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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초, 첫째 자녀의 대학 입학식에 참석했었다.
오랜만에 참여하는 입학식이라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부모가 입학식에 참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대학 입학식인데 설마 그렇겠는가' 하고 넘겼다. 28년 전이지만, 내가 입학할 때만 해도, 집안의 경사까지는 아니더라도, 큰일 중 하나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학교에 거의 도착할 때쯤, 아이만 참석한다는 말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가방을 하나씩 메고, 혼자서 혹은 삼삼오오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입학식 마치고 바로, 2박 3일 일정으로 새터 모임을 가기 때문이다. 이 또한 새로운 풍경이었다.
“어? 정말이네!”
아내와 필자는 거의 동시에, 주변의 말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입학식 풍경 중 하나가, 입구에 꽃을 파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는 건데,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꽃을 들고 다니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준비해 간 꽃이 있는데, 괜히 민망해지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되었다. 다행스럽게, 학교에 들어가니 우리 같은 사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몇몇은 아이와 함께 꽃다발을 들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도 준비해간 꽃을 들고 사진을 찍고 돌아왔다. 행사장에는 입학하는 아이들만 들어가고, 부모들은 준비된 별도의 공간에서 영상으로 보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영상으로 볼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에, 아이 데려다주고 사진 찍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교문을 나섰다.
오가며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필자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지금은 이런 풍경이 없겠지만, 예전에는 좀 과격하게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었다. 체육 교육과라는 특성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굴렀다.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도 하고, 실제 구르기도 했다. 대학 캠퍼스의 낭만을 꿈꾸며 왔는데, 이게 뭔가 싶었다. 이러려고 기를 쓰고 대학에 들어온 건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굴리고 나서, 식사 자리를 가졌다. 말이 식사 자리지 이 또한 고문의 자리였다. 과의 전통(?)이었던 사발식이 진행됐다.
사발식이라 명명한 이유가 있다.
냉면 사발을 들고 하기 때문이다. 뭘 할까? 신입생이 나오면 선배가 친절하게 사발을 건넨다. 사발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들고 있으면, 다른 선배는 소주 두 병을 그 사발에 붓는다. 그러면 냉면 사발에는, 냉면 대신 소주로 가득하게 된다. 지진이 난 것도 아닌데 손이 미세하게 떨리면서, 냉면 사발 안에 있는 소주들이 조금씩 물결이 일기 시작한다. 다 따르면, 사발을 들고 있는 신입생은 자신의 학번과 이름 그리고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사발을 들이킨다. 턱밑으로 흐르는 소주는 어느 정도 인정했는데, 대놓고 쏟는 사람은 다시 했다.
사발을 다 비우고 머리에 얹는다.
그러면 옆에 있던 또 다른 선배는 미소를 지으며 김치 한 조각을 들고 있다. 그걸 안주라고 주는 거다. 그러면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전부 밖으로 뛰쳐나간다. 사발식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들이부은 술이 그대로 다시 올라온다. 벽에 한 줄로 늘어선 동기들과 나란히 서서 속을 비웠다. 그러면 정신은 말끔해진다. 그때만 해도 맥주 한 잔도 못 하던 필자가 그걸 다 마셨다는 게 아직도 신기하다. 역시 사람은 극한 상황에 처하면 다 하게 되나 보다. 그때는 그걸 마시지 않으면 큰 일 날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었다.
사발식은 개인플레이다.
혼자서 알아서 하면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다른 방식(?)의 사발식도 있었다. 동기들을 몇 명씩 묶는다. 동기들을 서로 순서를 정한다. 뭣도 모르고 일단 정하라니까 정한다. 그리고 똑같은 양의 소주를 사발에 부어서 준다. 처음 순서부터 마지막까지 돌아가면서 마시는데, 중요한 건 마지막 사람이 남은 모든 술을 다 마셔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방식을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라고 명명했다. 앞선 동기들이 어느 정도 마셔주면 뒤로 갈수록 부담이 덜어진다.
자기만 살겠다고 앞에서 입만 대면 어떻겠는가?
마지막 사람은 거의 그대로 남은 모든 것을 다 마셔야 한다. 여러 가지 장면들이 연출됐다. 어떤 조는 모든 사람이 정말 진지하게 많이 마시는 것 같았지만, 끝에 많이 남은 조가 있었다. 마지막 친구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었다. 마지막 주자가 술을 잘 마시는 친구였던 조는, 젓가락으로 찍어서 입에 갖다 대는 등 장난을 치기도 했다. 어떤 조는 마지막 사람이 한 방울도 마시지 않기도 했다. 앞서 사람들이 충분히 마셨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름 한 번 정말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기 사랑 나라 사랑’
사발에 담긴 소주를 일상으로 가져와 본다.
사발에 담긴 소주는 마시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이 된다. 감당하기에 싫은 그 무엇이기도 하고, 겪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이기도 하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그 무엇이기도 하다. 하지만 감당해야 한다. 피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자신이 마시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다. 좋은 것을 받아들이듯 피하고 싶은 이것도 받아들여야 한다. 왜? 자기 인생이니까.
인생은 좋은 것도 있지만, 나쁜 것도 있다.
이것을 부정하면 자기 인생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공동체라면, 내가 감당하는 정도에 따라 다른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정도가 달라진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감당하겠다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 그렇게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감당하고 끌어안을 때,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찾아오기도 한다. 피하지 않고 마셔야 할 잔을 모두 마신 사람에게 오는 선물이랄까? 그 시기가 언제일지 또 어느 때일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그날이 온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