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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ports 100](8) 박찬호 [Korea's All Time Best]

박찬호: 한 시대를 넘어선 열정과 용기의 대서사시

등록일 2023년11월17일 09시07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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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널리스트 투데이는 한국의 스포츠영웅 100인을 소개하는 K-Sports 100: Korea's Best라는 제목의 코너를 진행 중이다. 그 여덟 번째 주인공은 박찬호(야구)이다. 

 


 

박찬호는 차범근에 이어 한국 선수가 미국이나 유럽의 주요 프로 스포츠에서도 스타 선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두 번째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찬호가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MLB) 구단과 계약하기 전, 최초의 MLB 계약자는 최동원이었지만 그는 한국 정부에서 방해를 놓는 바람에 결국 MLB 행을 이루지 못하고 한국에서 은퇴했다. 그때는 많은 사람이 한국에 남는 게 애국이라고 생각했다. 

 

박찬호는 1994년 1월12일 LA 다저스와 한국인으로 역사상 2번째 MLB 구단과 계약을 맺었다. 계약 발표의 자리에는 LA 한인 지도자들도 참여했는데 당시 다저스 구단주는 피터 오말리였다. 다음은 1994년 1월12일자 LA 타임스 기사 내용의 일부다.

20세 우완투수 박찬호가 역사상 2번째로 메이저리그 구단과 계약을 맺은 한국인으로 기록됐다. 빠른 공이 99마일에 달하는데 다저스는 그에게 120달러의 계약금도 안겨주게 된다. 일단은 올해 마이너리그에서 뛰게 되지만 박찬호는 스프링캠프 기간에 메이저리그 선수들과 함께 하게 된다. 오말리 구단주는 '그는 분명 메이저리그 유망주다. 언제 빅리그에 합류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돌아오는 시즌에 더블A나 트리플A에서 선발 투수로 뛰게 된다'고 소개했다.

 

다저스의 스카우트인 바비 다윈과 테리 레이놀즈는 지난 1991년 LA에서 열린 한미일 청소년 야구 대회에서 박찬호를 처음 봤고 당시 그의 활약은 놀라운(eye-popping) 수준이었다고 전했다. 

 

이날 발표식에 참여한 박찬호는 통역사를 통해 "당시 청소년 대회에서 다저스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저스 팬들에게 약속한다. 최고의 경기를 보이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찬호의 120만 달러 계약금은 지난해 6월 드래프트 전체 1번 지명 선수인 대런 드라이포트의 130만달러와 비교할만 하다. 박찬호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데 이에 대해 다저스의 투수 오럴 허샤이저는 "전혀 문제 없을 것이다.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도 처음에는 영어를 전혀 못했다."라고 말했다.

1994년 1월12일자 LA 타임스 기사

 

그렇게 시작한 메이저리그 생활. 그는 온갖 굴곡과 영광을 경험하며 메이저리그에서 124승을 기록한 선수가 됐다. 아시아 투수로서 메이저리그에서 기록한 최다승 기록이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역대 투수 다승 순위에서는 408위(2023년 11월16일 현재)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2023년까지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던 투수는 20,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20,000명+ 중에 408위이니 승수로만 보면 TOP 5%급 투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투수를 승수만으로 평가할 수 없지만 승수는 효율적 피칭을 가늠할 때 중요한 요소이다. 한편,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다승 투수는 무려 511승을 기록한 사이 영이다. 그의 위대함을 기리기 위해 메이저리그는 한 시즌 최고의 투수에게 사이영상을 수상한다. 2위는 한참 뒤에 있는 월턴 존슨으로 417승을 기록했다. 현대 야구라고 할 수 있는 기간에는 그렉 매덕스가 355승으로 가장 높은 승수를 챙겼는데 이는 역대 8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현역 선수 중에는 저스틴 벌랜더(42위. 257승), 잭 그레인키(71위. 225승), 맥스 슈어저(92위. 214승), 클레이튼 커쇼(101위. 210승)가 높은 순위에 올라 있다.

박찬호가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200승쯤은 챙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24승도 대단한 승수다. 이와 같은 성과는 박찬호뿐만 아니라 그의 팬, 에이전트 등 주변인들, 다저스 관계자 등이 공동으로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박찬호는 미국 진출 자체가 어려웠을 때 그의 에이전트였던 스티브 김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노력 덕에 다저스와 계약했고 오말리 구단주, 프레드 클레어 단장, 타미 라소다 전 감독 등 다저스 고위 관계자들의 특별한 애정으로 다른 선수들보다는 비교적 쉽게 메이저리그 진출 및 출전이 가능했다.

앞서 소개됐던 1991년 한미일 청소년 야구 대회 때 박찬호를 극진히 대접해 준 인물이 스티브 김 씨다. 당시 박찬호는 민박을 해줄 공주고 동문을 미국에서 찾지 못했고 스티브 김 씨가 자신의 집에 재워준 것이 두 사람사이에 좋은 인연이 되었다.

