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라떼]는 오래전 사진을 소개하면서 해당 인물의 근황을 영상 등과 함께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리고 [올려]를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
위 기사는 1997년 박병기 편집장이 코비 브라이언트를 인터뷰한 내용이다. 월간 스포츠 전문지 루키(Rookie)에 기고한 내용이다. 코비 브라이언트가 그렇게 대단한 선수가 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필자는 그가 루키 시절이었을 때부터 조던급 선수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조던급 선수가 되었는가. 솔직히 그렇지는 않았다. 조던보다 약간 부족한 커리어를 남겼다. 하지만 그는 역대 최고의 테크니션이었다. 코비 브라이언트는 어떤 농구 인생을 살았는지 [포토 라떼]에서 알아본다. [편집자주]
코비 브라이언트. 미국 프로농구(NBA) 역사상 가장 스토리가 많았던 선수. 2020년 1월26일 그는 헬리콥터 사고로 젊은 나이(41세)에 세상을 떠났다.
기자는 코비가 18세였을 때 그를 단독 인터뷰한 적이 있고 그는 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에 나의 미국 이민 생활에서 몇 안 되는 활력소가 되는 스타였다. 그래서 그의 사망소식이 기자에게 남다르게 다가왔다.
인터뷰를 하며 만났던 사람들이 타계할 때마다 마음이 착잡해진다. 아래 유튜브 영상은 그가 18세 때 기자가 운영했던 인터뉴스에서 촬영한 사진 모음이다.
코비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뉴스를 보니 그의 슈퍼스타로서의 자산 가치는 500억원이 넘었다. 그렇게 엄청난 무형 유형의 자산을 한 순간의 사고로 제대로 쓰지 못하고 가는 삶을 보면서 인생의 허무함을 보게 되기도 했다.
만약 오늘 죽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일 죽게 된다면 오늘 무엇을 할까?
10대 때부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농구 선수 코비. 그가 좋은 곳에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의 가족에게 하늘에서 오는 평안이 있기를 바란다.
기자는 지난 겨울 라스베가스 CES를 취재하고 LA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길을 지나가는데 추억을 되살리게 하는 그림을 보게 되었다. 어떤 상점에 그려진 코비 그림. 너무나 반가웠다. 동승했던 지인이 “저런 그림이 LA에 많다. 그만큼 코비는 많은 이에게 사랑 받는 스타였다”라고 말했다. 그는 어떤 선수였을까? 어떤 사람이었을까?
Photo by NJT. 코비 브라이언트를 그리워하는 팬들이 많다. 한 상점에 코비 그림이 눈에 띈다. 사진-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당신이 정녕 위대해지길 원한다면, 그리고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이 되고자 한다면, 그 일을 위해 끝까지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한다.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다." (코비가 르브론 제임스에게 해준 말)
[장인의 전당] 코비 브라이언트 (농구)
17세였던 1996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13번으로 샬럿 호네츠에 지명된 코비 브라이언트는 지명 직후 레이커스로 트레이드됐다. 제리 웨스트 당시 레이커스 단장은 브라이언트의 장래성을 보고, 유고 출신의 블라디 디박(또는 디바치)을 호네츠로 보냈다. 웨스트의 결정은 훌륭했다. 레이커스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농구 팬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브라이언트의 존재 덕분이었다. 브라이언트의 NBA 인생을 '줌인'해 보았다.
■ 첫 2년 동안 적응기간
브라이언트는 '수퍼스타' 후보였지만 첫 2년 동안은 벤치 선수로서 뛰었다. 신인 시즌에 8.2득점을 기록했던 그는 2년차 시절에도 8.7득점에 그쳤다. 신인 시즌이었던 1997년, 그는 올스타전에서 슬램덩크 챔피언 자리에 등극했다. 화려한 플레이로 팬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은 브라이언트는 1998년 올스타전에서 서부 컨퍼런스 주전으로 선발됐다. 그는 NBA 역사상 가장 어린 올스타 주전으로 기록됐다.
■ 3년째에 주전 발탁
에디 존스, 닉 밴 엑셀의 백업 가드로 뛰었던 브라이언트는 NBA 진출 후 세 번째가 되는 시즌에 주전 자리를 꿰찼다. 레이커스는 존스, 밴 엑셀이 떠난 후라 가드 자리가 비었고 자연스럽게 브라이언트를 주전 가드로 세울 수 있었다. 오닐-브라이언트 콤비가 레이커스에 챔피언십을 가져줄 것이라는 믿음은 코비의 NBA 생활 첫 3년 동안 실현되지 않았다.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 레이커스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4전 전패를 당하고 탈락했다.
