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rated on DALL·E.
“의무감은 죄책감으로부터 싹트는 것입니다.”
'리얼리티 트랜서핑 3' 후반부에 나온 문장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했다가, 금세 ‘아!’ 했다. 의무감의 원천이, 죄책감이라는 말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못했던 이유를 찾은 기분이었다. 아! 물론 모든 의무감이 죄책감에서 온다고 말할 순 없다. 의무감이 드는 역할을 떠올리면, 죄책감보다는 책임감에서 오는 경우가 더 많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일할 때 드는 의무감이 그렇다. 이는 죄책감이 아닌, 책임감에서 온다. 급여를 받는 대가로 나의 시간과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니, 책임감이 따르는 건 당연하다. 이 책에서 언급했던 사례는 이와는 좀 다르다. 그에 따른 차이가 있을 수 있겠다.
자선에 관한 부분에서 언급했다.
“고정적으로 자선을 하다 보면 나중에는 그것을 의무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의무감은 죄책감으로부터 싹트는 것입니다.” 이렇게 운을 뗐다. 우리는 크든 작든, 정기후원을 한다. 이것이 고정적으로 하는 자선이다. 처음에는 마음에 울림이 와서 시작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떤가? 멈추고 싶지만, 계속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올라온다. 이것이 바로 의무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문제는 이런 의무감이 다른 감정이 아닌, 죄책감에서 온다고 말한다.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계속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의 원천을 가만히 살펴보니,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까?
예전에 이런 깨달음을 얻은 적이 있다. “선(善)을 행하지 않은 것이 악(惡)을 행한 건 아니다. 반대로, 악(惡)을 행하지 않은 것이 선(善)을 행한 것도 아니다.” 선과 악 모두, 행하지 않는다고 반대의 행위를 했다고 간주할 순 없다는 말이다. 자선하지 않았다고 악을 행한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 자리에서 나만 뒷말하지 않았다고 선을 행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행위에서 멈추지 않는다. 마음의 원천까지 들어간다. 어떤 마음으로 그 행동을 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자선은 선을 행한 거다. 하지만 그 선이 의무감이라면, 그 의무감은 죄책감에서 왔다고 말한다. 자선하는 것을 멈추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그들을 외면하는 것이라는 죄책감 말이다. 이것을 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말이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한다.
“어떤 불쌍한 노파를 보고 갑자기 동정심을 느꼈다면 그것은 자비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거지 앞을 태연히 지나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비가 아니라 의무감의 유혹입니다.” 자비의 원천은 동정심이고, 의무감의 원천은 괴로움이라고 한다. 좋은 마음이 올라오는 것은 자비이며, 불편한 마음이 올라오는 것은 의무감이라고 표현해도 되겠다. 사람은, 이 둘의 마음을 모두 가진 듯하다. 평화방송 라디오를 듣다가 안타까운 사연이 들리면, 적은 돈이지만 바로 입금한다. 이는 분명, 자비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후원한 곳이라도 재정 상태가 곤궁해지면 멈추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는 분명 의무감, 그리고 죄책감이라 볼 수 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마음은, 의무감일 때가 더 많다고 한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마음은 ‘자비심’보다는 ‘의무감’으로부터 나오는 일이 더 많습니다. 이것은 자비가 아니라 중요성이 그 정체를 드러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요성이 바로, 의무감과 죄책감을 말한다. 자비의 마음보다 이런 마음이 더 앞서는 건, 어쩌면 사람이라 당연한지 모른다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으로 위안으로 삼아서는 안 될 일이다. 자비의 마음을 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 수 있을까?
깨달음을 얻기 위한 세 가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새벽 루틴 중 명상하는 시간이 있는데, 이때 듣는 명상 프로그램이 있다.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귓전 명상'이다. 100일 수행정진 프로그램이 있는데, 지금 두 번째 후반부 진행 중이다. 여기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세 가지를 소개했는데 공감됐다. 첫 번째는, 욕심을 내려놓는 거다. 이는 재차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두 번째는 분별하지 않는 거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가르지 않아야 한다. 세 번째는 비(非) 이원화다. 한마디로 나누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엇을 나누지 않아야 할까?
너와 나를 나누지 않아야 한다. 너와 나를 나누면 다른 사람이 된다. 다른 사람은 마음으로 깊이 공감하기 어렵다. 우리가 슬픈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른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일인칭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자기로 인식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눈물이 나지 않는다. 왜? 내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듯 너와 나를 분리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 깨달음이 결국, 자연스레 자비의 마음이 올라오는 상태가 아닐까?
나누지 않아야 한다.
그와 나를 나누지 않아야 한다. 코칭에서 가장 중요한 경청을 이야기할 때도 말한다. 한자로 들을, 청(聽)을 풀어서 말하는데, 우측 아래를 보면, 한일(一)자와 마음 심(心)자가 있다. 하나의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네 마음은 네 마음이고 내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과 하나의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만큼 경청을 제대로 하는 건 매우 어렵다. 하지만 그 경청을 제대로 하면 모든 소통은 자연스레 풀리게 된다. 자비의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 타인의 상황과 마음을 나와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인식하려고 노력할 때 올라오는 마음, 그것이 자비가 아닐까 한다. 자비의 마음을 내도록,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겠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