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뉴스등록
포토뉴스
RSS
자사일정
주요행사
맨위로

[정치인 투데이] 주요 정치인들 제주4.3 희생자 추모식 참여

"사망자는 11234명에 이르렀으며 21-30세 사이의 희생자가 5536명으로 전 연령대 중 가장 많았다"

등록일 2024년04월03일 01시59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기사글축소 기사글확대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출처 - 경향신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3일 제주에서 제76주년 제주4.3추념식에 참가한 후 경남 창원, 부산에서 유세 지지에 나선다. 부산은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팽팽하게 경합을 벌이는 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김부겸 상임공동선대위원장은 포항, 울산, 양산에서 민주당 후보의 유세를 돕고 이후 부산에서 이재명 대표와 합류하게 된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위원장은 충주, 제천, 원주, 춘천, 포천, 동두천, 파주, 고양에서 ‘국민의힘으로 OOO 살리기’ 집중 유세를 계속 이어간다. 

 

조국혁신당의 조국 대표는 4·3희생자 추념식에 참여한 뒤 오후 7시에는 ‘검찰독재 조기종식, 서울시민과 함께 행사’를 이수역 12번 출구 앞 광장에서 갖게 된다. 

 

개혁신당 이주영 총괄선대위원장은 부산, 대구에서 지원 유세를 하게 되고 천하람 위원장은 4.3희생자 추념식, 대구 유세 지원에 나선다.

 

새로운미래 오영환 총괄선대위원장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에 참가한다. 녹색정의당의 김준우 상임대표도 역시 제주4.3희생자 추념식에 참가하고 부산에서 지원 유세에 나선다.   

 

국회에서는 개혁신당 이원욱 의원이 정치 현안 관련 기자회견을 오전 9시에 갖게 되고 조국혁신당의 황운하 의원은 10시에 정책공약 발표 기자회견을 하게 된다. 국민의힘 홍석준 의원은 오전 11시20분 MBC 정상화 및편파보도 관련 기자회견을 갖는다. 

 

尹정부에서는 한덕수 국무총리가 제주4.3 추념식에 참가한다.  

 

주요 정치인들이 대거 참가하는 제주4.3추념식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4.3사건을 기념하는 행사다. 당시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2만 5,000∼3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가옥 4만여 채가 소실되었으며, 중산간 지역의 상당수 마을이 폐허로 변했다. 학교·면사무소 등 공공기관 건물이 불탔으며 각종 산업시설이 파괴되었다.

 

사망자는 11234명에 이르렀으며 21-30세 사이의 희생자가 5536명으로 전 연령대 중 가장 많았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 활동에 심한 제약을 받았다. 1980년 8월에 이르러서야 국가보위비상대책 상임위원회는 연좌제를 폐지할 것을 발표했고, 1981년 3월 내무부는 후속 조치로 연좌제 폐지 지침을 발표했다.​​

 

양조훈 전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은 제주의 소리에 보낸 기고문에서 "최근에 이승만기념관이 추진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공이 있다 하겠으나 4.3 연구자로서 볼 때 그는 미군과 더불어 4.3 학살의 한 축이었고, 그 책임이 명백하다. 만약 그대로 추진된다면 그의 공로와 과오도 공정하게 기술될 수 있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또한 4.3에 대한 미국의 책임규명도 거론되고 있다. 물론 쉬운 사안이 아니다. 그럼에도 진실과 정의를 위해서는 미국 측에도 지속적인 책임규명을 촉구해야만 한다."라고 강조했다.

 

우익단체 출신은 제주4.3을 '공산당 폭동'으로 본다. 

 

미국은 어떻게 볼까? 최근 한겨레 신문이 미 국무부에 ‘제주4·3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무엇이냐’는 이메일 질의에 “1948년의 제주사건은 참혹한 비극(terrible tragedy)이었다. 우리는 엄청난 인명 손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답했다. 미 국무부는 또한 “미국은 민주적 가치와 인권 증진에 헌신하는 가까운 동맹국으로서, 앞으로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이러한 비극을 막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한국의 결의를 공유한다”고 덧붙였다.
 