 

버팔로 유니버시아드의 야구 관련 기사. 경향신문 기사이다.

 

박찬호가 한양대에 다니던 시절인 1993년, 미국 버펄로에서는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박찬호는 맹활약을 펼쳤는데 이후 미국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박찬호에게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MLB 구단 관계자들은 스티브 김씨에게 중간다리 역할을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확실한 보장도 없었던 당시 스티브 김씨는 3개월 동안 건축사로서 바쁜 일정 속에서도 3번씩 한국과 미국을 왕복해 오가며 자신의 일같이 분주히 각계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박찬호의 미국행이라는 불가능하리라 생각된 일을 성사시켰던 인물이다. 그 당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이 왜 그런 일을 시도했냐는 질문에 그는 “찬호가 너무 원했기 때문이죠.”라고 답했다. 

이 인터뷰는 필자가 루키 매거진 미주 특파원이었던 시절, 기획을 했던 것으로 곽형근 자유기고가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곽형근 씨는 다저스 직원 출신이고 지금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시미밸리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활동 중이다. 

다음은 박찬호가 선발 투수가 된 후 스티브 김 씨와의 단독 인터뷰 내용. 

 

다저스 관계자들과 대화하고 있는 스티브 김 씨.

 

[루키 매거진] 올해 계획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스티브 김] 찬호가 선발투수가 되서 지난해보다 더 바빠지리라 생각합니다. 찬호의 활약에 따라 더 많은 광고제의가 들어올 것이고 또 언론의 취재 열기가 더해지게 될 것으로 전망이 됩니다. 저의 역할은 찬호가 더욱더 운동에 집중할 수 있게 모든 것을 잘 관리해 주는 것이지요.

[루키 매거진] 처음 미국에 와서 박찬호 선수가 적응하기 어려웠던 점이 있었다면?
[스티브 김] 우리가 너무 미국 야구를 몰랐습니다.  처음 와서 팀에 합류해 연습을 하는데 아침 10시에 시작해서 오후 2시면 끝나더군요. 좀 짧다고 생각했죠. 찬호도 “형, 너무 연습이 부실한 것 아냐?”라고 물었습니다. 연습 후에 우리는 쇼핑도 다니고 영화도 보기도 했죠. 그러던 어느 날 연습장을 우연히 들렸는데 많은 선수들이  열심히 연습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배팅, 수비연습, 조깅 등 각자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우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후 2시까지는 팀연습이었고 그후 개별적인 개인 연습이 있었던 거에요. 한국에서는 8-9시간의 연습을 단체로 하는데 여기서는 자율훈련이 더 강조된 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루키] 그것을 소위 자율야구라고 하는데 이것이 한국과 미국의 차이점인가요?
[스티브] 맞습니다. 그 이후로 찬호도 분발해서 개인 연습량을 대폭 늘렸죠.

[루키] 박찬호선수가 첫 계약을 할 당시 계약금을 놓고 다저스와 실랑이를 벌였을 때, 스티브 김 님은 140-150만달러까지 주장했다고 했는데 계약이 성사 되지 않을까 봐 불안하지는 않았었는지요?
[스티브] 물론 찬호가 워낙 미국에 오고 싶어했기에 아무것도 받지 않고 올 수 있었죠. 메이저리그에 들어갈 수만 있게 해달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첫 발을 그런 식으로 내디디면 앞으로도 푸대접을 받게 되고 메이저리그에 입문하려는 다른 한국선수들에게도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점잖게 가만히 있으면 바보가 되는 경우가 많지요. 주장할 것, 불평할 것은 그때그때 말해야 제대로 대접을 받게 됩니다.

[루키] 다저스의 구단주 오말리씨과 관계는 어떻습니까?
[스티브] 오말리 구단주는 큰 인물입니다.  자산이 4억달러가 넘는데도 무척 겸손하고 모든 사람에게 세밀한 신경을 쓰는 사람입니다. 특히 찬호는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보살펴 줬지요. 초창기에는 찬호의 시범경기를 직접 보러 스프링캠프에 오곤 했습니다. 신인을 격려하기 위해 시범경기에 구단주가 오는 일은 다저스 구단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말리씨는 매일 찬호에게 전화를 걸어 친절함을 보였고 찬호의 대한 기사를 항상 스크랩해서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루키] 앞으로의 계획이나 소망이 있다면?
[스티브] “한국과 미국사회, 양사회 중간에서 다리역할을 했으면 합니다.  찬호를 통해 한국야구와 미국야구가 더 가까워진 것처럼, 미국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미국에 진출하려는 운동선수뿐만 아니라, 기업들을, 또 반대로 한국에 진출하고 싶은 미국인들에게 다리역할을 해줘 작은 민간외교관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건축과 관계된 것이면 더욱더 좋고요(웃음)”

위 인터뷰는 1997년 4월18일 진행되었는데 박찬호가 1994년 데뷔한 후 어떤 활약을 했던 것일까?

