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널리스트 투데이는 한국의 스포츠영웅 100인을 소개하는 K-Sports 100: Korea's Best라는 제목의 코너를 진행 중이다. 그 여섯 번째 주인공은 최동원이다.
최동원. 사진 - 최동원 기념 사업회
[퀴즈] 다음 선수 중 메이저리그 야구팀과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은 최초의 선수는 누구일까?
1) 박찬호 2) 선동열 3) 최동원 4) 박철순 5) 이원국
많은 사람이 박찬호라고 생각하겠지만 정답은 3)번 故 최동원이다. 최초의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은 최동원1958년생은 그러나 미국 프로야구에서 뛰지 못하고 한국 야구의 레전드(전설)로 남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한국인 최초의 마이너리거 이원국. 사진 - Jvklee16
최초의 한국인 마이너리거
최동원, 박찬호 이전에 미국 야구와 가장 먼저 계약을 한 한국 선수는 퀴즈에 나오는 5번 이원국(현재 75세)이었다. 이원국은 그러나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지 못했다. 1968년 중앙고 출신으로 일본 프로야구팀에서 뛴 경력이 있는 이원국은 미국 프로야구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뛴 적이 있었다. 이원국은 1968년 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한국인으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마이너리거가 됐다.
미국 마이너리그에는 레벨별로 싱글A, 더블A, 트리플A가 있는데 이원국은 1968년 마이너리그 싱글A 프레즈노 자이언츠팀에서 뛰었고 7승 10패, 평균 자책점 3.94를 기록했다. 이원국은 1969년에도 싱글A 재수를 하며 중간계투요원 및 마무리로 나와 5승 5패, 8세이브, 평균 자책점 3.44, 102이닝, 106삼진으로 룰5 드래프트에 의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뽑혀 갔다. 이후 밀워키/몬트리올 공동산하 구단 더블A 잭슨빌 선즈에서 뛴 이원국은 4승 7패, 평균 자책점 3.71을 기록하고 방출됐고 멕시코 리그에서 11년간이나 활동하며 결국에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묘한 인연의 박철순
이원국이 물꼬를 튼 10년 후인 1980년, 연세대학교 투수 박철순(현재 69세)이 밀워키 브루어스와 역시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뛰었다. 박철순은 싱글A와 더블A에서 2년간 뛰었는데 마이너리그 통산 성적은 11승 12패, 평균 자책점 4.30이었다. 2년을 뛴 후 그는 한국 프로야구에 합류하고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박철순이 연세대 시절 중퇴를 하고 미국으로 갔던 이유는 동료 폭행 사건 때문이었는데 당시 폭행의 피해자는 바로 학교 동급생 최동원이였다.
박철순은 연세대 2학년이었던 1979년 3월, 4학년 선배의 지시로 동년배이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최동원을 야구 배트로 구타해 병원 신세를 지게 한 적이 있다. 당시 최동원은 전치 2주 진단을 받는 등 크게 다쳤고 곧이어 연세대 탈퇴를 선언했다. 스포츠팀에서 감독과 코치 또는 선수 간의 폭행이 당연시됐던 당시, 원시적인 운영에 저항했던 최동원과 그의 부친 최윤식 씨는 결국 학교 측에 사과하고 탈퇴 2개월 만에 복귀를 했다. 폭행당한 사람이 사과하는 희한한 광경이 연출됐다. 다음은 1979년 6월 5일 자 경향신문 기사다.
최동원은 80년대 한국 프로야구를 함께 이끌었던 박철순과는 이렇게 묘한 인연을 맺고 있다. 훗날 박철순은 메이저리그에서 1~3선발로 활약하는 류현진에 관해 이야기하며 "류현진은 정말 잘하는 선수지만 최동원, 선동열보다는 못한다"며 "류현진을 낮추는 게 아니라 앞으로 한국에서 두 분(최동원, 선동열) 같은 투수는 안 나온다는 뜻"이라고 언급하며 후배 최동원을 높이 추켜세운 바 있다. 박철순은 선수 시절 한국 프로야구 두산(OB) 베이스에서 레전드급의 투수로 주목을 받았다.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은 최초의 선수
이원국, 박철순이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지만, 최동원은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은 최초의 한국 선수로 기록됐다. 최동원은 1981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인터콘티넨털컵 대회에서 최우수투수 상을 받고 블루제이스와 메이저리그 25인 로스터에서 1981년 시즌을 시작하는 조항이 포함된 5년(1981년~1985년) 계약을 맺었다.
