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ituary는 부음, 사망기사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데 원뜻은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소식을 알리면서 동시에 그의 일대기를 소개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부음, 사망기사보다는 '오비추어리'가 더 나은 것으로 판단해 이렇게 제목을 붙였다.
“저들이 저들 편한 대로만 만들어 놓은 이 땅의 부당한 사회구조를 미워합시다.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할 용기가 없다면 마음속으로 진실하게 믿는 용기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의 박종철(1965년생)은 1986년 노학연대 투쟁에 참여했다가 4월 1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가두시위에서 체포 및 구속되었고 7월 15일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위 내용은 당시 옥중에서 박종철이 부모님께 쓴 편지 내용 중 일부이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제22대 총선 유세 때 그렇게 강조했던 ‘운동권’들이 민주화 투쟁에 나서 정부의 박해를 받던 시절이었다. 박종철도 운동권 중 한 명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다. 전두환은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했고, 대학가에서는 민주화를 외치던 학생들을 공산주의자로 내몰며 ‘운동권’ 체포에 혈안이 됐다.
전두환 정권은 1986년 10.28 건국대학교 항쟁 진압 후 마르크스-레닌주의당 결성기도 사건 등 공안조작 사건을 발표했던 상황이었다. 운동권 체포와 통치의 안전과 안정을 위해 민주화 운동을 하는 이들을 붙잡아 고문하고 공산주의자로 싸잡아 체포하는 게 전두환 정권이 하는 일이었다.
지금도 친북이니, 북한의 지시를 받고 행동한다느니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은 그때의 잔재가 있기 때문이다. 1987년 1월 13일 김종호 내무부장관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격려 방문했다. 그는 경찰들에게 공안사건 수사에 속도를 내도록 압박했다. 그리고 다음 날 경찰은 박종철을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했다.경찰 대공 수사관들은 박종철에게 얻고 싶은 정보가 있었다. 바로 1985년 10월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된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박종철은 계속 그의 소재를 모른다고 답했다. 전날 내무부장관의 방문도 있었기에 광분한 수사관들은 박종철의 옷을 모두 벗기고 조사실 안에 있는 욕조로 끌고 가 물고문을 반복했다.
박종철은 계속 모른다고 했다. 수사관들은 결박당한 두 다리를 들어 올려 또다시 물고문을 가했고 고문 도중 욕조의 턱에 목 부분이 눌리면서 결국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인해 박종철은 의식을 잃었다.
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의 의사가 급히 출동해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박종철은 깨어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당시 출동했던 의사 오연상의 지혜가 아니었다면 박종철은 나라를 위해 죽은 열사가 아닌 병원의 과실로 숨을 거둔 사람으로 전락할 뻔했다.
오연상 당시 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 내분비내과 전임강사는 박종철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고문치사’임을 파악했기에 병원 응급실에 전화를 걸어 절대 ‘사자’를 받지 말라고 했고 시신은 국립경찰병원으로 이송됐다. 고문치사 사건이 의료사고로 둔갑하여 은폐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오연상은"사망진단서를 써 달라"는 경찰의 요청에 '사체검안서'를 써 주었다. 오연상은 이 내용을 동아일보 기자 윤상삼에게 전달했고 이후 오연상은 잠적했다. 전두환 정부는 책임을 전가할 사람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경찰은 박종철이 병원에서 숨진 것으로 조작하려고 했다.
당시 중앙일보 서울지검 출입 기자인 신성호가 "학생이 남영동에서 죽었다"는 단신을 내보냈는데 문공부는 중앙일보에 난입해 회사를 뒤집고 떠났다. 이후 중앙일보는 후속 기사를 쓸 수 없었다. 정부는 이후 박종철 사망 사건을 날조, 은폐하려고 노력했지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5.18 민주화운동 7주기 기념 미사에서 사망 사건을 폭로해 더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각 언론이 앞다퉈 이 사건을 다뤘다.
가해 경찰들은 조한경, 강진규,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5명이다. 그리고 가해를 지시한 쪽은 전두환 정권이다. 김종호 내무부장관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방문해 좀 더 강하게 수사하라는 지시를 내린 다음 날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사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치안본부장은 급기야 발표문을 냈다. 그리고 이 발표문에는 그 유명하고 어이없는 “수사관이 책상을 치자 박종철이 ‘억’소리를 내며 쓰려졌다”는 내용이 있다.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아침 8시 10분경 관악구 신림동 하숙방에서 연행되어 9시 16분경 아침식사로 나온 밥과 콩나물국을 조금 먹다가 입맛이 없다며 냉수를 몇 잔 마신 뒤 10시 15분경부터 박종운 소재에 대한 심문을 받았다.
