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널리스트 투데이는 한국의 스포츠영웅 100인을 소개하는 K-Sports 100: Korea's Best라는 제목의 코너를 시작한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손기정이다.
조선의 언론은 일장기를 보이지 않게 하거나 흐릿하게 하여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획득 소식을 보도했다.
K-Sports 100: Korea's Best (1) - 손기정
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받았을 당시 한국은 일제 강점기였다. 그는 조선인이기에 일본인들의 차별을 받아야 했다. 당시 일본 여론은 1932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에 조선인 김은배(6위)와 권태하(9위)가 일본을 대표해 출전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는 일본인을 출전시키자는 데 모아졌다.
하지만 양정고보생 손기정의 놀라운 기록을 일본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12일자에 따르면 손기정은 ‘갸날픈 몸, 누가 보든지 튼튼하지 못한 몸’의 마라토너였다. 그런 그가 올림픽이 열리기 1년 전인 1935년 3월 21일, 4월 3일, 4월 28일, 5월 18일, 9월 29일, 10월 20일, 11월 3일에 열린 마라톤 대회의 풀코스를 완주했다. 이는 '기이하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놀라운 완주 기록이었다.
이 완주 기록 중 11월 3일 메이지신궁대회에서 손기정은 2시간26분41초를 기록했는데 이는 공인 세계신기록이었다. 당시 마라톤에서 2시간30분은 마의 벽이었다. 손기정은 이전에도 30분 벽을 깼지만 공인 기록으로 인정 받지 못하다가 마침내 이 대회에서 공인 세계 신기록 보유자가 됐다.
매일신보사는 1935년 11월 05일자 기사에서 “조선의 손기정 선수가 단연 우승하였는데 그 기록은 세계 최고의 경이적 기록”이라고 보도했다.
당시 메이지신궁대회에서 챔피언에 오른 손기정은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를 들으며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렸다고 한다. 일본의 호치(報知) 신문(1935년 11월4일 자)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표창대 위에 올려진 손군은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고개를 숙이고 스탠드의 관중이 부르는 국가에 묻혀 조용히 눈물짓고 있었다.” 손기정은 그러나 감격의 눈물이 아니라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 손기정 기념관에 따르면 당시 그는 국가 연주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양정응원단석 바로 밑 필드에 있던 인솔교사 김연창에게 달려가 우리말로 “선생님! 선생님! 왜 우리나라는 국가가 없습니까? 어째서 ‘기미가요’가 조선의 국가입니까?” 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일본은 손기정의 올림픽 출전을 원치 않았지만 공인,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여러 차례 세우는 등 당대 최고의 마라톤 스타였던 그를 제외하기는 불가능했다. 당시 세계 신기록을 여러 차례 세웠던 역도의 남수일, 올림픽 메달이 유력했던 레슬링의 황병관 등은 일본 대표로 뽑히지 못했는데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는 마라톤 종목은 일본도 조작을 할 수 없었다.
1936년 6월4일 올림픽 출정을 앞두고 서울역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의 모교인 양정고보 전교생과 교직원들, 조선 육상관계자, 일반 승객으로 인해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AP 통신은 당시 보도에서 한국인들은 농업,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마라톤이란 경기 자체와 올림픽이 무엇인지 잘 몰라 손기정의 출정과 이후 금메달 획득은 그들에게 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도했지만 이는 한국을 잘 모르고 쓴 기사였다. 손기정은 마라톤 일본 대표로 함께 뽑힌 남승룡과 함께 조선인들의 환호 속에서 대륙 횡단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들은 6월8일 소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만주리(滿洲里)에 도착했고 여기서 시베리아 철도로 갈아타서 모스크바까지 8일 동안 긴 여행을 했다. 그리고 6월14일 밤 그들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이후 그들은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거쳐 17일 아침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역에 도착했다. 2주 동안 기차를 타고 베를린에 도착했다.