인터콘티넨털컵에서 최동원은 시속 150~152km의 빠른 공에 낙차 큰 커브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1981년 9월 23일 자 토론토 스타지 보도에 따르면 블루제이스 팜(마이너리그) 디렉터였던 엘리엇 웨일은 최동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최동원과 메이저리그 장기 계약을 체결했다. 최동원은 1982년 2월에 스프링 트레이닝에 참석할 예정이며, 1982년 메이저리그의 활동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릴 것이다. 그가 선발투수가 될지 구원 투수로 활용될지는 감독의 결정에 달렸다. 스카우트 웨인 모건과 밥 저크는 최동원이 지금 당장 메이저리그에서 투구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데 모두 동의한다. 우리는 이전에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 특히 모건은 8월 에드먼턴에서 열린 인터콘티넨털컵에서 그의 투구를 지켜봤다. 양키스와 다저스를 포함한 다른 팀들도 그에게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곧바로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 신문은 3명의 블루제이스 관계자가 한국에서 최동원의 경기를 지켜본 후 어떻게 테스트를 했는지 등을 상세히 소개했다. 토론토 신문은 “유일하게 계약을 방해하는 요소는 최동원의 한국 의무 군 복무 문제이지만, 한국 정부가 과학자와 엔지니어에게 한 예외조항을 운동선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전망했다.
정치 상황 때문에 MLB로 가지 못해
최동원은 그러나 계약을 맺고도 메이저리그에서 뛰지 못했다. 한국의 정치 상황 때문이었다. 다음은 한국 SBS-TV의 인기 방송인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한국 프로야구는 1982년 출범했어. 그 3년 전인 1979년 전두환은 12.12 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하고, 1980년에 광주 민주화운동을 총, 칼로 진압했어. 그리고 그해에 대통령 자리에 올랐으니, 권력은 잡았지만, 민심은 최악이었지. 그래서 전두환 정권은 '3S 정책'을 펼쳤어. Screen(스크린), Sex(성), Sports(스포츠)로 국민의 관심을 돌리고자 한 거야. 운동 경기만큼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게 없지. 전두환은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유치에 뛰어들었고, 82년에 프로야구도 출범시켰어. 그렇게 당시 6개 프로야구 구단이 만들어진 거야. 이럴 때 필요한 건 인기선수였고, 당연히 최동원이 순순히 메이저리그에 가게 놔두지 않았던 거야. 결국, 최동원은 고향 부산이 연고지인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어. 최동원은 모두의 예상대로 롯데 자이언츠의 간판 투수가 됐어.”
MLB 계약 후 스프링캠프에 불참
1982년 3월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에 최동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캐나다 가제트 지는 1982년 3월 12일 자 기사에서 “한국 출신의 파이어볼러(강속구 투수) 최동원은 스프링캠프에 모습을 보여야 했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블루제이스 구단에 따르면 한국 정부가 그에게 한국을 떠나지 말라고 압박을 가하는 상황인 것으로 나타났다.”라고 보도했다.
다음은 박동희 야구계 대기자가 최동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메이저리그행이 좌절된 이유를 밝혀낸 것이다. 최동원은 이 인터뷰에서 “(1981년 어느 날) 아버지가 전화 한 통을 받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 한다.
"전화통화를 하는 아버지 표정이 무척 심각했다. 전화를 끊으셨을 때 '누구세요?'라고 물었더니 '모처'라고만 답하셨다. ‘모처’에서 걸려온 전화 내용은 만약 토론토와의 계약이 사실일 경우 내 신분이 아마추어에서 프로가 되며, 조만간 있을지 모르는 병역 혜택 대상자에서 제외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병역 미필자로 남아 메이저리그에도 진출하지 못하고, 실업야구에서도 뛸 수 없는 야구계의 영구 미아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모처'의 사람은 아버지께 ‘우리 조언을 듣고 자중하는 게 아들을 살리는 길’이라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며 '만약 최동원이 메이저리그 계약을 뒤로 미루고 내년(1982년)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야구 선수권대회에 나가 한국 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끌어준다면 우리가 무슨 수를 쓰든 최동원의 메이저리그행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때 아버지는 토론토와의 계약을 부정하고, 병역 혜택 대상자가 된 후 다시 미국행을 추진하자는 말에 동의했다.”
