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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4)] 퀸시 존스와 함께 만든 앨범 'Thriller'

퀸시 존스는 마이클의 소울 메이트였다

등록일 2023년11월23일 01시25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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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from Shutterstock

 

4) 마이클의 퀸시 존스와의 만남 

잭슨 파이브(the Jackson Five)가 1969년 데뷔했을 당시 그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1년 만에 이 밴드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룹으로 인정받았다. 잭슨 파이브가 주인공이 된 TV 만화 영화도 제작됐다.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자, 모타운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 

 잭슨 파이브 일원 중 가장 인기가 높았던 마이클 잭슨의 솔로 싱글을 준비했던 것. 첫 번째 싱글 앨범은 ‘Got to Be There’였다. 1971년 발매된 이 싱글 앨범은 100만 장이나 팔렸다. 이는 마이클 잭슨이 ‘팝의 제왕’이 되는 준비 단계가 됐다. 마이클은 1972년에 두 번째 솔로 앨범을 냈는데 타이틀은 ‘벤(Ben)’이었다. 벤은 마이클이 솔로 가수가 되어 처음으로 음악 순위에서 상위에 오르도록 했다.

 마이클이 싱글 앨범을 내자 형 저메인도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재키도 따로 음반을 냈다. 저메인의 음반은 빅히트를 쳤지만 재키의 음반은 판매가 저조했다. 이렇게 속속 솔로 활동을 선언한 형제가 많았음에도 이들은 1972년 다시 모여 새 음반을 발표했고 영국 투어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전보다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부분적인 성공은 있었다. 1972년 잭슨 파이브 쇼가 CBS-TV에 의해 전국으로 방송되는 등 인기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다양한 활동이 시작되고 통제받는 시스템에서 벗어나길 원했던 잭슨 파이브는 1976년 에픽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었다. 에픽 레코드사와 함께 만든 잭슨 파이브 앨범의 판매는 그러나 저조했다. 반면 마이클의 개인 앨범은 빅히트를 쳤다. 마이클은 에픽 레코드사로 옮기면서 음악 산업에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점점 인기가 치솟자 마이클은 영화에 출연하기에 이르렀다.

 인생에 큰 영향 미친 영화 출연

 그는 1978년 제작된 ‘The Wiz’라는 영화에 다이애나 로스와 공동 주연으로 출연했다. ‘오즈의 마법사’ 이야기를 기초로 한 이 영화에 출연하면서 마이클은 자신이 연기에도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됐다. ‘The Wiz’는 많은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이 영화에 출연한 경험은 마이클의 남은 커리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른 제작자들은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새 영화 출연을 제의했다. ‘A Chorus Line’이라는 영화였는데 마이클은 자신의 역할이 ‘동성애자’임을 알고 거절했다. 마이클의 거절은 곧 화제가 돼 그의 성 정체성이 갑자기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마이클은 21세가 되던 1979년 자신만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아버지와 연장 계약을 하지 않았다. 마이클이 이런 결정을 내리자 부친인 조 잭슨은 엄청나게 화를 냈다. 마이클은 그러나 자신의 미래를 위해 최고의 결정을 했다고 생각했다. 마이클은 한 인터뷰에서 “내 뜻과 상관없이 일 처리가 되는 게 싫었다. 가족과 사업이 얽히면 민감한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가수로서 배우로서의 활동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마이클은 1979년 4월20일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지와의 인터뷰에서 가수로서 10년 동안의 삶을 정리했는데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는 걸 즐겼기 때문에 행복하게 가수 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만약 억지로 했다면 미쳐버렸을지 모른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우린 자연스럽게 모든 걸 하게 되었다. 그래서 끊임없는 공연과 투어에 대해 그는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마이클은 음반 사업에 깊숙이 관여했다. 자신의 음반이 미국과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판매되는지, 수익은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알고 싶어했다. 일을 맡기고 그저 잘 되겠지 하고 믿는 게 아니라 자신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어 했다. 마이클은 자신의 힘으로 음반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퀸시 존스와의 만남

그는 영화 ‘The Wiz’ 작업을 하면서 음반 제작자인 퀸시 존스를 만났다. 퀸시는 이 자리에서 마이클에게 다음 음반 제작을 돕겠다고 말했다. 다음 음반의 제목은 ‘Off the Wall’이었다. 1979년에 발매된 이 앨범은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전 세계적으로 2천만 장이 판매됐던 것. 그러나 마이클은 이 ‘성적’에 만족하지 않았다. 다음 앨범은 반드시 더 큰 인기를 끌게 할 것이라고 그는 다짐했다. 그는 역대 최다 판매를 기록하는 앨범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 음악을 시작으로 그는 21세기의 팬들이 기억하는 그 마이클 잭슨이 되기 시작했다. 음악이나 춤이 세계적인 마이클 잭슨이 되도록 이끈 것이 Off the Wall이었다.

바로 다음 앨범은 마이클 잭슨이 세계적인 스타가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2년 세상에 나온 것이 ‘Thriller’였다. 퀸시 존스와 다시 합작으로 만든 이 앨범은 마이클의 생각대로 역사상 가장 많이 판매된 앨범으로 기록됐다. 이 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1억 장 이상(비공식 판매를 포함한 추정)이 판매된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 시절 마이클 잭슨이 그의 형제들과 함께 스타가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다이애나 로스였다면 청년의 잭슨이 세계적인 스타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퀸시 존스다. 

퀸시 존스는 미국의 레코드 프로듀서, 작곡가, 편곡가, 그리고 영화 및 텔레비전 프로듀서다. 그는 2023년 현재 80회의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고 28회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는 또한 1992년에는 그래미 레전드 상을 수상했다. 

존스는 그의 다재다능한 재능과 음악 업계에 대한 깊은 이해로 유명하다. 그는 재즈, 팝, R&B, 그리고 힙합과 같은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하며 음악의 경계를 넓혔다. 존스는 원래 유명한 인물이긴 했지만 마이클 잭슨의 앨범 '스릴러'와 '배드'를 프로듀싱해 전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프로듀서가 됐다. 

‘Thriller' 앨범의 곡들은 MTV의 부상과 음악 비디오를 유용한 홍보 도구로 활용했다. 퀸시 존스는 또한 잭슨의 '배드(Bad)' 앨범을 작업했으며, 이 앨범은 공식적으로 약 4천6백만 장이 판매되었다. 이는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협력한 작품이었다. 

2009년 6월 25일, 잭슨이 사망한 후, 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비극적이고 예기치 못한 소식에 나는 완전히 충격을 받았다. 마이클이 이렇게 젊은 나이에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다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신은 '더 위즈'에서 우리의 영혼을 함께 하게 해주었고, 80년대에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일들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오늘날까지도 '오프 더 월', '스릴러', '배드' 등 함께 만든 음악은 세계 곳곳에서 연주되고 있으며, 이는 그가 모든 것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재능, 우아함, 전문성, 그리고 헌신을 보인 그는 완벽한 엔터테이너였고, 그의 기여와 유산은 영원히 세계에 남을 것이다. 오늘 나는 내 동생을 잃었고, 내 영혼의 일부도 그와 함께 갔다."

퀸시 존스는 마이클의 소울 메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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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훈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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