1994년: 박찬호는 1월 아마추어 자유계약 선수 자격으로 다저스와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는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 진출에 성공해 아마추어 드래프트가 도입된 1965년 이후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18번째 선수로 기록됐다. 그는 또한 최초의 한국인 메이저리거로 이름을 남겼다. 박찬호는 4월8일 애틀랜타 전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올랐던 것. 그러나 그는 1이닝 동안 2실점을 하고 말았다. 박찬호는 12일 후인 4월20일 마이너리그행 통보를 받았다. 더블A팀인 샌안토니오에서 그는 20경기에 선발 등판, 5승7패, 평균 자책점 3.55를 기록했다.

 

박찬호 메이저리그 데뷔 관련 1994년 4월10일자 경향신문 기사.

 

■ 1995년: 시즌을 트리플A에서 시작했다. 앨버커키 듀크스의 선발 투수였던 박찬호는 22경기에 선발로 나와 6승7패, 평균 자책 4.91을 기록했다. 마이너리그 시즌이 끝난 후 시즌 막판 메이저리그로 승격된 박찬호는 2경기에 등판했고 그중 1경기는 최초의 선발 등판 경기였다. 샌디에이고 전에서 100마일에 가까운 빠른 공을 던져 라소다 감독을 흐뭇하게 한 박찬호는 그러나 이 경기에서 승리를 챙기지는 못했다. (통산: 무승)

1996년: 마침내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박찬호는 4월6일 시카고 컵스전에 구원 등판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메이저리그 승리를 따내는 쾌거를 이룩했다. 메이저리그 진출 2년3개월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그는 1996시즌에 첫 풀타임 메이저리거로서 48경기에 등판했다. 이 중 10경기는 선발이었다. 시즌 기록은 5승5패에 평균 자책점은 3.64였다.(통산: 5승)

 

박찬호 데뷔 첫승 관련 1996년 4월8일자 한겨레신문 기사

 

1997년: 박찬호는 풀타임 선발 투수가 됐다. 제5선발로 낙점돼 시즌을 시작했던 박찬호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냈다. 그는 팀 내 최다승 타이인 14승을 기록했고 상대 타자 피안타율 2할1푼3리로 내셔널리그(NL)에서 2위에 올랐다. 평균 자책점 3.38이었다. 8월11일에는 컵스를 상대로 최초로 완투승을 낚았다.(통산: 19승


1998년: 박찬호의 순항은 이어졌다. 꾸준히 90마일 중반의 강속구를 던졌던 그는 무려 15승을 기록하며 팀 내 최다승 투수가 됐다. 탈삼진을 191개나 잡아내 내셔널리그 6위에, 피안타율 2할4푼4리로 3위에 랭크됐다. 무려 34차례나 선발로 나섰다. (통산: 34승)
 

1998년은 그러나 박찬호를 아꼈던 피터 오말리 구단주, 프레드 클레어 단장과 작별을 하는 해가 되고 말았다. 오말리는 구단을 루퍼트 머독의 팍스(FOX)에 3억1천1백만 달러에 매각했고 클레어 단장은 1998년 6월21일, 한창 시즌 중에 해임되었다. 클레어는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정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클레어 단장은 1969년 다저스의 홍보실장으로 스카우트된 인물로 이전에는 롱비치 프레스텔레그램, 포모나 프로그레스 불러틴 등 LA 지역 언론사에서 야구 기자겸 칼럼니스트로 12년간 활동한 바 있는 기자 출신이다. 그는 1987년 다저스 단장이 됐고 이듬해 다저스가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필자는 그와 2006년 3월23일 인터뷰를 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당시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이 미국에서 한창 열렸던 상황이었다. 다음은 인터뷰 기사 일부 내용이다.

 

프레드 클레어 전 단장과 박찬호 선수.

박찬호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메이저리거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언론인 출신의 야구인 프레드 클레어씨. 전 LA 다저스 단장인 그의 첫 말은 "자랑스러운 박찬호"였다. WBC 경기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MLB.com(메이저리그 공식 웹사이트)에 이 대회 관련 칼럼을 썼다는 클레어씨는 "이번 대회에서 나를 가장 기쁘게 한 것은 박찬호의 성공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찬호는 건강하기만 하면 잘 던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번 대회에서 좋은 피칭을 했기 때문에 자신감이 생겼을 것이고 이는 2006시즌에 좋은 결과를 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클레어 씨는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및 국제 무대에서의 성공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클레어 씨는 다저스 구단을 떠난 후에도 박찬호와 한국 야구에 꾸준한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클레어 씨가 떠난 후에도 박찬호는 승승장구하며 팀에서 꼭 필요한 선수로 성장했다. 

