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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ituary] '90도 인사했던 퍼스트레이디' 故 손명순 여사

김영삼 대통령 &대한민국의 위대한 아내 손명순 여사, 사람답게 살다가 세상과 작별

등록일 2024년03월09일 14시01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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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ituary는 부음, 사망기사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데 원뜻은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소식을 알리면서 동시에 그의 일대기를 소개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부음, 사망기사보다는 '오비추어리'가 더 나은 듯하여 이렇게 제목을 붙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 손명순 여사의 아들은 김현철 씨가 한 조문객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Photo by NjT.

 

 

온갖 시련과 굴곡과 영광을 다 누렸던 인물.


고 손명순 여사가 3월7일 세상과 이별했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내로 잘 알려진 손 여사는 숙환으로 95세에 세상을 떠났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손명순 여사 두 사람 모두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돈 걱정 없이 컸지만 결혼 후 절대 쉽지 않은 삶을 살았다.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20대에 정치에 뛰어든 김영삼은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미운털이 박혀 쉽지 않은 정치 인생을 뚜벅뚜벅 걸었다. 김영삼이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3선 개헌하려고 하자 그를 찾아가 "박사님, 개헌하시면 안 됩니다. 국부(國父)로 남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가 미운털이 박혔고 이후 그는 권력자들에게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80세 노인이었던 이승만은 28세였던 젊은 자유당 의원 김영삼의 직설적인 발언을 듣고 불쾌한 나머지 손을 떨었다는 전언이다. 


이승만은 3선을 하고자 헌법을 수정하려고 했고 투표까지 붙여졌는데 203명의 국회의원 중 3분의 2 이상의 표를 받아야 했다. 즉 136표를 받아야 했는데 당시 3분의 2는 135.333표였다. 그리고 드라마처럼 135표가 나오는 바람에 수학의 사사오입(四捨五入), 즉 반올림 원칙에 따라 0.333을 뺀 135명으로 사사오입 개헌하면서 김영삼은 ‘이 당은 안 되겠다’라며 자유당을 탈당했다. 

 

 

김영삼의 서울대 졸업 당시 사진. 왼쪽이 손명순 여사.


이후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영원한 거센 야당 맨이 됐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후 군정에서는 계속 군정 참여를 요청하였으나 김영삼은 이를 거절했고 군정 연장 반대 데모에 참여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김영삼은 늘 박정희와 대척점에 있었다. 박정희가 장기 집권을 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자 1969년 6월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김영삼은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습격당했다. 매복하고 있던 괴한들은 김영삼 원내총무의 차를 둘러싸고 승용차 창문에 초산을 뿌렸다. 다행히 미수에 그쳤지만,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정권 차원의 테러"라고 주장한 바 있다. 박정희 측은 당연히 부인했다. 


김영삼은 박정희가 유신 헌법을 통해 국회의원의 3분의 1과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긴급조치권 및 국회해산권을 가지며, 임기 6년에 횟수의 제한 없이 연임할 수 있게 되자 이를 강력히 저지하는 야당의 리더 중 한 명이 됐다.


그가 정치했을 당시 민주주의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계속 벌어졌다.


1978년부터 김대중을 가택 연금했던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마저 똑같이 하기로 했다. 그는 총재직과 국회의원직에서 강제로 제명되고 이어 가택 연금되는 탄압을 받았다. 


12·12 사태로 박정희가 암살당해 사람들은 ‘서울의 봄’이 올 줄 알았지만,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후에 정치적 핍박은 계속 이어졌다. 전두환이 물러나고 노태우가 정권을 잡은 후 김영삼은 1993년 대통령이 되어 실로 오랜만에 문민정부가 들어서는데 주인공이 됐다.

 


대통령이 된 후 김영삼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하나회의 척결이었다. 2008년 그는 “만약 내가 하나회를 깨끗이 청산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6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군부의 파워는 대단했고 이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독버섯과 같았다. 


대통령이 된 후에 김영삼은 그러나 차남이자 ‘소통령’으로 불렸던 김현철 관련 한보사건으로 힘겹게 통치 기간을 마쳤다. 이런 모든 김영삼의 아픔과 영광을 함께한 이가 손명순 여사였다.


손명순 여사는 김현철 씨와 관련해 김영삼 대통령과 말다툼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98년 5월 21일 자 기사에 의하면 “김 대통령이 집무를 마치고 관저로 돌아오면 ‘왜 현철이를 감옥에 보내려고 하느냐’며 말다툼하기 일쑤였다. 그전에도 손 여사는 현철 씨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 현철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느냐’며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잠인들 제대로 잤겠는가. 당시 김 대통령 얼굴이 늘 푸석푸석해 보인 것은 그래서였다”라는 측근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현철 씨가 구속되었을 당시 손 여사는 눈물로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경향신문 1998년 6월 8일 자 보도에 따르면 손 여사는 아들 면회를 하러 가고 싶었지만, 청와대 비서실에서 ‘영부인이 구치소로 찾아간 전례가 없을 뿐 아니라 자칫 여론을 악화시켜 현철 씨에게 안 좋을 수 있다’라고 만류해 성사가 되지 않았고 손 여사는 김 대통령에게 매달려 ‘아들을 보고 싶다’고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오마이뉴스의 2002년 기사를 보면 손명순 여사는 “전통적인 현모양처형”이다. 그는 (남편과는 달리) 원래 정치에 무관심했던 이유로 공식적이고 관례적인 역할만을 수행했다. 그는 여성 역할 변화가 두드러진 1990년대 시대 상황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영부인직을 고수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는 겸손한 태도를 늘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3년 2월 27일 자 동아일보를 보면 “손 여사는 대통령 뒷전에 서서 접하는 사람들마다 깊숙이 허리 굽혀 인사했다. 오랜만에 허리 굽혀 인사하는 퍼스트레이디를 본다”라고 나와 있다. 


한국일보의 신효섭 기자는 1992년 12월 21일 자에 손 여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특집 기사를 썼다. 


“야당 투사를 사위로 둔 탓에 친정아버지의 사업체가 갖은 압력을 받아 결국 지난 1960년 문을 닫게 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을 때 (손 여사는) 혼자 한없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난 80년대 초 남편이 군부 세력에 의해 수년간 연금되어 있다 20일간의 단식 투쟁으로 항거했을 때는 차라리 본인이 단식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길 정도로 (그는) 깊은 아픔을 느꼈다.
 

그런 와중에서도 손 여사는 2남 3녀의 자녀를 모두 훌륭히 키워냈다. 또 상처하신 시아버지의 재혼을 손수 나서 성사할 정도로 효성이 높다는 게 주위의 평이다.
 

시래깃국과 잡곡밥을 「상도동 식단」이라고 소개하는 손 여사는 1주일에 1∼2회는 손수 시장을 보며, 특히 시금치 아욱 근대 배추 등의 야채를 계절 따라 번갈아 식탁에 올려 남편의 식성을 맞추고 있다.
 

상도동을 찾는 사람들은 손 여사가 햇배추로 끓여낸 배춧국을 「별미」로 여기고 있다. 손 여사는 『저는 남편이 어떤 일을 하든 부인이 너무 나서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라며 소리 나지 않는 내조론을 펼친다. 그러나 퍼스트레이디로서 할 일은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특히 『불우한 고아 노인 근로 여성들을 위해 뭔가를 꼭 해 보이고 싶다』는 것이 손 여사의 소망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위대한 아내 손명순 여사는 95년을 그렇게 사람답게 살다가 세상과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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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기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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