■ 새 감독 필 잭슨
브라이언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를 꼽는다면 필 잭슨일 것이다. 잭슨 감독은 1999-2000시즌에 레이커스 감독이 됐다. 시카고 불스를 '왕조'로 만들었던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들고온 잭슨 감독은 첫 시즌에는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브라이언트와 오닐은 그러나 생각이 달랐다. 3년 동안 꿈을 이루지 못했던 이들은 잭슨 감독 아래서 당장 우승하기를 원했다. 이 두 선수의 각오는 남달랐다. 그리고 결과는 잭슨 감독도 놀라워한 우승이었다. 잭슨 감독 부임 후 첫 시즌에 챔피언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NBA 4년차였던 브라이언트는 22.5득점, 6.3리바운드, 4.9어시스트로 데뷔 후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마침내 레이커스의 시대가 열렸다.
Photo by NJT. 코비와 샤크. 최고의 듀오이자 최고의 라이벌이었다. 사진-인터뉴스
■ 2인자의 설움?
브라이언트는 매년 성장해 2000-01시즌에는 기량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즌에 28.5득점, 5.8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한 브라이언트는 MVP가 될 수 있는 개인성적을 냈지만 팀 내 MVP도 될 수 없었기에 리그 MVP 선정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레이커스는 잭슨 감독 체제하에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지만 브라이언트와 오닐의 자존심 싸움이 시작됐다. 2001-02시즌에도 챔피언이 된 레이커스는 3년 연속 우승의 금자탑을 세웠다. 브라이언트는 그러나 여전히 2인자였다.
■ 왕조의 끝?
브라이언트의 기량은 더욱 향상됐다. 2002-03시즌에 그는 평균 30득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는 9경기 연속 40득점+를 기록했다. 2003년 2월 한 달 동안 브라이언트의 평균 득점은 40.6득점이었다. 브라이언트가 떴지만 레이커스는 4연패를 이루지 못했다. 서부 컨퍼런스 준결승 시리즈에서 스퍼스에 2승4패로 무릎을 꿇었던 것. LA 언론은 "브라이언트가 잘하는 것은 레이커스에 독약"이라는 식으로 모든 책임을 브라이언트에 떠넘겼다.
■ 성폭행 사건에 연루
브라이언트는 2003-04시즌이 시작하기 전 성폭행 사건에 연루됐다. 미 전국 언론은 이 소식을 연일 중계방송 하듯이 전했다. 농구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브라이언트는 이 사건으로 이미지가 추락했다. 깨끗한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브라이언트와 오닐의 신경전은 이 사건으로 더욱 첨예해졌다. 브라이언트는 자신이 성폭행 고소를 당해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오닐이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고 분개했다.
코비는 트레이닝 캠프가 시작하기 전, 잭슨 감독에게 "오닐이 언론에서 나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코비와 친했던 트레이너인 개리 비티는 오닐에 접근하지 못했고 오닐과 친했던 칩 셰이퍼 트레이너는 코비의 테이핑을 돕지 못했을 정도로 두 선수는 앙숙이었다. 또한, 어떤 기자가 오닐과 친하면 그는 브라이언트와 인터뷰를 할 수 없었다. 레이커스는 당시 슈퍼스타였던 개리 페이튼, 칼 말론을 영입하고도 두 선수의 감정싸움으로 인해 NBA 챔피언 결정전 진출에 만족해야 했다.
■ 모두 떠나고 홀로 남아
혼란스러운 시즌이 끝나고 오닐은 마이애미로 트레이드됐다. 그리고 잭슨 감독도 떠났다. 잭슨 감독은 떠나면서 코비를 비난한 내용을 실은 '마지막 시즌'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에는 잭슨 감독의 코비를 향한 애증이 잘 드러났다. 잭슨 감독의 빈자리를 루디 탐자노비치가 채웠지만 그는 시즌 중에 돌연 사임했다. 혼란이 이어졌고 레이커스는 리그의 웃음거리가 됐다. 오닐이 떠난 후 코비는 팀 내 1인자가 됐지만 아무도 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레이커스가 계속 헤매자 잭슨 감독은 2005-06시즌에 다시 LA로 돌아왔다. 레이커스의 부사장인 지니 버스는 잭슨의 여자친구였기 때문에 그의 컴백은 어렵지 않았다. 잭슨이 돌아온 시즌에 코비는 무려 35.4득점, 5.3리바운드, 4.5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범죄자' '이기주의자' 이미지가 강한 그를 MVP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 필 잭슨과 함께 레이커스 재건
잭슨 감독 재부임 후 첫 2년은 평범한 시즌이었다. 레이커스는 2년 연속 플레이오프에서 피닉스 선스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2007-08시즌이 시작하면서 코비는 '팀 플레이어'가 됐다. 앤드류 바이넘이 급성장하고 파우 가솔을 영입하자 코비를 중심으로 한 레이커스는 서부 최강이 됐다.
코비는 데뷔 후 줄곧 레이커스 유니폼만 입었다. 그의 영욕의 세월은 다른 사람의 인생과 크게 다르다. 독특한 인생을 보낸 그가 생애 첫 MVP 트로피를 받게 됐다. 2007-08시즌에 코비는 MVP로 선정됐고 레이커스는 오랜만에 서부 컨퍼런스 챔피언 자리에 등극했다. 레이커스는 그러나 결승에서 보스턴 셀틱스에 완패했다.