1999년: 박찬호는 겨울에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방콕 아시안 게임에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건 박찬호는 피로 때문인지 정규 시즌에 부진했다. 평균 자책점 5.23에 13승11패를 기록했다. 8월22일부터 9월28일까지 7연승 행진을 했지만 팀의 우승이 멀어진 상황에서 기록했다는 이유로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4월23일 세인트루이스 전에서 페르난도 타티스에 한 이닝 만루 홈런 2개를 허용하기도 했으며, 애너하임 투수인 팀 벨처에 발차기를 시도(?)해 6월8일부터 17일까지 출전 정지령을 받아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해를 보냈다. 시즌이 끝난 후에는 한국으로 돌아가 4주간 기초 군사 훈련을 함으로써 병역 면제가 온전히 이뤄졌다. (통산: 47승)
 

2000년 시즌을 앞두고 박찬호는 스티브 김과 결별하고 슈퍼에이전트 스캇 보라스와 계약을 맺었다. 

2000년: 전년의 부진을 말끔히 씻는 해였다. 그는 무려 18승(11패)을 챙기며 기량이 절정기에 있음을 보여줬다. 최초로 탈삼진 200개를 넘어(217개) 이 부문 NL 2위에 올랐으며 피안타율도 역시 2위였다. 다승 부문에서는 5위, 평균 자책점 7위(3.27)에 랭크됐다. 18승은 아시아 출신 선수가 올린 한 시즌 최다승이었다. (통산: 65승)

2001년: 지난 시즌 성공으로 연봉 9백90만달러를 받은 박찬호는 허리 상태가 좋지 않았다. 양철통 위에 앉아 허리 통증을 달래는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는 자유계약 시장에서 대박을 터뜨려야 한다는 목표 때문에 무리해서 등판했고, 결국 15승(11패)을 챙길 수 있었다. 박찬호는 2001년 한국인 선수로는 최초로 올스타로 선발되는 영예를 누렸다. 그는 올스타전에서 1이닝을 던졌는데 칼 립켄 주니어에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됐다. 그는 또한 10월5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정규 시즌 경기에서 배리 본즈에 역사적인 71호, 72호 홈런을 허용한 투수로 기록됐다. 시즌 후 박찬호는 자유계약 시장 최고의 투수로 손꼽혔지만, 다저스는 그와의 계약을 포기했다. (다저스 통산: 80승)

2000년 1월에 계약을 맺은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는 텍사스 레인저스와 연평균 1천5백만달러의 계약 대박을 터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캇 보라스는 어떻게 대형 계약을 척척 만들어낼까? 당시 스캇 보라스 코퍼레이션에서 일했던 한인 직원 박승현 씨에게 필자가 물어보았다. 

 

스캇 보라스와 박승현 씨.

 

“에이전트는 통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스캇 보라스 코오퍼레이션이 연봉 중재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는 것은 바로 이 통계에 대한 이해 때문입니다. 수년전 앤드류 존스(당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연봉 중재 때도 1875년의 자료부터 뒤져서 역사상 위대한 선수들과 비교를 했지요. 어린 나이에 골드글러브를 여러 차례 수상했고 그가 어린 나이에 행크 애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기록을 가졌다는 것을 자료로써 연봉 중재관에게 보여줬기 때문에 승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희 사무실에는 데이터베이스 관리 요원이 있는데 필립 디그레고리 씨라고, 전에 미우주 항공국(NASA)에서 근무하신 분입니다. 여담입니다만 그 분은 챌린지 호 추락 사고로 인해 NASA의 인원 감축이 있었고 그때 그만 두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희 사무실로 오셨죠.”

박승현 씨는 보라스씨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언론에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솔직히 막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라스씨에 대해 ‘야구의 사탄’이라고 까지 비난을 하더군요. 하지만 옆에서 그 분을 지켜보면서 잘못된 편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보라스씨가 정말 돈만 밝히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회사를 오래 전에 처분했을 것입니다. 보라스씨는 수년 전 스포츠 매니지먼트사의 합병이 유행했을 당시 한 회사로부터 수천만 달러에 회사를 팔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합니다.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선수들을 위해 일하는 회사를 만들고 야구를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이었고 자신의 열정을 돈과 맞바꾸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평생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수천만달러를 받았을 겁니다.”

 

박승현 씨는 보라스씨의 협상 방법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문 지상에 보면 우리가 얼마를 약속 받기 전에는 사인을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나가는데 사실 저희는 협상을 그런 식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구체적인 데이터를 구단들에게 보내고 이런 선수인데 오퍼를 기다리겠다고 하지요. 즉, 선수의 몸값을 먼저 정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박찬호 선수도 지난 시즌 중에 2천만 달러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저희 사무실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LA 타임스 기자가 ‘2천만 달러를 요구하지 않을까’라는 추측기사를 썼고 그 이야기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옮겨지면서 ‘보라스는 2천만 달러를 요구할 것이다’로 발전한 것이지요.”