 

1949년 6월25일자 경향 신문 기사를 보면 당시 남도당원이자 폭도로 여겨져 투옥된 김양근과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 인터뷰에서 김양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반란의 동기는 작년 4월3일경 민간의 충돌을 발단으로 자연발생적으로 봉기된 제주도 인민의 항쟁이다. 이러한 인민항쟁은 외래 'XXXX'의 침략을 받고 있는 세계 약소 민족 국가 전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고 그 현상의 하나가 바로 이번의 제주도 인민항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조직적 계획적 항쟁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투준비는 4월3일 사건 충돌후터였다. 중앙당에서 지령을 받은 적은 전혀 없었고 전투가 치열화 하여감에 따라 여러분 중앙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그때그때의 전투 방법의 지시였다. 주로 인민살상을 회피하라는 것이었다. 양민의 살상이 많았던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전투가 확대되어 감에 따라 우리가 뜻하지 않던 방향, 즉 인민살상이라는 처참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가게 된 것은 상상의외의 일이었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위 내용 중 XXXX는 미합중국이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 4.3 평화재단은 당시 한반도 정세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1948년 1월 남한 단독선거안이 명백해지자 남한 내의 많은 정당과 단체에서 잇따라 반대성명을 발표하면서 격렬하게 반발했다. 한반도가 영구히 남과 북으로 분단됨을 막고자 했던 것. 이 반대 대열에는 좌파 진영만이 아니라 우파 일부와 중도파까지도 가세하고 있었다. 남한 단독선거 찬반 문제를 놓고 우파 진영도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다.

 

하나는 단독정부 반대·남북협상의 추진을 내걸고 통일운동을 주창한 김구·김규식 등의 노선이고, 다른 하나는 미군정과 보조를 맞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던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의 노선이었다.

 

이런 정치 흐름 속에서 남조선노동당(약칭 : 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강력한 투쟁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1948년 2월 7일을 기해 전국을 총파업으로 몰고 간 ‘2·7사건’이었다.

 

1948년 초 제주도 내 좌익진영은 조직의 핵심 간부들이 대거 검거됨으로써 궤멸 상태에 빠졌다. ‘2·7사건’을 거치면서 전도적으로 검거 바람이 불었고, 붙잡힌 청년들에 대한 가혹한 취조가 이루어졌다.

 

조천에서는 3월 6일 조천중학원 학생 김용철이 혹독한 고문으로 숨졌고, 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 끌려간 대정면 영락리 출신 양은하가 경찰의 구타로 숨졌다. 3월 말 한림면 금릉리에서는 청년 박행구가 서청 단원에 붙잡혀 무수히 구타당한 뒤 총살되었다.


궁지에 몰린 제주도 좌익진영은 결사 항쟁을 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결국 여러 번에 걸친 비밀회의 끝에 경찰과 서청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의했다. 이와 함께 다가오는 5·10 단독선거 저지를 봉기 결행의 주요 명분으로 내세웠다.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4·3사건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해 습격하였다.
 

이 사건으로 4월 3일 하루 동안에 △경찰=사망 4명, 부상 6명, 행방불명 2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사망 8명, 부상 19명 △무장대=사망 2명, 생포 1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무장대는 4월 3일 행동을 개시하면서 2개의 ‘호소문’을 뿌렸다. 하나는 무장대가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경찰·공무원·대동청년단 단원들에게 보내는 경고문이다.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 양심 있는 경찰원들이여! 항쟁을 원치 않거든 인민의 편에 서라. 양심적인 공무원들이여! 하루빨리 선을 타서 소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직장을 지키며 악질 동료들과 끝까지 싸우라. 양심적인 경찰원, 대청원들이여!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조선사람이라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들을 학살하는 매국 매족노들을 거꾸러뜨려야 한다.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란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의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란 돌리지 말라. 양심적인 경찰원, 청년, 민주인사들이여! 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 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다른 하나는 무장대가 도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이다.

 

시민 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4·3’오늘은 당신님의 아들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님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무장대는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 산하 조직으로서, 정예부대인 유격대와 이를 보조하는 자위대, 특공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4월 3일 동원된 인원은 350명으로 추산된다. 4·3사건 전 기간에 걸쳐 무장세력은 500명 내외였다. 무기는 4·3 당시 소총 30정에서 경찰지서 습격과 경비대원 입산사건 등을 통해 보강되었다.

