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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3)] 다이애나 로스와의 만남과 스타로서의 삶

"높은 곳에 있으려면 팬들에게 무례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 마이클

등록일 2023년11월15일 14시24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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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잭슨가 자녀들의 모습. 앞줄 왼쪽부터 재넛(Janet), 랜디(Randy), 라 토야(La Toya), 레비(Rebbie).뒷줄 왼쪽부터 재키(Jackie), 마이클(Michael), 티토(Tito), 매리언(Marlon). 사진 - CBS Television.

 

3) 다이애나 로스와의 만남과 스타로서의 삶

마이클 잭슨의 아버지 조 잭슨은 1965년 잭슨家 형제들이 세상의 무대로 나올 준비가 됐다고 판단했다. 연습을 시작한 지 3년 만이었다. 아버지 조 잭슨이 먼저 한 일은 형제 밴드를 지역에서 열린 ‘탤런트 쇼’에 출전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마이클 잭슨은 7세였다.

 

'탤런트 쇼’가 열렸던 장소는 인디애나주 개리에 있는 루스벨트 고교였다. 잭슨 부부는 큰 기대를 걸었다. 어머니 캐서린 잭슨은 퍼포먼스를 위해 조끼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입혔다.

 

잭슨 밴드는 “My Girl”을 부르며 춤을 췄다. 결과는 물론 1등이었다. 재주꾼으로 구성된 밴드가 3년 동안 연습을 했으니 다른 출전자들은 비교 대상도 아니었다.

 

잭슨 밴드는 이후에도 다른 탤런트 쇼에 출전해 모두 1위를 차지하는 감격을 누렸다. 여기저기서 출연 요청이 쇄도했다. 그룹 이름도 정해졌다. 잭슨 파이브(The Jackson Five)였다.

 

 

"팁이 너무 많아 바지가 무거웠다"-마이클

출연료를 받은 첫 공연은 나이트 클럽 ‘미스터 러키스(Mr. Lucky’s)’에서 열렸다. 잭슨 파이브는 일주일에 무려 6일 동안 공연을 했고 하루 공연횟수는 5회였다. 때로는 하루 7차례 공연을 할 때도 있었다. 잭슨 파이브의 하루 출연료는 5달러에서 8달러 사이였다.

 

객석에서 돈을 던져주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는 잭슨 파이브에게는 큰 보너스였다. 마이클은 돈을 줍기 위한 댄스를 개발했다. 그냥 가서 돈을 줍는 게 아니라 멋진 댄스 동작으로 화려하게(?) 돈을 주웠다. 이는 잭슨 파이브 공연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마이클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팁을 너무 많이 받아 주머니가 꽉 찬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 무게로 바지가 아래로 내려갈 때가 잦았다.”

 

이후 잭슨 파이브가 상당한 출연료와 팁을 챙길 수 있게 되자 아버지 조 잭슨은 하던 일을 그만두고 풀타임 매니저가 되었다. 잭슨 가족은 주말마다 폭스바겐 미니버스를 빌려 다른 주로 이동해 공연을 하곤 했다. 잭슨 가족은 공연출연료로 생활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월요일 새벽이었고 아이들은 잠깐 잠을 잔 후 학교에 가야 했다. 

 

잭슨家 아이들에게는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특히 어린 마이클에게는 벅찬 스케쥴이었다. 공연으로 바빴던 마이클은 친구를 사귈 기회가 점점 줄어들었다. 마이클은 받은 용돈으로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며 맛있는 것도 사주곤 했지만 그에게 가장 편한 곳은 무대 위가 되고 말았다. 그는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것을 점점 더 좋아하게 됐던 것이다. 

 

마이클 잭슨에게 취미겸 기쁜 유일한 일은  제임스 브라운과 재키 윌슨의 라이브 공연을 보는 것이었다. 그는 무대 뒤에서 그들의 노래와 춤을 따라하는 재미로 살았다.

 

첫 번째 싱글 앨범-주목 받지는 못해

1967년 잭슨 파이브는 마침내 첫 번째 앨범을 냈다. 스틸타운이라는 음반 제작사와 함께 작업해 첫 번째 싱글앨범을 냈던 것이다. “Big Boy”라는 노래였는데 마이클이 리드보컬이었다. 지역 사회에서는 인기를 끌었지만 전국구 스타가 되기에는 모든 게 부족했다. 

잭슨 파이브가 유명해진 것은 1968년부터다. 이 그룹은 마이클이 10세였던 당해 뉴욕주 할렘시에 있는 아폴로 극장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를 얻게 됐다. 이 극장에서 ‘탤런트 쇼’가 열렸고 잭슨 파이브는 다시 챔피언이 됐다. 관객들은 잭슨 파이브의 공연이 끝나자 기립박수를 쳤다. 그 행사가 끝난 후 잭슨 파이브는 같은 장소에서 출연료를 받고 공연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글레이디스 나이트와 더 핍스가 아폴로 극장에서 정기 공연을 했는데 글레이디시는 잭슨 파이브가 노래하는 것을 듣고 “대단하다”고 말했다. 글레이디스는 곧바로 자신이 속한 모타운에 잭슨 파이브를 소개했다. 

