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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잭슨은 2009년 6월25일(미국 기준) 정오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곧바로 UCLA 메디칼 센터로 실려갔으나 사망했다. 향년 50세. 팝의 황제로 불리는 마이클 잭슨의 삶을 돌아본다.
«1958년 8월29일생: 마이클 조셉 잭슨은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외곽지역에서 태어났다. 조셉 잭슨과 캐서린 잭슨의 7번째 아이였다 (부모는 이후 2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마이클이 태어났을 때 잭슨가는 음악 가족이었다. 부친인 조셉은 지역 사회에서 연주하는 그룹인 팰컨스의 기타리스트였고 모친인 캐서린은 자녀에게 노래하는 법을 가르치는 컨트리뮤직 애호가였다.
«1963년: 5세의 나이에 마이클 잭슨은 가수로서 대성할 것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마이클과 그의 네 명의 형들은 함께 연주를 시작했고 매니저 역할은 부친인 조셉이 맡았다.
«1968년: 모타운 레코드사는 마이클 형제로 구성된 잭슨 파이브와 계약을 맺었다. 잭슨 가족은 곧바로 캘리포니아주 LA로 이사했다. 소울풍의 사운드와 독특한 춤사위로 잭슨 파이브는 데뷔 직후 큰 인기를 끌었다. 첫 번째 싱글 앨범인 ‘I want you back’이 1969년 11월 발매됐다.
«1970년: 잭슨 파이브는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와 같은 히트곡을 계속 만들어냈다. 마이클은 11세의 나이에 잭슨 파이브의 리드보컬이 됐고 음반업계의 유망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975년: 잭슨 파이브는 모타운 레코드를 떠나 에픽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잭슨 파이브에서 잭슨스로 팀명을 바꿨다. 큰 변화가 있었지만 인기는 여전했다. “Enjoy Yourself” “Shake Your Body”는 공전에 빅히트를 쳤다.
«1979년: 마이클 잭슨이 성인이 된 후 첫 솔로앨범을 냈다. 어린 시절(1972년) 솔로앨범을 낸 적이 있는 마이클은 이 앨범으로 빅스타 탄생을 예고했다. 퀸시 존스가 프로듀싱을 한 첫 앨범 타이틀은 “Off the Wall”이었다. 이 음반은 무려 7백만 장이나 판매됐고 앨범에 있는 노래 중 무려 4곡이 음악 차트 톱10 안에 드는 선전을 했다.
«1982년: 마이클 잭슨이 낸 두 번째 솔로앨범은 그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두 번째 앨범명은 “Thriller”였다. 이 앨범에 수록된 “Billie Jean” “Beat it”은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쳤고 그의 앨범은 역대 최다 판매(2천6백만 장)를 기록했다. 전 세계적으로는 4천만 장이나 판매됐다. 이 두 노래는 뮤직비디오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개국된지 얼마되지 않은 MTV가 세계적인 방송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4년: “Thriller”는 1984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10개 부문에 후보에 올랐고 이 중 8개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사상 유례 없는 일이었다. 악재도 있었다. 그는 펩시콜라 선전 촬영 중 화재로 부상을 당했다.
«1985년: 부상을 딛고 일어선 마이클은 라이오넬 리치와 함께 “We are the World”라는 노래를 작곡했다. 이 노래는 전 세계 팝스타들이 함께 불러 아프리카 빈곤을 전 세계에 알렸다.
«1987년: 마이클은 당당히 ‘팝의 황제’가 됐다. 음악 산업을 지배했던 그는 세 번째 앨범을 냈는데 타이틀은 “Bad”였다. 수록곡 중 5곡이 음악차트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앨범 8백만 장이 팔렸다.
«1988년: 마이클은 네버랜드를 만들어 그곳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자서전 ‘Moonwalk’를 출간했다. 여호와의 증인과 관련된 문구를 온 집안에 새기는 일을 중단했다.