Photo by Tim Wang from Beijing, China
■ 코비 중심의 왕조 (1)
코비와 레이커스는 2008-09시즌에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레이커스는 시즌을 65승17패의 뛰어난 성적으로 마쳤고 코비는 MVP 투표에서 르브론 제임스(클리블랜드)에 이은 2위에 올랐다. 레이커스는 유타 재즈, 휴스턴 로키츠, 덴버 너기츠를 차례로 누르고 NBA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고 결승에서 올랜도 매직을 눌러 실로 오랜만에 NBA 챔피언이 됐다. 브라이언트는 NBA 챔프 결정전 MVP로 뽑혔다. 이는 코비의 네 번째 챔피언 등극이었고 오닐이 떠난 후 첫 번째 챔피언십이었다.
■ 코비 중심의 왕조 (2)
2008년 챔피언 보스턴 셀틱스와의 재대결에서 브라이언트는 챔피언 결정전 7차전 4쿼터에 10점을 쏟아부으며 소속팀을 다시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았다. 코비의 생애 다섯 번째 우승이고 그는 2년 연속 NBA 챔피언십 MVP상을 수상했다. 코비는 당시 “나의 5차례의 챔피언십 중 가장 만족스러운 행보였다”라고 말했다.
■ 하락세 그리고 은퇴
코비는 이후 잦은 부상으로 결장하는 일이 많았다. 이는 레이커스의 성적과 그대로 연결되었다. 마이클 조던처럼 6번째 반지를 받고 은퇴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후 레이커스는 계속 추락했고 코비는 2016년 은퇴했다. 그는 생애 마지막 NBA 경기도 화려했다. 2016년 4월13일 시즌 피날레에서 브라이언트는 유타 재즈를 상대로 NBA 시즌 최고인 60점을 득점했다. 은퇴 경기에서 60점을 기록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당시 그의 나이 37세 234일이었다. 그는 한 경기에서 60점 이상을 득점한 최고령 선수로 기록됐다. 레이커스는 그 시즌에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악의 기록인 17승 65패의 기록으로 시즌을 마쳤다.
■ 코비 커리어 하이라이트 및 수상
5회 NBA 챔피언 (2000–2002, 2009, 2010)
2회 NBA 파이널 MVP (2009, 2010)
1회 정규시즌 최우수 선수 (2008)
18회 NBA 올스타(1998, 2000–2016)
4회 NBA 올스타 게임 MVP (2002, 2007, 2009, 2011)
11회 All-NBA 퍼스트 팀(2002–2004, 2006–2013)
2회 All-NBA 세컨드 팀(2000, 2001)
2회 All-NBA 써드 팀(1999, 2005)
9회 NBA 올 디펜시브 퍼스트 팀(2000, 2003, 2004, 2006–2011)
3회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2001, 2002, 2012)
2회 NBA 득점 챔피언(2006, 2007)
NBA 슬램덩크 콘테스트 챔피언 (1997)
NBA 올 루키 세컨드 팀 (1997)
NBA 75주년 기념 팀
등번호 8번과 24번은 레이커스가 영구결번함
Photo by Steve Lanctot. This file is licensed under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2.0 Generic license.
■ AI가 쓴 코비 관련 기사
NBA 레전드 코비 브라이언트는 LA 레이커스의 새로운 왕조 시대를 이끌며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 그는 농구 게임에 독특한 접근 방식을 도입한 인물이다.
필 잭슨 감독은 1999년에 레이커스의 감독이 되었고, 그의 지도하에 코비 브라이언트는 최고의 NBA 슈팅 가드 중 한 명이 되었다. 늘 불화속에 있었던 그의 팀 동료인 섀킬 오닐과 코비는 무적의 듀오가 되었다.
레이커스에서 두 번째 시즌에 브라이언트는 1998년 올스타전 선발 스몰 포워드로 선정됐다. 19세에 NBA 역사상 최연소 올스타가 되었던 것. 코비 브라이언트는 일찌기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으며 두 번째 시즌 만에 NBA 올스타 게임에 선발되어 역대 최연소 올스타가 되었다.
이후 그는 레이커스가 5차례 우승(2000-02 및 2009-10)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2009-10 시즌에는 25,000점을 기록한 최연소 선수가 되었다. 그는 또한 프랜차이즈 역사상 역대 최고 득점자가 되었다.
레이커스에서 20년을 뛰는 동안 5번의 NBA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올스타 18회 선정의 코비 브라이언트는 그의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농구 선수 중 한 명으로 기록됐다.
브라이언트는 2006년 1월 토론토 랩터스를 상대로 81점을 올리며 1962년 윌트 체임벌린의 100점 득점에 이어 리그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한 경기 득점 기록을 세웠다. 그는 진정한 농구의 장인이었다. R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