우순 프로] 퍼팅할 때 볼을 보지 말라고 하셨어요. 볼을 안 보면 알아서 홀컵을 찾아간다는 거였지요. 그게 사실이더라고요. 할아버지 말을 듣고 깜깜한 밤에도 퍼팅 연습을 해보면 들어가는 소리만 딸랑딸랑 들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머리를 안 들고 볼의 스윗 스팟에 맞았을 때는 볼이 홀컵 안에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걸 확실히 느꼈지요. 일본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퍼팅에 대해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냐고 묻곤 했지요. 일본에서 제가 퍼팅 랭킹 1위를 하고 그다음에는 2등을 했는데 ‘프로는 퍼팅 그리고 돈’이라는 말을 실감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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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순 선수는 일본에서의 성공 이후에도 골프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일본 호도가야CC에서 회원들에게 레슨을 하며, 골프에 대한 지식과 열정을 나누고 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건 '고우순 인비테이셔널' 대회를 통해 한국과 일본 골프의 발전을 위해 힘쓴 바 있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은 일본 골프계와 언론으로부터도 인정받았다. '고우순 인비테이셔널'은 일본 여자프로골프협회 홈페이지의 메인을 장식하며, 일본에서 그녀의 존재감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고우순 인비테이셔널’은 어떻게 하시게 되었는지요?
[고우순 프로] 한국 선수들이 사실 일본에서 휩쓸었잖아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무 상금을 많이 탔지요. 저도 그 사람 중 한 명이었고. 그래서 저라도 일본에 기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에는 시니어대회가 없으니까, 제 이름이라도 써서 만들어 본 거죠. 남편이 일본 사람인데 남편 회사가 스폰서를 했지요. 제 남편 회사가 매년 대회를 주최할 큰 회사는 아니기 때문에 1회에 그쳤지만, 한국인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었어요.
고우순 선수는 한국과 일본 골프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녀의 남은 인생을 골프를 통해 이 두 나라에 보답하고자 한다. 고우순 선수는 골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한국과 일본 골프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한국 선수가 미국 LPGA에서 200승 이상을 기록했는데 한국 선수들의 그간 맹활약을 보며 어떤 마음이 드셨는지요? 한국 선수들이 이렇게 잘하리라 생각하셨나요?
[고우순 프로] 한국 선수들은 일단 매우 건강해요. 그래서 골프를 잘할 수밖에 없어요. 일본 선수에 비하면 훨씬 더 건강하지요. 우리 시절에는 부모님들이 아이 골프하는 데 따라오고 그런 건 별로 없었잖아요. 혼자서 집안일 해가면서 골프 치면서 이렇게 다 했는데, 요즘은 엄마 아빠가 어릴 때부터 차 운전부터 모든 걸 다 해주고 아이는 골프 트레이닝만 하면 되니까 잘하는 것 같아요. 가족이 올인을 하잖아요. 가족이 올인하니까 관리가 잘 되는 거죠. 관리가 잘 되니까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거고요.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부모님들의 서포트가 잘 되는 게, 한국 선수들의 성적에 좋은 영향을 주는 것도 있지만 좋지 않은 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고우순 프로] 제 현역 시절엔 프로끼리 함께 택시 타고 숙소로 가고 그렇게 했어요. 그래서 친해질 기회가 많은데, 지금은 프로끼리 어울리는 시간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부모나 가족이 함께 다니니 가족끼리만 함께 움직이는 거죠. 관리가 잘 되어 좋은 점도 있지만 잘 안되는 경우도 있고, 또 선수 간에 어울릴 기회도 적고요. 더 안타까운 것은 부모들이 30대 후반, 40대 초중반 이런데, 하던 사업이나 일을 전폐하고 퇴직한 후 자녀 골프 선수를 서포트했는데 성공한 선수는 1%밖에 되지 않는다는 거죠.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골프 선수들이 많은데 골프계 후배들에게 좀 이렇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조언이라고 할까요?
[고우순 프로] 어릴 때부터 골프를 한 사람은 빨리 은퇴를 해야 하지요. 일찍 시작하든 늦게 시작하든 골프 선수로서 할 수 있는 햇수는 약 20년이거든요. 20년쯤 하면 체력도 떨어지고, 성적도 잘 나오지 않아요. 언제 시작했든 골프를 즐기면서 하고, 자신의 취미생활도 좀 해가면서 하면 좋겠어요. 저는 취미가 골프이고 일이 골프니까, 취미생활을 너무 잘하면서 하는 편인데, 다른 선수들은 그렇지 않으니까, 취미생활도 좀 하면서 즐겨 가면서 롱런할 수 있는 골퍼가 되면 좋겠어요.
골프의 전설 잭 니클러스 동상 옆에서 기념 촬영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골프가 고 프로님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였는지 마지막으로 말씀해주세요.