«1991년: 마이클이 4번째 앨범을 냈다. 타이틀은 “Dangerous”. 퀸시 존스가 아닌 테디 라일리가 프로듀싱을 맡았다. 전 세계적으로 2천만 장이나 팔렸지만 마이클 잭슨 시대가 저무는 것 아닌가 라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뮤직 비디오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특히 “Black and White”라는 노래의 뮤직 비디오는 무려 11분짜리였는데 빅히트로 폭스 방송사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도록 했다.
«1992년: 소니 뮤직과 15년 계약을 맺었다. 계약금은 약 10억달러로 추산.
«1993년: 마이클 잭슨은 14년 만에 TV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 자신이 피부 색깔을 바꾼 이유는 피부 질환인 백반(vitilligo)이라는 병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마이클은 이 방송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자신에 폭행을 가했고 이로 인해 아버지를 두려워했다고 고백했다. 같은 해 마이클의 친구였다는 13세 소년이 잭슨을 성폭행으로 고소했다. 잭슨은 혐의를 부인했다. 잭슨은 악재가 겹쳐 진통제 과다사용으로 인한 문제로 치료가 필요했고 이로 인해 월드투어를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1994년: 잭슨은 13세 소년 성폭행과 관련된 민사소송에서 약 1천만 달러에서 2천만 달러(추정)를 주기로 합의하고 소송을 마무리지었다. 형사소송은 없었다. 이유는 희생자라고 주장하는 13세 소년이 법정에서 증인으로 나설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마이클은 3월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MTV 비디오 뮤직 시상식장에서 너무 오랫동안 키스를 해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1995년: 잭슨의 새 앨범 “HIStory”가 발매됐다. 미국 내에서 2백만 장, 세계적으로 1천2백만 장이 팔렸다. 기대한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됐다.
«1996년: 마이클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2년 좀 못되는 결혼생활을 한 후 이혼했다. 마이클은 곧바로 간호사 출신 데보라 로우와 결혼했다.
«1997년: 로우는 아들 프린스 마이클을 낳았다.
«1998년: 로우는 딸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을 낳았다.
«1999년: 마이클은 두 번째 여인인 간호사 출신 데보라 로우와 이혼에 합의했다. 마이클은 법정 중재를 통해 자녀는 자신이 키우기로 합의했다.
«2001년: 마이클은 록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그러나 그의 새 앨범 “Invincible’은 흥행에 실패했다. 전 세계적으로 6백만 장을 판매하는 데 그쳤다. 잭슨은 1989년 이후 처음으로 미국에서 콘서트를 했는데 장소는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이었다.
«2002년: 마이클은 세 번째 자녀인 프린스 마이클 2세를 4층 발코니 밖으로 던지는 시늉을 해 전세계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잭슨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큰 실수를 했다. 너무 흥분해 그런 행동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2003년: “Living with Michael Jackson”이라는 다큐멘타리가 방송된 후 또 한번 폭풍을 맞았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마틴 바쉬르가 진행했던 이 다큐에서 잭슨은 “어린 소년과 잤다”고 말해 어린이 성추행범으로 다시 몰렸다. 마이클은 이에 대해 “성적인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이 다큐에서 마이클은 아버지를 떠올리며 “아버지는 우리가 연습을 할 때 허리띠를 들고 제대로 하지 않으면 찢어버릴 것이고 혼내줄 것이다 라고 위협했다”고 말했다. 마이클은 성인이 된 후에도 아버지의 어린시절 학대로 인해 우울증이 자주 찾아왔고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2005년: 마이클은 ‘시민 대 잭슨 재판’에서 아동 성폭행과 관련된 10개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09년: 마이클은 3월5일 자신의 마지막 콘서트 일정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마이클은 “내 생애에 마지막 콘서트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몇몇 콘서트는 그러나 취소되거나 연기됐다. 잭슨은 6월25일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잭슨가의 변호사인 브라이언 옥스맨에 따르면 잭슨은 LA 인근 자택에서 쓰러졌고 바로 아래 동생인 랜디에 의해 발견됐다고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