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널리스트 투데이는 한국의 스포츠영웅 100인을 소개하는 K-Sports 100: Korea's Best라는 제목의 코너를 시작한다. 그 세 번째 주인공은 김득구다.
한국 복싱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3인: 홍수환, 장정구, 유명우
한국 복싱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을 꼽으라면 홍수환, 장정구, 유명우 등의 이름이 거론된다.
홍수환은 1970년대 최고의 한국 스포츠 스타다. 1977년 엘비스 프레슬리가 세상을 떠난 그해 홍수환은 중앙아메리카의 파나마로 날아가 ‘지옥에서 온 사자’라는 헥토르 카라스키야를 만났다. 이 경기에서 홍수환은 다운을 4번 당하고도 극적인 KO승을 거두고 WBC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이 됐다. 당시 필자는 흑백 TV로 생중계를 지켜봤다.
홍수환은 이 경기 초반에 4번이나 다운이 됐다. 지금같으면 레프리에 의해 경기가 중단되는 상황이었다. 홍수환은 그러나 3회에 카라스키야를 몰아세워 KO로 승리했고 그 유명한 4전5기의 신화를 창조했다. 홍수환은 금세 전 국민의 영웅이 됐다. 이전에도 세계 챔피언으로서 유명세를 탔지만 4전5기 승리는 그를 국민 영웅으로 올려놓았다. 홍수환은 이에 앞서 1974년 세계 챔피언이 됐을 때 한국에 계신 모친과의 전화통화에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명언을 남겨 유명해진 바 있다.
한국 복싱 역사 획을 그은 또 다른 선수는 장정구다. 라이트 플라이급의 장정구는 1983년 세계 챔피언이 된 후 1988년 15차 방어전을 치른 후 타이틀을 반납했다. 15차 방어전에 성공한 그는 2002년 20세기를 빛낸 복서 중 한 명으로 뽑혔을 정도로 대단한 복서였다. 한국 복싱사에 남을 또다른 선수는 바로 유명우다. 펀치는 강하지 않았지만 속사포 타법으로 1985년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이 된 유명우는 1991년 일본의 이오카 히로키에 패할 때까지 무려 18차 방어전까지 치렀다. 그는 이후 이오카에 타이틀을 다시 빼앗고 은퇴했다.
’링 위의 비극’이라고 제목으로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가 커버 스토리로 김득구, 맨시니 경기를 보도했다.
세계 복싱 팬들의 뇌리에 지금도 남아 있는 김득구
홍수환, 장정구, 유명우는 한국의 올드팬들에게는 영웅이지만 외국 복싱 팬들 중에는 이들을 아는 팬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금자탑을 세운 한국 복싱의 영웅이지만 세계 복싱 팬들의 뇌리 속에 강력히 남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 선수는 바로 ‘무명’ 김득구였다. 1982년 11월13일(한국은 1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야외 특설링에서 중요한 복싱 경기가 열렸다.
한국은 14일 일요일이었고 꽤 많은 한국인들이 TV 브라운관 앞에 앉아 생중계되는 이 경기를 지켜봤다. 미국(CBS-TV)도 한국(MBC-TV)도 이 경기를 전국 생방송으로 송출했다. CBS-TV의 방송 크루는 팀 라이언, 전설의 복서 슈거 레이 레너드, 길 클랜시였다. 2023년 복싱 중계캐스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라이언은 자신이 중계한 경기 중 알리-프레이저의 대결과 함께 김득구-맨시니 전을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USA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라이언은 경기 내내 '붐붐 맨시니' '득구 킴'을 외치며 열정적으로 이 경기를 중계했다.
김득구는 당시 유명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미국 오하이오주 영스타운 출신인 백인스타 레이 맨시니와 경기를 하고, 미국 라스베이거스 특설링에서 펼치는 경기가 생중계된다고 하니 TV 수상기 앞에 앉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 경기가 한국인들과 전 세계 복싱팬들의 마음속에 깊이 남는 그 무엇이 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김득구는 당시 세계 랭킹 1위에 올라 있었지만 맨시니의 프로모터가 맨시니에 쉬운 상대를 붙이기 위해 무명 김득구를 1위로 올렸다고 한다. 이에 대해 프로모터 밥 애럼은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당시 라스베이거스 도박사들은 맨시니의 승리 확률을 9대1로 예상했다. 김득구는 예상 외로 ‘붐붐’이라는 별명의 맨시니와 혈투를 벌였다. 처절하다고 할 정도의 혈투였다. 김득구는 15라운드 경기에서 선전을 하다가 14라운드에 다운을 당했고 이후 뇌사 상태에 빠져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쓰러진 직후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데저트 스프링스 병원으로 실려간 김득구는 2시간30분에 걸친 뇌수술을 받았다. 이 수술을 집도한 라니 해머그렌(Lonnie Hammargren)은 수술 후 김득구는 뇌사 상태라고 밝혔다. 그는 "오른쪽 뇌가 혈전으로 가득했고 그 혈전을 제거했지만 생명을 살리는 시스템이 죽어 있다"라고 전했다.
죽음이 아니었다면 경기 자체가 명승부
복서가 사망했기에 유명해진 경기이기도 하지만 사실 당시 경기는 명승부 그 자체였다.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WBA 라이트급 챔피언 '붐붐' 맨시니를 상대로 김득구는 놀라운 투혼을 펼치며 미국 땅에서 한국 복싱 선수의 첫 승리를 기대케 할 정도로 선전했다.
