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널리스트 투데이는 한국의 스포츠영웅 100인을 소개하는 K-Sports 100: Korea's Best라는 제목의 코너를 시작한다. 그 네 번째 주인공은 양정모다.
양정모. 퍼블릭 도메인.
한강의 기적, 1976년: 양정모와 대한민국의 역사적 전환점
2023년 현재 한국의 명목 GDP(시장환율 적용)는 1조 6,733억 달러로, 전 세계 13위 수준이다. 한국은 경제적인 면, 문화적인 면에서는 선진국으로 올라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1976년. 당시 한국은 개발도상국이었다. 후진국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박정희 정부는 2차 경제개발 5개년을 계획 중이었고 경제 성장 목표치의 124.8%를 초과달성했다. 당시 한국은 급속한 경제 성장을 대변할만한 무엇인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한국 전쟁 후 폐허나 다름 없었던 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데 한국 밖에서는 이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성장을 세상에 드러낼 사건이 1976년 발생했다. 바로 양정모의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 획득이었다.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은 적이 있지만 이는 일장기를 달고 받았던 것이고 양정모는 건국이래 대한민국에 첫 금메달을 안겨준 인물이 됐다.
단순히 올림픽 첫 금메달 차원을 넘어선 한국의 경제, 사회 성장의 표상과 같은 메달이라 남달랐다.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다. 양정모는 레슬링 페더급에서 금메달을 받은 후 금의환향해 초대형 카퍼레이드를 하는 등 대한민국의 영웅이 됐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금메달은 요즘 올림픽에서 받는 금메달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건국이래 최초의 금메달이었고 한국이라는 나라가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상이었기에 달랐다. 1976년 당시 한 캐나다 언론은 양정모가 금메달을 받은 후 포상금 20만 달러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받았다고 보도했는데 이에 한국 선수단은 “그런 일 없다”라고 부인했다. 당시 외국인들에게는 금메달 획득에 대해 포상금을 받는 게 신기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20만 달러면 한화로 1억원 정도가 됐고 1976년 서울의 33평형 아파트가 1천만원이었기 아파트 10채 정도를 정부에서 포상금으로 줬다고 보도했던 것이다. 실제 한국 선수단 김성집 단장은 몬트리올 올림픽이 열리기 전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는 1억원의 포상금이 주어진다”라고 공표한 바 있다.
개천에서 용난다: 양정모와 1976년의 올림픽 환희
양정모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의 영웅이 됐다. 다음은 1976년 8월4일자 몬트리얼 올림픽 선수단 귀국 소식을 조선일보가 보도한 내용이다. 이 내용은 이 신문의 1면 톱 기사로 올려졌다.
"감사합니다. 국민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금메달을 따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서 금메달을 쟁취, 온국민에 희망과 긍지, 환희를 안겨준 양정모 선수는 자랑스런 모습으로 이같이 늠름하게 귀국일성을 토로했다.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건국 후 첫 금메달을 따는 등 국위를 크게 떨친 한국 선수단 일행 72명(임원 22, 선수 50)이 3일 오후 5시 대한항공 전세기편으로 태극기를 앞세워 김포공항 착, 개선한 것이다. 금1, 은1, 동4개로 올림픽 출전 사상 최대의 성과를 올리고 돌아온 선수단 일행은 김포공항에서 간략한 귀국 보고를 마친 뒤, 카퍼레이드로 200만명의 환영 인파 속을 뚫고 서울시청 앞 환영대회에 참석, 열광하는 10만 시민들로부터 감사와 격려의 갈채를 받았다.”
양정모는 이어 체육인에게 주는 최고훈장인 청룡장을 받았고 1975년 체육인 연금 제도가 시작된 것이 근거가 돼 매월 12만원의 연금도 받게 되었다. 당시 노동자 월급이 대략 3-5만원 수준이었기에 12만원은 엄청난 혜택이었다. 그리고 그는 1973년 3월 '병역의무의 특례규제에 관한 법률'이 제정 후 첫 수혜자가 됐다. 손흥민, 이강인 등이 최근에 얻었던 그 병역특혜의 1호 수혜자는 바로 양정모였던 것이다.
양정모의 금메달 획득 소식은 1976년 한국의 최고 뉴스였다. 한국의 경향신문 독자들이 선정한 국내 10대 뉴스 1위는 양정모의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 획득이었다. 당시 뉴스 2위는 북한 판문점 도끼 사건, 4위 신안 해저보물 인양, 5위 신민당 내분 사태, 7위 사상 최대 쌀 풍년이었다. 양정모는 당시 북한 이슈, 정치 이슈, 경제 이슈를 뛰어넘는 최고의 뉴스메이커였다.
양정모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정에서 발굴된 ‘개천에서 용난’ 대표적인 인물이 되기도 했다. 다음은 조선일보 1981년 3월24일자 양정모 관련 기사인데 이 기사에서 70-80년대 한국인들의 보통 사람의 삶을 볼 수 있다.
"새벽마다 부산 용두산 절에 올라 아들의 우승을 비는 어머니의 모습, 방앗간을 하면서 풍족지 못한 살림살이에 보약을 지어 선수촌을 찾아주시던 아버지의 얼굴. 그러나 이보다 더 무거운 짐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온국민의 금메달에의 열망이었다. 출국 전 부산 집에 내려갔을 때도 마을 사람들은 '세계 제일 가는 선수가 되어 오라' '양 선수는 양 씨집의 아들이 아니라 한국의 아들이 돼야 해'하며 격려 했었다. (중략) 나는 (금메달을 받고 서울에서) 환영대회를 마친 후 바로 부산고향으로 내려갔다. 집앞 골목에는 금메달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나붙고 동네 주민들이 모여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나를 떠나 보낼 때 격려해 주던 이웃 할아버지, 아주머니들이 덩실덩실 춤까지 추며 반겨주었다. 밤늦게까지 집에서 금메달을 구경하자는 축하객이 끊이지 않았다."
양정모와 1976년의 대한민국: 끊임없는 헌신의 상징
손기정의 금메달이 일제 강점기 시대에 한국인들의 가슴속에 독립된 조국을 열망케했다면 양정모는 성장하는 대한민국, 세계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의 중요한 출발과 같은 표상이 됐기에 의미가 남달랐다. 양정모는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 밤낮 없이 매진했던 한국인들을 상징하는 대표주자이기도 했다.
캐나다의 한 언론은 몬트리올 올림픽 당시 캐나다 레슬링 코치와 인터뷰를 통해 “한국 선수는 승리를 위해 종일토록 매일 12개월 내내 훈련을 한다. 그래서 한국 선수를 이기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 레슬링 팀은 대단하다”라고 전한 바 있다. 종일토록 매일 12개월 내내 훈련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생소한 일이었다.
당시 한국 노동자들이 그랬다. 대부분 노동자들은 종일토록, 매일, 12개월 내내 일했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초석이 됐다. 양정모는 그런 대한민국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오늘날 한국 청년들은 캐나다인이 1970년대 그랬던 것처럼 종일토록, 매일, 12개월 내내 일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것이 공감이 될 수도 없다. 그렇게 혹사 당하는 게 옳다고 볼 수도 없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캐나다 코치가 말했던 것처럼 그때 대한민국 팀은 대단했다. 양정모를 비롯해 그때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분들은 정말 대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