[고우순 프로] 저는 골프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고요. 골프로서는 어떻게 보면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식이 없어서 이런 점에서는 성공을 못 했고 두 가지를 다 할 수 없었던 게 후회스럽지만, 골프를 한 것에 후회가 없고 정말 세계를 다니는 제 인생은 너무 즐거웠고 전 세계로 많은 경험도 했어요.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정말 제 나이 60세인데 레슨 일이 있고 시니어 대회 그랜드 시니어 이 대회도 다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있고 하니까 저는 너무 앞으로도 더 즐거운 인생이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몸만 아프지 않으면 몸 관리 잘해서 즐겁게 마지막까지 골프를 치고 싶네요.
저는 여전히 골프에 대한 매력을 더 파고 더 좋은 기술을 배우고 싶어요. 제가 골프공을 삶아서 물을 먹으면 골프를 잘 칠까 생각도 해봤어요. 그 정도로 골프는 어려웠어요. 골프는 저에게 많은 분을 만날 수 있도록 했는데 일본에서 상류층에 계신 분들하고 계속 대화도 골프 라운딩을 할 수 있었지요.
골프장은 저희 집에서 13분밖에 안 걸리고 시내 안에 있으니까 좋은데, 골프장에 일본의 엘리트들이 있으니까 한일 관계도 그렇고 공부도 많이 되었지요. 제가 가는 골프장은 아시아에서 온 대사들이 특별 멤버라 그분들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영어가 잘 안되어서 레슨 하는 게 쉽지 않음에도 대사들은 저에게 레슨받으러 일부러 도쿄에서 오시지요. 아프리카 대사들도 마찬가지고요. 골프는 저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고우순이라는 사람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골프라고 할 수 있겠네요. 고우순=골프입니다.
[인터뷰 후기]
기자는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1대1 인터뷰했다. 존 우든(농구계의 전설), 코비 브라이언트(NBA 스타), 박찬호(MLB 선수), 추신수(MLB 선수), 이만수(한국 프로야구의 전설), 이승엽(한국 프로야구의 전설), 브룩 리(최초의 한국계 미스 유니버스), 길버트 아밀리오(전 애플 회장), 앨런 아이버슨(NBA 스타), 김병현(MLB 스타), 김혜자(배우), 스캇 보라스(에이전트계의 마이더스 손), 에릭 가니에(MLB 스타), 김선우(MLB 선수. 현 해설위원), 앤드류 프리드먼(LA 다저스 사장), 리처드 박(NHL 선수), 폴 디포데스타(머니볼의 진짜 주인공), 마이클 아이즈너(디즈니 회장), 거스 히딩크(전 축구대표 감독), 프레드 클레어(전 다저스 단장), 스티브 김(한국의 빌 게이츠로 불렸던 사업가), 송종국(전 축구 국가대표 선수), 박세리, 김미현, 박지은, 펄 신(전 LPGA 선수), 이상훈(전 LG 트윈스 투수), 토비 도슨(2006년 동계 올림픽 스키 모굴 동메달리스트. 한인 입양아 출신), 마크 샤파이로(토론토 블루제이스 사장), 디켐베 무텀보(NBA 스타), 최희섭(전 MLB 선수), 박정현(가수), 서재응(MLB 선수) 등. 미국의 마이너리거였던 송승준, 안병학은 마치 전담 기자인 것처럼 인터뷰 및 취재를 하고 몇 년 동안 시즌 내내 기사를 올렸고 미국의 인권 운동가인 양현승 목사와는 심층 인터뷰를 통해 책을 낸 바 있다.
이 밖에도 더 많은 1대1 인터뷰를 했지만 이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다. 1대1 인터뷰가 아니지만 마이클 조던, 섀킬 오닐(전 NBA 선수), 배리 본즈(MLB 선수), 미국의 정재계 인사들을 인터뷰했다. 미국의 사회 지도층 인사 다수와도 인터뷰를 했다.
가장 인상적인 인터뷰이는 역시 존 우든이었다. 미국 농구의 전설적인 인물인 존 우든은 올드타이머들에게는 마이클 조던 정도로 알려진 감독이었다. 그의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만남이었다.
이렇게 길게 경험을 소개한 이유는 고우순 프로와의 인터뷰가 개인적으로 역대급 인터뷰였기 때문이다. 역대급인 이유는 그의 인터뷰 내용에는 드라마와 같은 흥미로운 스토리가 있고 그의 삶을 통해 장인을 발견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하면서 어록도 꽤 많았다. ‘제 취미는 골프입니다.’ ‘일본에 가려면 수영해서 가야 하는 줄 알고 수영을 열심히 했어요.’ ‘선생과 학생이 마음이 통해야 제대로 전달을 할 수 있어요.’ ‘(골프채를) 쇠 파이프라고 부른 동네 할머니’ ‘오히려 세계 1위가 긴장하던데요’ ‘고우순=골프’ 등등.
대단한 사람을 만나면 참으로 기쁘다. 많이 배울 수 있고, 그의 인생을 함께 축하하는 것 같아서다. 역대급 인터뷰를 허락한 고우순 프로님과 인터뷰를 주선해주신 김지혜 에이랩스 실장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