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오펜하이머 스틸컷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보다 ‘오펜하이머’가 더 선호되어 바람직하게 생각했다. 분명 생각하지 못했다. 지루하고 긴 영화를 이렇게 많은 한국 관객이 볼 줄이야. 하지만, 작품의 분량만을 관건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관이 화두일 테다. 그 화두가 누구에게 어떻게 공감을 더 얻고 있는가가 결과를 다르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펜하이머’를 나름 주목한다.
우선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먼저 살펴보자. 사실상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콘크리트 디스토피아’를 담고 있다. 사회적 가치 면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과 ‘설국열차’를 퓨전 시키고 있다. 배경이 아파트로 바뀌었을 뿐이다. 결말은 해피엔딩 같지만, 또 다른 우울감을 내포하고 있다. 마지막 장면을 대하면 매우 낭만적인 나르시시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도시 자체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없기 때문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처럼 아파트를 그린다면 도시 자체에 약탈적이다. 프로이트는 일갈한 바 있다. 루소처럼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해봤자 그곳에는 낙원이 아니라 또 하나의 지옥이 있다고 말이다. 그 지옥은 바로 인간 사이 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프로이트는 그의 저서 ‘문명과 불만’에서 지적했다. 설국열차를 탈출한다고 파라다이스가 펼쳐지지 않는 것과 같다. 아파트를 버린다고 당장에 낙원이 펼쳐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아파트에만 거주한 이들의 환상이다.
이제 앞에서 언급한 세계관을 비교해보자.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역시 한국 콘텐츠의 스토리답게 내러티브의 나열이 중심이고 개인의 실존적 고민과 선택이 덜하다. ‘오펜하이머’는 핵무기 개발 과정을 다루고 있지만 ‘오펜하이머’는 개인의 번민과 갈등을 잘 담고 있다. 여기게 내로라하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첨예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결정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그들은 결국 미국과 세계를 구하기 위해 진정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지 치열하게 논쟁하고 다툼을 했다. 이 영화의 미덕은 스스로 믿고 있던 가치가 믿음대로 이뤄지지 않은 현실을 목도(目睹)하는 현실이 펼쳐진다. 아직도 핵폭탄이 만든 세상은 과거형의 종결이 아니라 진행 중이며 미래형이다. 이제 핵무기를 둘러싼 믿음 체계는 오펜하이머와 당대의 과학자들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더구나 미래 관점에서 핵무기는 한국인들에게 분리될 수 없는 현재이자, 미래의 오브제이다.
이번 영화를 통해 오펜하이머는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라는 점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과거 2차 세계대전 당시 온갖 비판에도 오펜하이머가 핵무기를 개발했기 때문에 일본은 미국에 즉시 항복했고, 한반도는 광복을 맞이했다. 하지만, 미국의 통제를 받으며 일본은 물론이고 핵무기 개발을 단독으로 할 수 없었다. 북한은 오히려 이런 빈 공백을 이용해 줄기차게 핵무기 개발을 해왔다. 하지만 미국 통제 밖의 북한은 이와 반대였다. 오랜 세월 지나고 보니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멈출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낭만파 시인의 긍정적 편향과 같았다.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위해서 전략적 은폐나 위장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핵무기만이 생존을 위해 필요했다. 남한이 이에 대응하는 방법은 당연히 핵무기 무장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 여론은 다르고 개인도 번민하고 갈등한다. 과연, 핵무기를 무장하는 것이 우리의 평화를 보장해 줄까? 오히려 더 큰 전쟁 그로 인한 고통과 불행을 불러오지 않겠는가 싶다. 일본의 핵무장 명분을 통해 더 큰 식민 시대가 열리는 게 아닌지 우려가 엄습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세계관의 공감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감정이입과 동일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현대의 콘텐츠일수록 관객이 예전의 역사적 인물에 지금의 고민과 화두로 몰입하게 한다. 즉 관객들은 모두 오펜하이머가 된다. 핵무기를 통해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오펜하이머, 한반도 평화를 남한의 핵무장으로 극복할 수 있을지 관객들은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어쨌든 우리는 복잡한 관계 속에 우리는 뛰어들어야 한다. 오로지 실현적 액션만이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처럼 도망하고 무책임하면 유토피아가 아니라 어디든지 디스토피아뿐이다. 관계 근육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것은 역동적 체계 속에서 이뤄지는 선택과 행동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보다 ‘오펜하이머’가 더 선호되어 바람직하게 생각한다. 아파트의 질서는 계속될 것이며 안에서 복잡한 관계를 뚫어갈 무기가 여전히 필요하다. 핵무기라는 거대한 담론만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은 선택하고 행동해야 하지만 그 결과를 알 수 없는 일에 둘러싸여 있다. 그런 점이 하나의 메타포로 오펜하이머에 더 집중하게 한다.
*기고받은 외부 칼럼은 자사의 방향성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