베를린 선수촌에 도착한 손기정은 외국인들이 어디에서 왔냐고 물으면 반드시 “KOREA에서 왔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는 마라톤 세계기록 보유자였기에 사인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한국어로 사인을 했다. 이는 일본 선수단에 살짝 이슈가 되었지만 선수단은 세계 신기록 보유자인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영화 ‘1947 보스턴’에서 소개돼 한국 팬들에게도 잘 알려지게 된 미국의 전설적인 마라토너이며 손기정 선수의 친구 존 켈리는 “손기정은 단호했다. 그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인이라고 밝혔다. 그는 누구에게나 ‘Me Korean……not Japanese’라고 말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1위로 피니시라인을 통과하고 있다. Sohn Kee-chung coming in 1st at the Berlin Olympics in 1936. 사진 - Public Domain.
1936년 8월 9일, 42.195km를 달리는 베틀린 올림픽 마라톤이 열리는 날이었다. 오후 3시, 세계 각국에서 모인 세계적인 마라토너 56명이 출발선에 모여들었다. 메인 스타디움에는 약 9만명의 관중이 있었다. 총성이 울렸고 손기정은 2시간 29분 19초 2의 올림픽 기록으로 1위로 테이프를 끊었다. 국제공식대회에서 처음으로 기록한 2시간20분대였다.
손기정의 올림픽 '마라손당시에는 이렇게 표현' 금메달 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은 집에서 뛰쳐나와 환호했다. 서울 광화문에 자리 잡은 동아, 조선, 조선 중앙 등 각 신문사 앞에 마련된 속보판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고 조선인들은 그 앞에서 기뻐했다.
조선중앙일보는 '영원히 기록될 손기정의 장거로 '젊은 조선' 의기충전'이라는 제목의 1936년 8월11일자 기사에서 "손기정 군의 마라손 제패는 2천300만 동포의 열렬한 성원 하에 드디어 그 숙원을 이르고만 베를린으로부터의 기쁜 소식은 이 강산 천리방방곡곡 골고루 사무치고 패권을 잡게 하는 동시에 우리 겨레의 피와 혼을 모아 '올림피아'의 불타는 성화 밑에 이 민족이 꿈의 볼거리는 근육과 골격의 약동을 여실히 제사드리는 손 군의 장거야말로 우리의 자랑이 아니면 무엇이며 세계의 자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라는 감격의 기사를 톱뉴스로 올렸다.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사장을 맡았던 조선중앙일보는 이틀 후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신문에 실은 후 “사원의 잘못으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가 뚜렷하지 않은 점을 반성하고 자진해서 휴간한다.”고 발표했고 이후 조선총독부로부터 발행권을 취소당하고 말았다.
조선중앙일보 외에도 당시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금메달, 동메달 획득 소식은 모든 조선의 언론이 일제히 보도했는데 동아일보는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당시 사진에 일장기를 지우고 사진을 전체적으로 흐릿하게 하여 발행해 이길용 체육주임기자, 사회부장 현진건, 잡지부장 최승만, 사진과장 신낙균, 사진제판기술자 서영호 등은 조선총독부에 연행돼 40일 동안 심한 고문을 받았다.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받은 후 손기정은 히틀러를 만났다고 한다. 미국의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잡지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손기정은 기자회견에서 용감하게 자신은 일본인이 아니며 그의 진짜 이름은 기테이 손이 아닌 손기정임을 주장했지만, 일본 통역사는 이를 제대로 통역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세상은 작은 나라의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기정은 대담하게 히틀러를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고, 놀랍게도 그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히틀러 앞에서 그는 진심을 말하지 못했다. 히틀러는 손기정에게 '당신 나라로 돌아가 스포츠를 촉진하라'고 권장했고 손기정은 이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다. 손기정은 "제가 하려던 말은 '미스터 히틀러, 나는 나라가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손기정은 '히틀러가 어차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말하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손기정, 남승룡 선수는 우승 후 일본 동경으로 귀국했지만 일본인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당시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 제대로 된 환영회는 열리지 않았다. 조선반도가 들썩거렸지만 독립 운동으로 이어질 것으로 우려한 일본인들의 방해 작업이 있었던 것이다.