다음은 스캇 보라스 사무실에서 자유계약 선수로 풀린 박찬호에 관해 만든 X파일이다. 박찬호에게 수천만 달러를 내놓지 않을 수 없는 대단한 X파일이었다. 필자는 당시 X파일 내용 1페이지부터 80페이지까지를 분석했는데 그 내용을 다시 꺼내 읽어보았다. 핵심적인 부분만 요약해본다.

X파일은 박찬호의 사진으로 시작됐다. 화려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두 번째 페이지에는 짐 콜번 LA 다저스 투수 코치의 코멘트가 적혀져 있다.

 

“에이스 투수란 무엇인가? 에이스는 월드시리즈 7차전 때 마운드에 올려 보내고 싶은 투수이다. 그들은 매년 20승을 올릴 기회를 갖게 되고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차지하고 사이영상을 받을 수 있는 투수들이다. 박찬호는 그런 의미에서 에이스급 투수다.” 

X파일의 페이지를 넘겨 보면 “찬호는 모든 것을 갖춘 선수다.(Chanho is the whole package.) ”라는 제프 토보그(몬트리올 엑스포스) 감독의 칭찬이 있다. 바비 칵스(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감독도 “박찬호는 성적에서 보는 것처럼 이닝수가 많고 피안타수가 적고 삼진이 많은 선수다”라고 칭찬 했다.

 

한 장을 더 넘기면 다음과 같은 목차가 나온다.

 

1) Park: One of MLB`s most durable pitchers
2) Park: Among toughest to hit in MLB
3) Park: Ranks with MLB`s #1 Starters in Quality Start
4) Park: Among MLB`s Elite Starters in E.R.A.
5) Park: one of MLB`s Top winners despite of poor run support
6) Park: A premium power pitcher in MLB
7) Park: provides quality performance deep into game
8) Park: performance comparable to top-paid MLB pitchers.

 

1)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꾸준한 투수 중 한 명(Park: One of MLB`s most durable pitchers)

꾸준함(durable)이란 경기에 빠지지 않고 출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라스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박찬호의 선발 등판수(Game Started)를 강조했는데 박은 지난 2년 동안 69차례 선발 등판해 이 부문 메이저리그 전체 공동 2위에 랭크 됐다.

 

2) 상대하기 가장 어려운 투수(Park: Among toughest to hit in MLB) 

두 번째 카테고리의 첫 번째 페이지는 다저스의 포수 폴 로두카의 코멘트로 시작된다. 로두카는 시즌 중 “모든 사람들이 랜디 존슨과 커트 실링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나는 최고의 원-투 펀치로 케빈 브라운과 박찬호를 밀고 싶다”고 말했는데 이를 옮겨 적은 것이다. 기록 이야기가 이어진다. ‘상대하기 어려운 투수’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보라스는 박찬호의 피안타율을 강조했다. 피안타율은 박찬호를 상대할 때 상대타자의 타율을 말하는데 숫자가 낮을수록 `상대 곤란 투수` 자격을 받는다. 보라스는 "박찬호의 피안타율이 낮은 것은 `타자를 압도하는 투수`라는 것이 입증되는 자료"라고 강조했다. 2001년 시즌만 봐도 박찬호(2할1푼6리)는 피안타율 부문에서 존슨(2할3리)에 이어 2위에 올랐다.

 

3) 리그 최고의 에이스에 버금가는 퀄리티 스타트(Park: Ranks with MLB`s #1 Starters in Quality Start)

선발투수들이 완투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들을 평가하는 좋은 잣대가 바로 퀄리티 스타트다. QS라는 약어로 사용되는 이 개념은 1980년 워싱턴 포스트지의 리처드 저스티스가 처음 소개한 것으로 6이닝 이상을 3자책점 이하로 막아낸 투수에게 부여 된다. 6이닝과 3자책점은 팀 승리의 기본적인 기틀을 마련해 주는 것으로 퀄리티 스타트가 많을수록 팀의 에이스급 투수로 인정을 받게 된다. 이 부문에서 박찬호는 지난 2년간의 기록을 종합할 때 메이저리그 전체 공동 2위에 랭크 됐다. 박찬호는 2001년 시즌에 26차례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해 존슨과 실링에 1개차로 아깝게 3위가 됐고 2000년 시즌에는 23개로 전체 6위에 랭크 됐다.

 

4) 평균 자책점을 봐도 박찬호는 엘리트 선발 투수이다(Park: Among MLB`s Elite Starters in E.R.A.)