발표문에는 수사관이 책상을 치자 박종철이 "억"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정오쯤에 사망했다고 나온다.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내가 아는 한 가혹행위는 없었다. 먼저 가족들에게 경찰이 결백하다는 걸 납득시키고 부검 결과가 나오면 나중에 떳떳이 전모를 밝히겠다"고 말했다. 신임 내무부장관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라고 말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진압부대의 최고위직인 특전사령관이 정호용이었다.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말도, 5.18 당시 수많은 시민을 죽인 정호용이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냐?"는 말도 상식적이지 않고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발언들이었다.
제22대 총선에서 왜 50대가 조국혁신당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을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50대는 1980년대 당시 젊은 피였다. 정부가 국민을 이용하고 괴롭히고 오도하는 것이 너무나 싫어 길거리로 나가 시위했던 연령층이다. 21세기, 2024년에도 반복하는 정부 관계자들의 어이없는 발언과 분노를 일으키는 행동을 윤석열 정부에서 보았기에 이 정부는 3년 더 가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들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신생 정당 조국혁신당을 사랑한 게 아니라 현 정부가 너무나 싫었기에 조국의 과오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윤 정부를 가장 빨리 역사의 뒤안길로 보낼 당을 조국혁신당으로 보았기에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것이다. 정부는 박종철 사망 사건을 은폐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마치 채상병 사건, 이태원 사건, 세월호 사건 등을 은폐하려는 현 정부처럼 말이다. 박종철이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다는 둥 온갖 거짓이 담긴 내용을 정부는 계속 발표했는데 거짓말은 중앙대 부속 용산병원 내과 의사 오연상에 의해 세상에 입증되었다.
박종철은 병원에 옮기던 때에 사망한 게 아니라 사건 당일인 14일 오전 11시 45분경 사망한 상태였다고 오연상은 밝혔다.
당시 의사 오연상뿐만 아니라 언론의 역할도 중요했다. MBC 신경민 앵커(현 새로운미래)와 동아일보가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앙일보는 특종을 터뜨리고도 이후 후속 보도에 소극적 일 수밖에 없었다.
신경민 앵커는 15~20초짜리 단신 문장을 30초 이상 길게 읽는 등 이 소식을 국민에게 인지시키려고 노력했고 동아일보는 1월 16일 자부터 이 사건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해 1987년 1월 19일 자에 1면 톱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를 비롯한 대부분 언론사들은 이 사건을 단신으로 처리했는데 동아일보 1월19일자 1면 보도는 6월 항쟁 촉발에 결정적인 시작이 되었다.
KBS 기자도 적극적인 취재 태도를 보였지만 정부 측의 방해로 취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1월16일자 기사를 보면 ‘경찰 조사받던 서울대생 숨져’(매일경제), ‘숨진 박종철 군’(조선일보), ‘조사받던 대학생의 죽음’(동아일보), ‘경찰서 대학생 쇼크사, 검찰, 진상규명 나서’(경향신문)라는 단신 기사가 떴고 1월17일자에는 동아일보가 기사 꼭지수를 대거 늘려 1면 기사를 터뜨리기 위한 ‘빌드업’을 했다. 17일자 기사가 눈에 띈다. 동아일보 김중배 논설위원은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라는 칼럼에서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라는 글을 썼다.
이에 경쟁사인 조선일보가 18일자부터 적극적으로 기사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19일자에 대한민국 역사를 바꿀 1면 기사를 싣는다. 제목은 ‘물고문 도중 질식사’였고 1면 톱 기사였다. 동아일보는 정치, 사회면을 이 사건 기사로 도배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 전반 그리고 전 세계로 일파만파 확산했다.
이후 ‘운동권’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이 군부독재 철폐를 주장했고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했다. 연세대학생 이한열 열사가 6월9일 학내에서 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면서 10일부터 시작되어 7월9일까지 지속된 6월 항쟁에는 무려 400~500만명의 인원이 참여하게 되었다. 이 평화적인 6월 항쟁에 전 세계가 놀랐고 결국 전두환 정권은 노태우 후계자를 통해 6.29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 선언에는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포함됐다.
