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레전드(1) 로베르토 클레멘테: 들어가는 말]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1960~70년대 메이저리그 야구(MLB)에서 활약한 스타 선수로, 통산 타율 3할1푼7리, 3000안타, 홈런 240개의 뛰어난 기록을 보유했다. 그는 1972년 니카라과의 지진 피해자를 돕기 위해 구호물자를 운반하던 도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클레멘테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팀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2023년 현재에도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사망 후, 미 전국에서 큰 애도의 물결이 일었고, 그를 기리기 위한 여러 행사와 상이 제정되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날'을 공식 행사로 지정해 그를 기린다. 클레멘테는 그의 봉사 정신과 야구 선수로서의 뛰어난 업적으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고 있다.
Roberto Clemente. Photo from 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
■ 그가 왜 거기로 나가?
메이저리그 정규 시즌이 끝나고 3개월이 지난 1972년 12월 23일. 니카라과 마나과 지역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진도 7.2의 대지진이 일어났고 사망자 수가 1만 명이 넘었다. 당시 미국의 라틴계 선수 중 가장 유명한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사회봉사에 매우 헌신적이었는데 지진 피해자를 돕고자 니콰라가로 구호품을 보냈다. 구호품을 두 차례 보냈는데 모두 푸에르토리코 군부가 중간에서 착복하고 가로챘다. ‘정의의 사도’와 같은 클레멘트는 재난이 발생한 8일 후인 12월 31일 3번째 구호품을 직접 들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그가 타고 있던 DC-7 수송기는 너무 낡았다. 낡은 수송기에 구호품의 무게는 무려 2톤이나 됐다.
이륙 후 얼마 되지 않아 엔진에서 불이 났다. 수송기는 곧이어 바다로 추락했다. 수송기에 탑승한 5명 중 조종사의 시신만 발견되었고 클레멘테를 포함한 다른 4명의 시신은 발견되지도 않았다. 사고 원인은 과도한 화물 적재, 엔진 결함, 그리고 악천후였다. 클레멘테는 자신의 조국 푸에르토리코가 아닌 이웃 나라 니카라과의 난민을 도우러 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는 타인을 돕는 것의 의미를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다. 2003년 2월 8일 자 보스턴 글로브 기사에는 클레멘테의 멋진 말이 남아 있다. 절친 클레멘테가 실종되자 구조작업에 나선 바 있는 파나마 출신의 포수 매니 상기옌는 보스턴 글로브지와의 인터뷰에서 불행한 사고로 세상을 떠난 동료에 대해 "인종 차별과 싸운 사람이었다. 그는 선수로서도 늘 준비된 사람이었다. 보통 선수들은 스프링캠프에 35파운드 살이 쪄서 오는데 그는 5파운드 가벼운 몸으로 나타났다. 비시즌에 그는 고향인 푸에르토리코에서 주급 40달러를 받고 겨울 리그에서 뛰기도 했다"라고 설명했다.
클레멘테는 타석에서 최고의 선수였을 뿐만 아니라 우익수로서도 환상적인 수비수였는데 그가 홈플레이트로 공을 던질 때면 마치 95마일의 강속구를 뿌리는 투수 같았다고 상기옌은 회상했다. 클레멘테는 우익수로서 에러가 단 한 개도 없던 시즌도 있었다. 그가 골드글러브를 12차례 수상한 것을 보면 그의 수비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 - 셔터스톡. 미국 우표의 표지 모델이 됐던 클레멘테.DECEMBER 1, 2015: A stamp printed in USA dedicated to Legends of Baseball shows Roberto Clemente
1973년 1월 2일 자 피츠버그 프레스는 그의 죽음을 대서특필했다. 밥 스미직 기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도시는 충격에 빠졌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은 비통에 빠졌다. 파이어리츠 구단은 절망 속에 있다. 로베르토 클레멘테, 위대한 인물은 사망했다. 놀라운 재능을 뽐낸 우익수 클레멘테는 지난 일요일 푸에르토리코 해안가에서 비행기 추락사로 사망했다. 향년 38세.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내셔널리그 타격왕 4회, MVP 1회, 메이저리그 역사상 3000안타를 기록한 11번째 선수. 지난 시즌 그는 부상에서 돌아와 앞으로 4-5년은 더 뛰고 싶다고 했다. 38세에도 그는 놀라운 활약을 펼쳤고 4-5년 더 뛰는 것에 의문 부호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조 브라운 파이어리츠 단장은 "우리는 위대한 야구 선수이자 위대한 인물을 잃었다. 사람들은 그가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몰랐다."라고 말했다.