지난 2년간의 성적을 볼 때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평균 자책점 부문 4위에 랭크 됐다. 2001년 시즌에 박찬호는 몇차례 원정 경기에서 대량 실점, 2점대 평균 자책점이 3점대로 치솟으면서 3.35로 시즌을 마감했으며 전체 12위에 랭크 됐다. 2000년엔 3.27로 조금 높은 위치인 6위에 오른 바 있다.

 

5) 메이저리그 정상급 파워피처다(Park: A premium power pitcher in MLB)

다섯 번째 카테고리는 전 다저스 포수 찰스 존슨(4차례 골드글러브 수상자)의 코멘트 인용으로 시작한다. 존슨은 “박찬호는 내가 본 최고의 패스트볼을 던지는 선수 중 한 명이다”라고 말했다. 파워피처의 가늠자 역할을 하는 통계 부문은 바로 탈삼진수다. 지난 2년간의 기록을 살펴 보면 박찬호가 상대 투수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를 알 수 있다. 박찬호는 2001년 시즌에 218개의 탈삼진을 기록, 메이저리그 전체 4위에 랭크 됐고 2000년에도 랜디 존슨과 페드로 마르티네스에 이어 3위에 랭크됐다.

 

6) 득점 지원을 제대로 못 받았음에도 승수가 많은 투수였다(Park: one of MLB`s Top winners despite poor run support)

여섯 번째 카테고리는 “박찬호는 그를 중심으로 팀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선수다”라는 전 다저스 단장 프레드 클레어의 코멘트 인용으로 시작 됐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역시 관련 성적이 나와 있다. 득점 지원이 적다는 것은 홀로 승리를 일궈내야 한다는 부담을 안는 것과 같다. 지난 2년간 33승 이상을 올린 투수 중 박찬호는 두 번째로 낮은 득점 지원을 받았다. 박은 타자들의 지원을 덜 받고도 33승 이상을 올린 투수 중 매덕스를 제외하곤 가장 `고군분투`한 엘리트 투수였다. 지난 5년을 본다면 박찬호에 대한 다저스 타선의 득점 지원은 총 5.04로 박은 이 기간 동안 75승을 기록한 투수 중 득점지원을 못 받은 투수 4위에 랭크 됐다. 박찬호 보다 득점지원을 못 받은 75승+ 투수는 페드로 마르티네스(4.81), 커트 실링(4.60), 케빈 브라운(4.59)이었다.

 

7) 경기 후반에도 강하다. (Park: provides quality performance deep into game) 

“박찬호가 투구수 100개를 기록했을 때 전광판을 보면 경기는 7회 또는 8회를 향해 가고 있다. 이는 그가 엘리트 투수임이 입증되는 부분이다.”-짐 트레이시 다저스 감독

 

박찬호에 대해 경기 후반에 약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X-파일을 보면 그런 생각이 사라질 것 같다. 박찬호는 지난 2년 동안 7이닝 이상을 던진 경우 1자책점 이하를 무려 24경기에서 기록해 이 부문 3위에 랭크 됐다. 1위와 2위는 각각 30경기, 25경기를 기록한 랜디 존슨과 마이크 무시나였다. 박찬호는 또한 지난 2년간 8이닝 이상을 던진 경우 무자책점을 6차례나 기록했는데 이는 그렉 매덕스(7회), 하비에르 바스케스(7회)에 이어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경기 후반에도 강하다는 것이 입증되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8) 메이저리그 상위 연봉 선수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Park: performance comparable to top-paid MLB pitchers)

스캇 보라스가 박찬호를 위해 받아내고 싶어하는 몸값은 연평균 1천5백만달러 수준인 듯하다. 박찬호 X-파일에는 지난 오프 시즌 중 콜로라도 로키스와 평균 1천5백만 달러에 계약을 맺은 마이크 햄튼과의 비교가 있어 눈길을 끌었다. 보라스는 "박찬호가 2001년 시즌 햄튼과의 맞대결에서 2전 2승을 기록 했고 두 선수의 메이저리그 통산 성적을 비교하면 두 선수가 유사한 점이 많다"고 설명했다. 