김득구는 그러나 경기 후반이 힘이 빠져 일방적으로 맞았고 정신력으로 버티다가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차라리 정신력이 낮았으면 사망까지 이르지 않았을텐데 이기겠다는 강인한 정신력이 참사로 이어지게 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LA타임스는 1982년 11월14일자 기사에서 당시 경기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맨시니와 김득구는 경기 내내 머리에 치명적인 좌우 펀치를 날리며 서로를 누르려고 했다. 후반부에 두 선수는 피곤에 지쳐 서로를 클린치를 자주 했고 두 선수는 몸통 펀치로 전략을 바꿨다. 11라운드에서 맨시니의 오른손 펀치에 김득구가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김득구는 체력을 회복할 때까지 맨시니를 잡아끌었다. 결국, 25승1패의 전적을 가진 맨시니는 14라운드 시작과 함께 모서리에서 달려나와 김을 비틀거리게 한 왼손 펀치를 날렸다. 그리고 오른손 펀치로 김을 쓰러뜨렸다. 심판 리처드 그린은 김득구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자 카운트 4에서 중단하고 맨시니를 승자로 선언했다."
김득구는 쓰러진 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많이 아파했다. 충격적인 일이었다. 일요일 황금 시간에 열광하며 보던 경기의 한국 선수가 사망에 이르렀다는 것은 많은 사람을 정신적 트라우마로 이어지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득구의 사망은 필자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줬다. 타인의 죽음에 그렇게 마음이 아팠던 것은 개인적으로 처음이었다.
복싱 링에서의 비극은 복싱 규정 개혁을 위한 국제적 운동을 촉발시켰다. 김득구의 죽음은 세계 복싱의 전환점이 되었고 그 이후로 시합 중 권투 선수를 보호하는 안전 조치와 관련하여 규정이 강화되었다. 이후 언론은 ‘무명’ 김득구를 집중 조명했다.
김득구
가난에서 벗어나는 방편으로 복싱 시작
그는 1956년 8월10일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가난에서 벗어나는 방편으로 그는 복싱을 택했다. 김득구는 열심히 훈련했고 한국 챔피언, 동양 챔피언이 되어 세계 무대에 나갈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맨시니와의 경기에서 뇌 가격으로인한 뇌 혈종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김 선수는 경기 직후 급히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혼수상태에 빠진 뒤 깨어나지 못하고 나흘 만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팬들을 더욱 안타깝게 한 것은 김득구의 어머니(양선녀 씨)가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 우울증에 빠졌다가 3개월 만에 "내가 가난해서 아들이 복싱을 시작했다. 결국 내가 아들을 죽인 것이다"라고 쓴 유서를 남긴 채 농약을 마시고 극단적 선택을 한 일이었다.
또한, 당시 경기 심판이었던 흑인 리처드 그린은 선수가 위험한 상태임에도 계속 시합을 강행시켰다는 비난을 받고 김득구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7개월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상대 선수 맨시니는 김득구의 죽음으로 인한 죄책감으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이후 제대로 된 자기 스타일의 복싱을 하지 못했다. 원래 패기 넘치는 복싱 스타일을 구사하며 오랜만에 나온 백인 스타로 각광을 받았던 맨시니는 사망 사건 이후 치고 빠지는 히트 & 런 전법의 조심스러운 복싱으로 스타일을 바꿔 이전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맨시니는 "그 시합 이후로는 복싱이 싫어졌고 링에 오르는 것이 괴로웠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당시 맨시니는 “복싱 선수들은 100만달러를 벌기 위해 생명을 담보로 싸운다. 하지만 막상 내가 싸운 선수가 사망을 하니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아 나도 은퇴를 할지 고민해야했다”라고 말했다.
레이 맨시니
하늘에서 그를 만나면 아무말 없이 안아주겠다 - 맨시니
맨시니는 김득구를 소재로 한 영화 '챔피언'이 개봉했을 때 한국을 찾았는데 당시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만약 하늘에서 김득구와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해줄 것이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눈물을 글썽이며 "아무 말 없이 끌어안아 주겠다"는 말로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김득구는 당시로는 미국 언론에 가장 자주 이름이 올랐던 스포츠 선수였다. 거의 모든 미국 언론은 일제히 그의 사망 소식과 관련된 기사를 게재했고 사후 스토리도 꾸준히 소개했다.
양선녀 씨는 아들의 죽음 직후 아들의 소중한 장기를 이식하는 것에 동의했다. 양선녀 씨는 "장기이식을 허락한 이유는 내 아들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김의 심장을 이식받기로 원래 동의했던 환자는 "세인의 관심을 받고 살고 싶지 않다"며 이식을 거절했다. 김득구의 심장은 그의 영혼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2023년 현재도 남아 있다.
사망 사건 몇 년 후 실존주의 경향을 가진 팝 음악가 워런 제본(Warren Zevon)은 ‘붐붐 맨시니(Boom Boom Mancini)’라는 노래를 작곡했다. 가사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김득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물었을 때 맨시니는 "누군가가 경기를 중단시켜야 했다"고 말하며 그 누군가는 자신이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위선적 판단을 한다. 빨리 집으로(링으로) 돌아와라 - 빨리 집으로 와라. '붐' 맨시니는 바비 챠콘과 싸울 것이다.
"작은 관을 하나 준비했다. 싸워서 지면 링에서 걸어나오지 않겠다!"라고 경기 전에 선언한 김득구의 죽음은 비극이었다. 특히 김득구의 가족과 맨시니에게는 그랬다.
김득구 사망 당시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유복자 김지완 씨는 치과대학을 졸업, 현재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다. 지완 씨는 링에 처절하게 쓰러지고 들것에 실려가는 아버지를 영상을 통해 보면서 맨시니를 향한 증오심이 끓어올랐다고 했다. 하지만 지완씨는 이후 LA에서 맨시니를 만나 "경기를 본 뒤 당신을 향해 증오심이 생겼다. 하지만 차분해진 상태에서 다시 믿음이 생겼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믿음."이라고 말했다고 중앙일보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