당시 최동원의 에이전트였던 그의 부친 최윤식 씨가 1982년 1월 12일 토론토와의 계약은 ‘가계약’이었다고 무효를 선언했다. 최윤식 씨는 ‘모처’의 가이드를 그대로 따랐다. 놀랍게도 한국은 1982년 세계야구 선수권 결승전에서 일본을 극적으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고 최동원은 병역 혜택을 얻게 되었다. 더운 놀라운 사실은 그 병역 혜택이 향후 5년간 아마추어에서 뛰어야만 유지되는 것이었다. 프로로 가면 병역 혜택은 사라지는 것이었다. 정부 기관으로 보이는 ‘모처’에서 약속한 것은 절반만 이행되었다. 사실상 절반도 아니었다. 최동원은 병역 특례를 받으려면 메이저리그는커녕 1982년부터 시작된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뛸 수 없게 되었다.
다행인지 당시 한국 프로야구(KBO)의 총재가 서종철 전 국방부 장관이었고 그의 제안으로 병역특례자가 프로야구에서도 뛸 수 있도록 법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병역법에 '해당 분야에서 5년간 지정된 근무지에서 계속 근무하지 않으면 병역특혜를 취소한다'라는 문구는 그대로 있었고 ‘지정된 근무지’는 국내 프로야구 구단이라는 유권 해석이 나오면서 최동원의 메이저리그행은 결국 불발되고 말았다.
출처 - 경향신문
정치인들이 인재의 앞길을 막는 한국
한국의 리더들은 최동원과 같은 걸출한 스타를 외국으로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당시 프로야구는 앞서 소개한 것처럼 대통령 라인에서 관리하고 있었기에 최동원의 메이저리그행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계약을 맺었던 블루제이스 측은 최동원에게 1982년, 83년 2년 연속 스프링캠프 참가 항공권을 보낸 바 있다. 그리고 이 구단은 최동원이 롯데 자이언츠와 계약을 하자 "명백한 이중 등록이고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라고 선언했고 메이저리그 커미셔너가 직접 서종철 KBO 총재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서 총재 측은 병역법을 들며 양해를 구했지만 사실상 최동원을 메이저리그로 보내지 않고 한국에서 활용하기 위한 한국 측의 꼼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 총재가 이 꼼수 작전에 직접 가담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블루제이스의 부사장이었던 팻 길릭은 1983년 8월 2일 토론토 스타지와의 인터뷰에서 "롯데 구단은 최동원과 우리가 계약을 맺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최동원과 계약을 했고 이는 계약 위반이다. 우리는 KBO 총재로부터 최동원과 한국 프로야구팀과의 계약을 승인하지 않겠다는 확인을 받았음에도 지금 그는 롯데에서 뛰고 있고 서 총재는 이를 막을 수 없었다고 우리에게 말했다"라고 설명했다. 블루제이스 구단은 한국 변호사를 고용하며 계약 위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최동원의 미국행은 불발되었고 그의 이름은 여전히 선수 명단에 남게 되었다.
사이영상과 비슷한 최동원상
메이저리그에 사이영상이 있는 것처럼 한국에는 최동원 상이 있다. 최동원 상은 KBO 리그에서 매년 투수 중에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에게 주어지는 상으로 2014년부터 시상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메이저리그에 가지 못했던 최동원은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레전드로 손꼽히는 활약을 했다. 특히 1984년 한국 시리즈에서 기록한 4승의 기록은 전무후무의 대기록이다.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 최동원은 이듬해인 1984시즌에 무려 51경기에 등판해 14차례 완투하며, 27승(9선발 승 6세이브 13패)과 223탈삼진, 2점대 평균 자책점으로 MVP, 다승왕, 탈삼진왕에 올랐다. 정규 시즌에 그렇게 많은 경기에 나왔음에도 그는 한국 시리즈에서 1차전 완봉승, 3차전 완투승, 5차전 완투패, 6차전 구원승, 7차전 완투승을 기록했다. 한국 시리즈 5경기 등판에 40이닝, 610구, 평균 자책점 1.80, WHIP 1.08, 탈삼진 35개, 피안타 32개, 4승 1패의 신화적인 기록을 낸 것이다. 그는 구단을 위해 온몸을 바쳐 희생했다.