로베르토 클레멘테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피츠버그 프레스는 신문 전면을 할애해 그의 인생을 소개했다.
위대한 홈런 타자 행크 애런은 "그는 늘 다른 사람을 고려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비록 그의 상대 팀 선수였지만 그는 타격할 때 자신만의 노하우를 나와 나누곤 했다"라며 클레멘테의 이타적 성품에 대해 칭찬했다.
■ 영화 같은 인생, 영화 같은 마무리
클레멘테는 피츠버그 구단의 운명을 바꿔 놓은 선수였다. 그가 전국적인 스타로 발돋움한 시기는 1971년 월드시리즈부터다. 이전에는 히스패닉 선수라는 이유로 미 언론이 차별적 보도를 했다. 클레멘테는 타인을 늘 돌보는 사람이었지만 미국 내에서의 인종 차별에 대해서는 여과 없이 불만을 표출했던 선수였다.
뉴욕 데일리는 그의 사망과 관련된 특집판(1973년 1월 2일 자)에서 ‘클레멘테는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거액의 광고 수익을 올리는 백인 선수들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는 중남미에서 광고모델로 나서서 수익을 올리면 자선단체에 전액 기부한다고 말하곤 했다’라고 전했다. 그는 두 가지를 말하고 싶었다. 첫째는 자신이 야구계에서 좋은 성적을 내도 히스패닉이기에 거액 광고모델로 나설 기회가 없고, 둘째는 백인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거액을 버는 선수들이 자신의 부를 쌓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싶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1971년 월드시리즈 7경기에서 클레멘테는 4할1푼4리의 타율에 홈런 2개를 기록한 후 MVP로 선정됐다. 피츠버그는 최종 7차전에서 클레멘테의 홈런 덕분에 2-1로 극적인 승리를 거둬 챔피언이 됐다. 이때부터는 그도 슈퍼스타 대접을 받았지만, 이전까지는 야구 잘하는 외국 억양이 강한 푸에르토리칸 정도로 여겨졌다.
클레멘테는 바로 다음 해인 1972년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생애 3천 번째 안타를 때려내며 현역 말년에 겹경사를 맞았다. 그는 그러나 시즌이 끝나고 3개월 후인 1972년 12월 31일, 지진 피해를 본 니카라과 마나과로 구호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가 죽음을 맞았다.
보스턴 글로브 지의 로베르토 클레멘테 특집판
■ 죽어서 이름을 남긴 클레멘테
그의 죽음은 미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전국에서 애도의 물결이 일었고 미국 야구 기자단 협회는 1973년 8월 8일 그를 명예의 전당 선수로 헌액했다. 이는 역사적인 일이었다. 원래 명예의 전당 투표 규정에는 선수가 필드를 떠난 후 5년이 지나야 후보 자격을 얻을 수 있는데 클레멘테에게는 예외가 적용됐고 그는 역사상 첫 라틴계 명예의 전당 헌액 선수로 기록됐다. 당시 헌액 행사에서 메이저리그 사무국 측은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제정해 매년 사회봉사를 열심히 하는 선수들에게 이 상을 수여한다고 발표했다.
30년이 지난 2002년에는 버드 셀릭 당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가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날(9월 15일)'을 리그 공식 행사일로 정해 전국적으로 그를 기념하는 행사하도록 했다. 박애주의자였던 클레멘테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이름은 30년 후에도 이 땅에서 기억됐다.
[클레멘테의 주요 기록]
15회 올스타
12회 골드글러브
4회 타격왕
2회 월드 시리즈 우승
대통령 자유 훈장 수상
■ “나는 피부색을 믿지 않는다” - 인종 차별이 심한 미국 사회에 일침
클레멘테는 1934년 8월 18일 푸에르토리코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였고 그는 7남매 중 막내였다. 18세 때 푸에르토리코 프로팀에서 뛰고 있던 클레멘테를 가장 먼저 발견한 미국 구단 관계자는 브루클린 다저스 구단의 스카우트 알 캄파니스였다. 캄파니스는 이후 다저스의 단장으로 활약했다. 당시 다저스는 라틴 아메리카 시장 개척에 나선 팀들 중 선두 주자였다. 다저스보다 한발 늦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3만 달러라는 당시에는 거액의 금액을 제시하여 입단 보너스까지 주려고 했지만, 클레멘테는 자신을 먼저 발견한 다저스 구단과 1만 달러 계약을 택했다.