 

 

다이애나 로스 그리고 모타운과의 인연

  

비슷한 시기에 유명가수 다이애나 로스가 인디애나에서 잭슨 파이브를 만났다. 로스는 당시 모타운의 사장인 베리 고디와 연인 사이였다. 로스는 고디 사장에게 잭슨 파이브를 만날 것을 강력히 추천했다. 고디는 잭슨 파이브를 로스엔젤레스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연주하도록 했고(고디가 집으로 초대한 것이 아닌 연주 비디오만 봤다는 설도 있음) 이 일이 있은 2개월 후 전격적으로 계약을 맺었다. 

 

재키는 "아버지는 당시 2개월 동안 전화를 못 쓰게 했다. 이유는 모타운의 전화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고 회상했다. 혹시나 전화를 못 받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결국은 매니저였던 아버지가 모타운에 전화를 걸어 계약을 성사시켰다. 

 

모타운과의 계약은 마이클과 잭슨 가족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마이클과 형제들은 앨범을 낼 동안은 다이애나 로스의 집에 머물렀다. 로스는 마이클의 ‘캘리포니아 엄마’였다. 마이클은 로스와 1년6개월 정도를 함께 살았다. 이 기간에 다이애나 로스는 마이클 잭슨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디즈니랜드로 놀라가는 등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로스는 또한 마이클에게 그림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 예술적인 감각을 키워줬다. 마이클은 어른이 된 후에도 “로스는 나의 어머니이자 애인이자 누나였다”라고 말했다. 마이클은 다이애나 로스가 결혼 발표를 했을 때 “솔직히 질투를 많이 했다. 나는 다이애나를 영원토록 사랑할 것”이라고 자신의 자서전인 ‘문워크(Moonwalk)’에 기록했다.   

 

마이클의 모친인 캐서린은 인디애나주에서 라 토야, 랜디, 재닛을 돌봐야 했다. 인디애나에 남은 가족은 얼마 후 캘리포니아로 이사해 온가족이 함께 살 수 있게 됐다. 첫 번째 앨범 발표와 함께 전국 방송인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한 잭슨 파이브는 스타로서의 본격적인 삶을 살기 시작했다. 

 

모타운과의 첫 번째 앨범 빅히트

1969년 첫 번째 싱글 앨범 수록곡인 ‘I Want You Back’은 빅히트를 쳤다. 마이클은 리드보컬이었다. 음악 차트에서 1위에 올랐고 6주 만에 무려 2백만 장의 앨범이 판매됐다. 마이클과 그의 가족이 본격적으로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된 것은 1970년 “ABC”라는 후속 앨범이 나온 후다. 이 앨범은 출시 3주 만에 2백만장이 팔렸다. “ABC”라는 노래로 잭슨 파이브는 그래미 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마이클은 “열심히 노력한 대가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너무 기뻤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다른 대가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70년 당시 롤링스톤 매거진은 잭슨 파이브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I want you back"은 아레사 이후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소울 뮤직이다."

 

또한, LA 타임스는 1970년 6월14일자 기사에서 "프랭키 라이먼, 스티비 원더와 같은 어린 시절 데뷔했던 가수들이 이미 성공을 거뒀지만 마이클과 그의 형제들이 보인만큼은 아니었다. 이들의 앨범 판매와 공연 판매에서 보여주는 영향력은 엄청나다"라고 썼다. 이 신문에 따르면 잭슨 파이브는 같은해 5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공연에서 1만3천석의 자리를 모두 매진시켜다. 마이클이 존경하는 제임스 브라운은 어린 마이클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고 이 신문은 적었다.

 

 


마이클이 말했던 성공에 대한 대가는 다음과 같다.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그들의 사생활침해는 더욱 심해졌다. 잭슨 가족은 1971년 캘리포니아주 엔시노에 방 13개짜리 집에서 살았는데 아이들은 폭발적인 인기로 인해 공립학교에 갈 수 없었다. 공립학교에서는 끊임없는 사인세례를 견뎌내야 했다. 그들은 따라서 LA에 있는 월튼 스쿨이라는 사립학교에 다녀야 했다. 잭슨 파이브는 공연이 있을 때에는 모타운이 고용한 가정교사의 도움으로 밀린 공부를 해야 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팬들이 몰려들었다. 얼굴이 노출되지 않게 하려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색안경을 꼈어야 했다. 마이클은 원래 활발하고 열정적인 아이였는데 팬들의 관심이 높아지자 점점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조용한 아이가 됐다. 마이클은 “팬들은 내 머리를 잡아당기고 우리 몸을 마구 주물러댔다. 폭발할 것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유명해진 것이 마이클의 성품을 바꿔놓은 것이다. 

마이클은 그러나 그런 팬들을 무례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높은 곳에 있으려면 팬들에게 무례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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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기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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