야구 전문지 베이스볼 위클리의 표지 사진 및 특집 기사로 소개된 박찬호

 

2002년: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 6천5백만달러에 계약을 맺은 박찬호는 예상대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는 계속 “문제없다”고 주장했지만 2001년에 무리한 탓에 온몸이 망가진 상태였다. 두 번이나 부상자 명단에 올랐던 박찬호는 25경기에 선발 등판, 9승8패, 평균 자책점 5.75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남겼다. 8월23일 부상자 명단에서 탈출하고 5승무패 평균 자책점 2.40을 기록했지만, 더욱 심각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통산 89승)

2003년: 결국은 허리 문제가 있음이 밝혀졌다. 양철통 위에 앉아서 달랬던 그 허리 통증이 전성기를 달려야 할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애너하임에서 시즌 첫 경기에 나선 박찬호는 2.2이닝 동안 6자책점을 기록했고 바로 다음 경기에서도 3이닝 4자책점을 기록하며 벅 쇼월터 감독의 이마에 주름살이 늘게 했다. 당시 박찬호는 “건강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결국 허리 상태가 좋지 않아 4월29일 부상자 명단에 올랐던 그는 마이너리그에서 조율한 뒤 6월7일 메이저리그로 복귀했다. 그러나 2이닝 4실점을 기록한 후 곧바로 부상자 명단에 다시 이름을 올렸다. 많은 사람의 만류에도 그는 복귀를 시도했지만 결국 9월2일자로 60일짜리 부상자로 기록됐다. 1천3백만달러의 연봉을 받은 그가 올린 승수는 1승이었다.(통산 90승

박찬호의 야구계 한 후배는 2003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찬호 형이 굉장히 힘들어하는 것 같다. 많은 돈을 받고 야구를 못하는 것보다 1천만 달러 이하를 받고 야구를 잘 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박 선수는 또 “다저스 시절이 좋았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후회하면 이미 늦은 일이지만 2년 전을 생각해보면 당시 아픈 몸을 이끌고 공을 던진 것이 그의 야구 인생을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든 원인이 됐다. “몸값을 적게 받더라도 나는 다저스에 남고 싶다”고 말했다면 그는 당시 영웅 대접을 받으며 인생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2004년: 어두운 그림자는 쉽게 걷히지 않았다. 1천4백만달러의 연봉이 팬들에게조차 부담스러운 액수가 되고 말았다. 여전히 허리 상태가 좋지 않았던 박찬호는 16경기에 선발로 나와 4승7패, 평균 자책점 5.46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냈다. 레인저스는 그를 트레이드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어떤 팀도 그를 받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부상자 명단에 무려 98일 동안 있었다. (통산: 94승)

 

■ 2006년: 샌디에이고 파드레스 유니폼을 입고 7승 7패(평균 자책 4.81)를 기록하였으며, 10월 3일에는 생애 최초로 포스트 시즌 경기(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전)에서 구원 등판을 했다. (통산: 113승)
 

2007년: 2007년 2월 9일 뉴욕 메츠와 1년 300만 달러(기본급 60만 달러, 인센티브 240만 달러)의 스플릿 계약에 합의했는데 1패만을 기록하고 방출됐다. 이후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마이너 계약을 체결했는데 마이너에스도 난타당하고 메이저 입성에 실패했다. (통산: 113승) 
 

2008년: LA 다저스로 복귀한 박찬호는 중간계투 및 임시 선발로 시즌을 치렀고, 54경기에 출전해 95.1이닝에 4승 4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3.40의 나쁘지 않은 성적을 냈다.  (통산: 117승) 
 

2009년: 필라델피아 필리스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구원투수로 활약을 한 끝에 3승 3패13홀드(평균 자책점 4.43)를 기록하였다. 소속팀과 함께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고 생애 첫 월드시리즈 무대에서 무실점 투구를 선보였다. 뉴욕 양키스와의 월드시리즈 2차전 ⅓이닝 1피안타 1삼진을 기록한 그는 4차전부터 6차전까지 모두 등판했고 총 4경기에서 3⅓이닝 2피안타 1볼넷 3탈삼진 무실점 평균자책점 0을 기록했다. (통산: 120승) 
 

2010년: 뉴욕 양키스와 150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다. 중간계투로 주로 투입되었는데 2승1패, 평균 자책점 5.60으로 부진해 방출됐다. 방출 후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서 2승2패, 평균 자책점 3.49로 시즌을 마쳤다. 37세였던 박찬호는 10월 2일,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경기에 구원 등판, 3이닝 6삼진의 호투와 함께 승리 투수가 되었고 개인 통산 124승을 기록했다. 이는 일본 투수 노모 히데오가 2005년 수립한 아시아 투수 역대 메이저리그 최다승 기록 경신이다. (통산: 124승)



 

문득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만약 박찬호가 없었다면.’
 

박찬호의 존재는 1990년대 한국 국민들의 생활 방식을 바꿔 놓을 정도로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는 한국 선수들이 외국에 진출해도 잘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해준 선수였다.

 

1990년대에 대한민국 국민들 특히 남성들은 그의 경기결과에 연연했고 박찬호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가졌다. 메이저리그 야구 매니아들도 늘어나 한때 메이저리그가 한국 프로야구 보다 더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는 한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필자는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지 않았을 가상의 경우와 실제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박찬호 無(무)는 박찬호가 메이저리그로 진출하지 않았을 경우의 가상 스토리이고 박찬호 有(유)는 실제 상황이다. 