최동원에게 늘 관심을 보였던 토론토 스타지는 ‘코리안 파이어볼러’의 맹활약 소식을 소개할 정도로 대단한 활약이었다. 이 신문은 1985년 7월 28일 기사에서 모건 스카우트의 말을 인용, “최동원은 지난해 총 31승을 거뒀는데 27승은 정규 시즌에, 4승은 플레이오프에서 거둔 것”이라고 전했다. 토론토 최대 일간지인 토론토 선지는 2001년 일본 야구의 영웅 이치로 스즈키 영입전에서 블루제이스가 성공을 거두지 못한 후 과거 최동원 영입과 관련된 상세한 내용을 소개하며 ‘블루제이스는 동양 선수들과의 경험이 좋지 않다’라는 칼럼을 게재하기도 했다. 블루제이스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최동원을 영입하지 못했던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던 일이었음이 이 칼럼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최동원은 1988년까지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총 218경기에 등판, 완투를 79차례나 기록했다. 완투율이 무려 75%였다. 완봉은 15회였다. 자이언츠에서 통산 성적은 96승 67패, 평균 자책점 2.27, 1292와 2/3이닝, 탈삼진 986개였다.
그렇게 혹사를 당했던 최동원은 1988년 시즌 후 충격적인 트레이드를 당하게 된다. 프로의 비정함을 느끼게 하는 트레이드였다. 최동원은 당시 선수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선수협(일종의 선수 노조) 창설을 시도하는 데 앞장섰는데 이것이 롯데 구단의 눈 밖에 났고 그는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됐다. 그 충격으로 인해 최동원은 야구에 대한 의욕이 상실되었고 그의 투수 인생은 하향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최동원은 최초로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은 한국인 투수, 한국 시리즈 4승, 완투율 75%, 그리고 선수협 창설을 이끈 한국 야구 역사에 길이 남는 전설이었다. 그가 선수협 창설을 시도했던 이유는 동료 선수들의 복지를 진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같이 운동을 하던 선수(해태 타이거스의 김대현)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도울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연습생 선수들의 최저 생계비나 선수들의 경조사비, 연금 같은 최소한의 복지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선수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연봉 1억을 받기 때문에(당시로는 엄청난 금액) 선수협이 필요 없었지만, 힘들게 지내는 동료 선수들을 위해 선수협 창설을 추진했다고 최동원은 설명했다.
당시 최동원의 선수협 법률자문을 맡았던 이는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문재인 변호사였다.
최동원이 남긴 것
최동원은 지난 2011년 9월 14일 54세의 나이에 지병인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16일 후에 롯데 자이언츠는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최동원의 등 번호 11번을 영구 결번으로 하기로 했다. 롯데는 최동원에게 엄청난 빚을 진 구단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영화 ‘퍼펙트게임’은 최동원과 선동열의 ‘세기의 맞대결’(1987년 선발 맞대결로 연장 15회까지 4시간 56분 소요)을 다룬 작품으로, 배우 조승우가 최동원 역을 연기했고 선동열 역은 배우 양동근이 맡았다. 이 영화는 2011년 개봉된 바 있다.
최동원과 관련된 이야기는 결국 한국의 지도자들은 자국민의 성장과 발전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에만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아쉽게도 80년대나 지금이나 별반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느낄 것이다.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 최동원 그리고 선동열은 메이저리그에서 구체적인 영입 의사가 있었는데도 세계 최고의 무대를 밟지 못했고 이는 결국 지도자들의 문제였다.
1985년 양키스가 50만 달러의 계약금을 제시하며(당시 마크 맥과이어도 13-14만 달러의 계약금을 받았던 시절) 선동열 영입 의사를 밝혔지만, 그는 미국행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최동원과 같은 '해당 분야에서 5년간 지정된 근무지에서 계속 근무하지 않으면 병역특혜를 취소한다'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선동열은 훗날 채널A와의 인터뷰에서 “메이저리그에 가고 싶었다. 군 문제도 있었고 한국 프로야구에 FA 제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여러 제도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병역 혜택을 못 받은 것도 아니고 국내의 ‘이기적’ 제도 때문에 두 슈퍼스타가 세계 무대에서 한국 야구를 알릴 기회를 놓쳤다.
최동원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불의와 늘 싸웠다. 그는 학교폭력에 저항했다. 그리고 무명 선수들의 복지에 신경 썼다. 구단의 부당한 계약조건에 한 명의 노동자로서 맞서 싸웠다. 그런데 그는 늘 유난을 떠는 사람으로 여겨졌고 오해도 많이 받았다. 그와 그의 부친은 늘 외로운 싸움을 했다. 학교폭력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졌던 70년대에 학폭에 거세게 저항했던 최동원. 그는 단순히 마운드 위에서의 파이어볼러가 아니라 당대의 불의에 저항한 불의(fire) 영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