클레멘테는 이후 다저스 산하 마이너리그팀인 몬트리올 로열스에서 한 시즌을 뛰었고 다음 해 피츠버그로 이적해 1955년 메이저리그 데뷔를 했다. 그는 야구 실력으로 필드에서 인정받았지만, 대기실 밖에서는 부상과 언어 장벽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는 이후 미국 야구와 미국 사회에서 인종적, 민족적 장벽을 계속해서 깨트리는 인물의 대명사가 됐다.
1972년 그는 “나는 피부색을 믿지 않는다. 나는 사람을 믿는다. 나는 항상 모든 사람을 존중하며, 신과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에게 절대로 미워하거나, 그들의 피부색 때문에 누군가를 싫어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다. 나는 미국에 오기 전까지 인종 차별이 무엇인지 몰랐다”라고 과거를 회상하며 말하곤 했다.
그가 영어로 말할 때 스페인어 악센트 때문에 미국의 신문 기자들은 그를 조롱하곤 했다. 클레멘테는 인종 차별 사회에서 흑인으로 여겨지며 차별을 받았다. 당시 미국 언론은 그를 “Bob” 또는 “Bobby”라고 부르려고 했는데 로베르토는 그러한 별명을 명확하게 거부했다. 미국인들은 Robert를 Bob으로 부르기를 좋아하는데 Roberto는 이름 그대로 ‘로베르토’라고 불러주기를, 그리고 써주기를 바랐다.
그는 다른 라틴 야구 선수들의 옹호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클레멘테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나의 최대 만족은 라틴 아메리카인과 흑인에 대한 오래된 편견을 지울 때 온다”라고 말했다. 클레멘테의 가까운 친구이자 스페인어 스포츠 캐스터인 루이스 마요랄은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히스패닉 선수들에게 재키 로빈슨과 같은 영웅이었다. 로빈슨은 흑인 야구 선수들이 메이저리그 야구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한 것처럼 클레멘테는 히스패닉 선수에게 그런 역을 맡았다”라고 말했다.
클레멘테는 앞서 소개한 것처럼 원래 다저스 선수였다. 무명 시절 다저스와 1만 달러에 사인했던 클레멘테는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당시 규정에 따르면 4천 달러 이상의 계약금을 받은 선수가 풀시즌을 뛰지 않으면 다른 팀이 드래프트를 통해 데려갈 수 있는 조항이 있어 피츠버그가 그를 낚아채 갔다.
다저스는 클레멘테를 꼭꼭 숨겨뒀지만 그를 눈 여겨봤던 피츠버그 구단은 1954년 마이너리그 드래프트에서 그를 데려오는 데 성공했고, 이 팀이 다저스에 대가로 지급한 금액은 4천 달러에 불과했다. 당시 피츠버그는 3년 연속 100패를 기록한 팀이었다.
야구계의 웃음거리였던 피츠버그는 클레멘테를 영입한 후 완전히 다른 팀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피츠버그는 1958년부터 완전히 다른 팀이 됐다. 1958년부터 1972년까지 거의 매년 5할 승률을 기록했고 월드시리즈 챔피언 등극 2회, 디비전 우승 4회라는 좋은 기록을 남겼다. 클레멘테가 뛰었던 기간이 피츠버그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였다고 할 수 있다. 피츠버그는 90년대 초반 배리 본즈 등을 앞세워 3년 연속 디비전 챔피언 자리에 올랐지만,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되지는 못했다.
Photo from Roberto Clemente Museum
■ 메이저리그에서의 화려한 성적
클레멘테는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했던 60년대와 70년대에 13차례나 3할 타율을 기록했다. 1955년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서 메이저리그 데뷔를 한 후 1972년까지 줄곧 한 팀에서 뛰며 그는 통산 타율 3할1푼7리, 3000안타, 홈런 240개, 1305타점을 기록했고, 1966년에는 내셔널리그 MVP로 선정됐다. 당해 그의 기록은 3할1푼7리의 타율에 홈런 29개, 119타점이었다.
클레멘테는 또한 리그 타격왕 등극 4회, 올스타 선정 12회, 골드글러브 수상 12회 등 화려한 경력을 가진 선수였다. 두 차례 월드시리즈에 출전했던 클레멘테는 1960년 월드시리즈에서 3할1푼, 1971년 월드시리즈에서 4할1푼4리의 타율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