 

미군정청은 4·3사건이 발생하자 4월 5일 아침 전라남도 경찰 약 100명을 응원대로 제주에 급파하는 동시에 제주경찰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또 서청 단원들도 증원되었다.

 

미군정은 4월 17일, 그동안 관망 상태에 있었던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에게 사태 진압을 명령했다. 또한 부산 5연대 1개 대대를 차출, 제주도 파병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경찰에 비해 민족적인 성향이 강했던 9연대는 이 사건을 경찰 및 서청과 같은 극우 세력의 횡포로 인해 야기된 것으로 판단하여 ‘선선무 후토벌’을 원칙으로 정하고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이 결과 1948년 4월 28일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연대 정보참모 이윤락 중위, 그리고 무장대 측 군사총책 김달삼 등이 만나, “72시간 안의 전투 중지, 무장 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평화협상을 성사시켰다.

 

4·28 평화협상은 미군정 하지사령관의 무력 진압 방침 결정으로 깨졌다. 하지 사령관은 4월 27일 미 24군단 작전참모부 슈(M. W. Schewe) 중령을 제주에 보내어 사태 진압을 위해 귀순 공작과 무력 진압의 두 가지 방법을 함께 고려했다.

 

그러나 제주에서 작전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간 슈 중령의 4월 29일자 보고서에서 제주도 상황에 대해 “미 59군정중대장이 제주도에 있는 병력을 확실히 통솔한다면 현재의 주둔 병력만으로도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 충분하다. 공산주의자들과 게릴라 세력이 오름들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신속하고 활발한 작전이 요구된다”고 평가했다.

 

현재의 병력만으로도 진압이 가능하다는 내용의 이 보고서는 하지사령관으로 하여금 무력 진압을 결정하게 하였고, 결국 김익렬과 김달삼의 평화협상은 미군정 수뇌부에 의해 무시되었다.

 

평화협상 직후인 5월 1일에는 오라리 마을 방화사건이 발생, 협상을 파기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이 방화는 우익 청년들이 저질렀지만, 미군정과 경찰은 “폭도들이 한 행위”로 조작했다. 미군이 이 불타는 마을을 촬영,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란 영상 기록물을 제작하기도 했다.

 

5월 5일 제주에서 미군정장관 딘(William F. Dean) 소장 등 미군정 수뇌부가 참석한 가운데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강경 진압을 주장한 조병옥 경무부장과 선무귀순공작의 필요성을 역설한 김익렬 연대장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김익렬은 문책을 받아 해임되고, 다음날 9연대장은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되었다. 이는 강경 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인사였다."

 

 

본 기사는 유료기사로 기사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 결제 즉시 유료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디지털 콘텐츠 특성상 환불되지 않습니다. (단, 미사용시 환불 요청 가능)
- 결제한 내역은 마이페이지 결제내역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 환불 및 변경 문의와 관련해서는 메인페이지 하단 [이용약관 및 고객지원]을 통해
더 자세한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 정기회원권은 회원가입 후 이용이 가능합니다.
- 정기회원권은 마이페이지 또는 사이트 우측 상단 이용권결제를 이용해주세요.
박성훈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올려 1 내려 0
관련뉴스
[정치인 투데이] 선거개표 방송과 국민에게 드리는 메시지
[정치인 투데이] 마지막 유세, 그리고 새로운 출발
[정치인 투데이] 막판 유세, 이제 이틀 남았다
[정치인 투데이] 선거 유세 막바지 초강행군
사거리 유세 이제 중단해야! 한동훈 "우리는 모두 법을 지키면서 사는 선량한 시민"(?)
[청리성(聽利成)] 원하는 것이 있으면 먼저 주라
조국 "유세차·로고송·율동·마이크·연설·플래카드·벽보 없는 비례대표당" 헌법소원 제기 
대한의사협회 "하버드는 교수 1만명에 학생 160명" 그렇게 나라마다 상황 달라
尹 대국민 담화문 야권 반응 "만우절 장난 같은 대통령 담화" "“역시나 마이동풍(馬耳東風) 정권”

가장 많이 본 뉴스

뉴스 인물 교육 시리즈 짘놀

포토뉴스 더보기

현재접속자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