박종철의 죽음은 그렇게 한국에 민주화가 이뤄지는 데 결정적인 그 무엇이 되었다. 헛되지 않은 죽음이었다.
그렇게 막내아들을 나라를 위해 보낸 정차순 어머니. 그는 1956년 부산에서 남편 고 박정기 선생(3년 전 작고)과 결혼해 2남 1녀를 낳았고 그 막내아들이 박종철이었다.
억울하게 죽은 자식을 생각하며 그는 평생을 인권을 위해 바쳤다. 다른 이들의 억울한 죽음이 있는 곳에 정차순 씨는 늘 조용히 자리했다.
지금도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는데, 억울하고 비통한 자식의 죽음 뒤에 흘러나오는 말, “자식의 죽음으로 거액을 받았다” “보상금을 노려서 저런다”는 가슴을 찢는 말. 정차순 씨는 1987년 4월 아들의 100재를 마친 후에 “말 좋아하는 사람들은 (종)철이가 죽은 뒤 우리가 거액의 돈을 받았느니 돈방석에 앉았느니, 하며 별 소문이 다 있는 모양인데 기가 찰 노릇이다”라고 말했다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상한 사람들은 별로 변한 게 없다. 세월호 사망자 가족과 이태원 망자 가족들에게도 같은 말이 반복되어 들렸기 때문이다.
정차순 여사는 “우리는 정치가 무언지도 모릅니다. 괜히 종철이의 죽음을 놓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느니, 거기에 말려들면 안 된다느니 야단들인데 우리는 그런 것 모릅니다.”라며 “억울하고 답답한 부모의 심정을 좀 헤아려주고 다시는 자신들 같은 억울함을 당하는 부모와 자식이 없기를 바랍니다”라고 덧붙였다.
박종철 열사가 세상을 떠난 약 2년 후인 1988년 12월23일 정차순 씨는 박종철 고문 당시 경찰이 그렇게 소재 파악을 원했던 박종운 씨를 만났다. 정차순 여사는 종운 씨를 원망하지 않았다. 종운 씨가 죄송하다며 머리를 숙이고 울자 정차순 어머니는 “네 마음이 오죽했겠나. 우리 가족은 지금까지 너를 원망해본 적이 손톱만큼도 없다.”며 “나 이젠 안 운다. 내가 왜 그때 (종)철이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무라기만 했는지 모르겠어. 철이는 네가(종운) 자기 몫까지 해줄 것으로 믿었겠지”라며 위로와 격려의 말을 했다.
거듭 죄송하다는 표현을 한 종운 씨는 이에 “예, 어머니, 철이나 저나 모두가 골고루 잘 사는 세상을 만들려고 했는데 아직도 안 돼 맘 놓고 울 수도 없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고 한겨례 신문은 보도했다.
박종운 씨는 그러나 이후 뉴라이트 운동에 참여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하는 등 이전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는 이후 정치계에서 나와 2021년 1월부터는 택시기사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종철, 박종운 등이 꿈꿨던 세상은 오지 않았지만, 박종철의 죽음에 천심이 노했고 민심이 움직였다. 그리고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군부독재는 끝이 났고 민주화가 이뤄졌다. 그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다.
그렇게 세상을 바꿔놓았던 자식을 따라 정차순 여사는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정차순 여사는 17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 자식을 보낸 후 괴로워하던 많은 어머니를 위로한 후 그는 91년의 생을 마감했다.
18일 장례식장에서 취재를 한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기자는 장례식을 도왔던 정찬순 여사의 지인에게 "정 여사는 어떤 분이었는지"에 대해 묻자 그는 "약한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항상 담담하셨어요. 담담하셨는데 절대로 아들 얘기는 안 하시고 그러니까 너무 고통스러워 하셨던 것 같아요. 너무 고통스러운데 그걸 표현하지 않으셨고 주변 사람들의 일상이 무너지지 않게 감정을 굉장히 잘 조절을 하셨다"고 답했다. 그는 또 "박종운 씨는 다녀가셨는지"를 묻자 "네, 어제 다녀 가셨다. 그러나 특별히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라고 답했다.
동아일보 논설위원의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