▶박찬호 無 - 김병현, 조진호, 김선우, 봉중근, 서재응, 최희섭, 백차승, 구대성, 추신수, 류제국, 류현진, 임창용, 강정호, 오승환, 박병호, 이대호, 최지만, 김현수, 김광현, 김하성, 양현종, 박효준, 배지환 등의 메이저리그 진출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타자 이정후가 수천만 달러를 받고 미국에 진출할 수도 있다는 설이 말이 안 되었을 것이다.

▷박찬호 有 - 그로 인해 많은 한국 선수들이 메이저리그 진출을 꿈꿀 수 있다. 

▶박찬호 無 - 보라스가 누구인지, 스티브 김이 누구인지 스포츠 에이전트라는 말이 여전히 생소했을 것이다.

▷박찬호 有 - 국내에 스포츠 마케팅이란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기가 90년대 중반 박찬호의 에이전트 였던 스티브 김의 등장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스포츠 에이전트라는 직업 또한 스포츠 마케팅의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스티브 김이 박찬호와 더불어 유명해진 이후 ‘마이더스의 손’ 스캇 보라스의 존재가 알려지고 스포츠 에이전트에 대한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스포츠 마케팅 분야라는 아주 유망한 직종도 박찬호가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국내에 소개됐다고 볼 수 있다.


 

▶박찬호 無 - 메이저리그 전문가들이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찬호 有 - 각 사이트들에는 메이저리그 전문 '기자'들까지 등장하였고 경기 결과에 만족하지 않고 MLB 관련 잘하는 선수는 왜 잘하는지, 못하면 왜 못하는지, 선수의 장점 단점, 경기 전망, 시즌 전망, 게임 리뷰&프리뷰 등등 여러 분야들을 다루며 한동안 맹활약했다. 한국 프로야구에 대한 토론 수준이 높아진 이유 중 하나는 메이저리그 토론을 하면서 갈고 닦은 게 기초가 됐다고 할 수 있다.


 

▶박찬호 無 - 투수와 투수의 기록 또는 구질 같은 것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즉, 야구를 볼 때 투수에 집중하는 경우는 지금 보다 덜 했을 것이다.

▷박찬호 有 - 5일에 한번 꼴로 한국 야구 팬들은 박찬호의 등판경기를 집중해서 본 적이 있다. 그렇게 되면서 공의 무브먼트, 로케이션, 딜리버리 등과 왜 케빈 브라운이 싱커의 달인인지, 대럴 카일이 커브의 달인인지 등을 논하게 됐다. 선발-릴리프-셋업-클로저 등으로 이루어지는 투수들의 분업화에 대해서도 박찬호 존재 덕분에 조금은 더 많이 알 수 있었다. 투수와 관련된 세밀한 부분들이 대중속으로 깊이 파고 들게 됐다.


 

▶박찬호 無 - 메이저리그 경기를 중계하는 곳이 드물었을 것이다. 

▷박찬호 有 - 96~97년에 KBS는 1년에 30만달러를 미 사무국에 지불했다. 하지만 MBC는 한때 4년간 1500만 달러라는 무려 12배에 가까운 금액을 지불하며 독점 방송권을 따낸 적이 있다. 

 

[나가는 말]

한국 야구의 역사는 박찬호 선수와 함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그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단순히 한 선수의 성공이 아닌, 한국인이 세계 무대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박찬호 선수는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며, 한국인의 능력과 가능성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의 경기마다 한국 국민들은 숨죽여 응원했고, 그의 성공은 우리 모두의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박찬호 선수의 진출 이후 많은 한국 선수들이 해외 무대로 발을 내딛었고, 이제는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선수들의 소식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 자랑스러운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발자취는 후배 선수들에게 끝없는 영감을 주었고, 한국 스포츠의 가능성을 확장시켰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한국 스포츠의 풍경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단순한 야구 선수를 넘어 한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고, 그의 이름은 영원히 한국 야구의 역사와 함께 기억될 것입니다. 그의 열정, 끈기, 그리고 무한한 도전 정신은 모든 이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박찬호 선수, 당신은 한국 야구의 자랑이며, 우리 모두의 영웅입니다.

 

​이 글을 읽은 독자 여러분 각자도 자신의 마운드에 서 있습니다. 어려운 순간, 지치고 싶은 순간이 찾아와도 포기하지 마세요. 박찬호 선수처럼, 한 발 한 발 꿋꿋이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만의 승리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경기에서도 멋진 홈런을 치는 그 날이 올 것입니다.

 

항상 믿고 응원합니다. 여러분의 열정과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며, 그 모든 순간들이 여러분을 더욱 강하고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박찬호 선수의 역사를 보며 용기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인생의 승리자가 될 그날을 기대하며, 응원의 마음을 전합니다.

 

힘내세요,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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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기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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