디트로이트 프리프레스의 AP 기사.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는 1936년 9월27일자 기사에서 서울발 AP 기사를 다음과 같이 실었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의 기테이 손, 한국 아들의 눈부신 승리는 도쿄에 있는 일본 황실의 주의를 필요로 하는 식민지에서의 정치적 여파를 가져왔다. 일본의 통치 하에서 오랫동안 억압된 한국인의 인종적 자부심은 올림픽에서의 가장 큰 개인전 승리의 소식과 함께 다시 한번 경험되어졌다. 한국은 1910년에 일본에 병합되었다. 손 기테이의 승리와 베를린에서 미국의 압도적인 성공에서 흑인 선수가(제시 오웬스를 지칭) 차지한 역할 사이에는 눈에 띄는 유사점이 있었다. 베를린 마라톤 결승의 사진이 서울로 도착하자, 한국 신문사 편집자들은 승리자의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지웠다. 식민지의 일본 통치자들에게 이는 심각한 반란이었다. 이런 일을 한 신문사들은 무기한으로 출판 정지를 당했다. 주요 신문사 외에도 작은 한국 일간지도 동일한 일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세 명의 편집자가 잡혀갔다.”
위 내용은 다른 미국 언론에서도 일제히 다뤘다. 각 언론사에 기사를 보내는 통신사인 AP는 그러나 기사 끝부분에 손기정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의 ‘선진 교육(?)’을 받은 혜택 받은 사람처럼 묘사하고 한국인들을 올림픽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처럼 표현해 아쉬움을 남겼다.
손기정(Sohn Kee-Chung)은 오랫동안 일본인 이름 Kitei Son으로 알려졌다.
올림픽은 지금까지도 손기정을 Kitei Son으로 기록하고 있다. 살아생전 손기정은 이에 대해 마음이 좋지 않았다. LA 타임스는 1986년 8월16일 기사에서 미국 캘리포니아주 컬버시티 참전 용사 기념관(Veteran's Memorial) 앞에 있는 손기정의 동판을 Kitei Son이 아닌 Sohn Kee-Chung으로 수정한다고 보도했고 실제 그렇게 되었다. LA 타임스는 손기정이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보도했다. 손기정은 당시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경력 중 가장 소중한 순간에 대해 언급하면서, "베를린에서 받은 1위의 영예보다 이 영예가 더 소중하다."라는 감동적인 발언을 했다. 그의 이러한 말은 스포츠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를 통해 그는 단순한 우승보다 그 이상의 가치와 의미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기정은 은퇴한 후 여러 우수한 대한민국 마라톤 선수들을 지도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그는 1947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인 서윤복, 1950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인 함기용, 그리고 1992년 하계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황영조를 지도했다. 손기정이 황영조의 역사적인 경기를 목격하기 위해 바르셀로나로 날아간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대한체육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에서는 개회식에서 올림픽 성화를 나르는 특권을 얻었다. 손기정은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한국일보사)’을 집필하였고, 그에게는 민간훈장 모란장이 수여되었다.
한국 최초의 스포츠 드라마 '맨발의 영광' 5부작은 1982년 KBS 1TV에서 방송했는데 손기정, 남승룡의 삶을 그려내는 드라마였다. 손기정 역은 배우 김영철이, 남승룡 역은 강태기가 연기했다.
2011년 영화 ‘마이웨이’에서 배우 윤희원이, 2023년에 영화 '1947 보스턴'에서 배우 하정우가 손기정 역할로 연기를 했다. 2023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서윤복이 우승을 차지한 보스턴 마라톤 이야기를 소개했는데 여기에 손기정 스토리가 주를 이룬다.
2002년 11월 15일, 손기정은 폐렴으로 90세의 나이로 세상과 작별을 고했고 세상을 떠난 후 대전국립공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