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뉴스등록
포토뉴스
RSS
자사일정
주요행사
맨위로

'한국이 사랑했어야 했던 화가' 남관

파리는 그를 왜 사랑했을까.. 파리에서 100여 차례 출품

등록일 2022년12월13일 14시03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기사글축소 기사글확대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Photo by NJT

 


남관(南寬). ‘남쪽의 관대함’이란 의미다. 이는 화백의 이름이다. ‘(한반도) 남쪽에서 관대함’을 경험하지 못했던 남관. 그는 이중섭, 김환기 등과 함께 한국의 5대 화백에 속할만한 인물이지만 ‘남쪽’은 그에 대해 관대하지 않았다. 


남쪽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불관(佛寬)’은 그의 예술성을 살렸다. 불관은 불란서의 관대함이란 의미로 기자가 만든 말이다. 그는 ‘파리가 사랑한 화가’였다. 남관은 프랑스 파리에서 100여 차례 작품전 출품을 했고 8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프랑스로 건너간다는 의미로 ‘도불(渡佛)’이란 단어가 있다. 그는 소위 말하는 ‘도불 작가’였다. 1950년대 도불 작가 중에는 권옥연, 김환기, 김흥수, 남관, 박영선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일본에서 유학한 30-40대 중진 작가였다. 이화여대 전유신 교수의 논문 ‘1950년대의 파리 진출 작가들과 한국현대미술의 국제화’에 의하면 당시 미술가들은 프랑스를 절대적인 미술의 중심지로 여겼다. 1960년 이후에는 미국으로 중심이 옮겨졌지만….


일본에서 미술을 배운 도불 화가들은 단순한 기법만 배웠다는 것을 깨닫고 일본의 영향을 벗어난 프랑스 예술을 배우고 싶어했다. 남관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미술의 한계 깨닫고 프랑스로 도불



남관은 소위 말해 ‘에콜 드 파리(École de Paris)’였다. ‘파리의 학파’ 또는 ‘파리의 기법’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 용어는 ‘기하학적 추상미술을 했던 프랑스의 외국인 미술가 또는 기법’을 의미했다. 남관도 당연히 에콜 드 파리에 속했다. 에콜 드 파리는 입체주의를 강조했다. 한국에서 입체주의에 이어 추상미술을 발전시킨 인물 중 한 명이 남관이다. 


남관은 ‘에콜 드 파리’ 학파 또는 기법의 영향을 받아 이를 한국에 전파했다. 


남관은 195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기틀을 마련했고, 1960년대 프랑스 평론가들 사이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아시아 작가 중 한 명으로 알려졌다. ‘파리가 사랑한 화가’라는 타이틀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프랑스 내 두 번째로 큰 아시아 예술품 박물관이자 유럽 내 다섯 번째로 큰 아시아 예술품 박물관인 세르뉘시 미술관은 남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남관(1911-1990)은 1950년대 한국 현대미술을 개척한 선구자 세대에 속한다. 한국전쟁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그의 작품에 지속적인 흔적을 남겼고 작품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의 기억 속에 새겨진 장면들을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그의 탐구는 대부분의 한국 전위 예술가들처럼 그를 당시 미술계의 중심이었던 프랑스로 이끌었다. 에콜 드 파리의 스타일은 분명히 이 황폐한 나라의 상황에 의해 생성된 회화적 요구 사항을 담고 있다. 


남관은 1955년 파리로 이주하여 Académie de la Grande Chaumière(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공부하고 점차 서정적 추상화의 어휘를 그의 작품에 통합했다. 흐릿하게 정의된 색상 필드 위에 그는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를 흩뿌렸다. 이러한 형태는 점차 한자의 모습을 띠게 되었고 수직 기둥으로 배열되어 인상이 고조되었다. 한국 예술가의 시각적 의식에서 문자 기호의 힘을 입증했다. 

2년 전 비엔날레 드 망통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남관은 1968년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그는 파리 미술계와의 관계를 유지했고 그의 예술적 스타일이 점차 서정적 추상화에서 벗어나 양식화된 표현 예술과 더 밝은 팔레트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종종 프랑스로 돌아와 그림을 그리고 그의 작품을 전시했다.“ 


이 정도면 ‘파리가 사랑한 화가’라는 표현이 지나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남관은 한국의 근대사와 현대사를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삶에서 뿜어낸 매우 드문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과 그의 활동은 한국 역사에 큰 의미를 품고 있다. 
 

그에게는 그러나 ‘친일파’라는 족쇄가 씌어 있다. ‘남관(南寬)의 예술세계 연구’라는 논문에서 이두연은 ‘친일파’ 혹은 ‘반민족’이라는 정치적 개념으로 매도당해 충격을 받은 남관의 말을 인용해 소개했다. 


“(친일파 주장 기사는) 나는 너무나도 이해하기 곤란한 기사라 누가 모략을 해서 만든 기사라는 것을 짐작했다. … 이 전람회에 출품하게 된 경유를 말하면 벨기움국과 프랑스의 문화협회 주최로 파리시가 관리하는 미술관 쁘띠 빨레(Petit Palais)에서 재불외국인작가들이 있었는데 대한민국 재불공관을 통해서 재불한국작가의 출품을 요청해왔다. 그래서 당시 김흥수씨와 필자 두 사람밖에는 없었으므로 자연히 우리 두 사람이 한국작가로서 한국공관을 통해서 김흥수는 <함흥풍경>을, 나는 <두노인>을 출품한 것이었다. … 내가 하고자했던 한국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한 독립적인 일, 나아가서는 국제성을 지닌 작품을 하려든 확신조차 희미해졌다. … 내가 단 한 가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싫어하는 바로 그것을 나를 보고했다고 하였기 때문에 나는 정신적인 타격을 한층 더 심하게 받았던 것 같았다.” (출처: ‘공간’지의 ‘원근기’)

 


'애국자'에게 '친일파'라니...


 

한국의 근대사와 현대사에서 ‘친일파’는 극복하기 힘든 굴레다. 친일파가 아닐지라도 그렇게 주장하는 소리만 들어도 사람들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는 일본으로 유학해 미술을 배웠지만, 일본에서 배운 미술에 회의를 갖던 사람이었다. 1940년대에 일본에서 미술연구소의 연구원이 되고 공모전에 출품하고 수차례 공모전 상을 받아 자리를 굳혔던 남관은 1945년 광복 소식을 듣고 20년의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서둘러 귀국했다. ‘친일파’였다면 안정된 자리를 뒤로하고 불안정한 대한민국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반민족’ 행위를 한 적이 없다. 오히려 한국전쟁 당시 해군 종군화가로서 전장을 다니며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던 화가다. 경향신문은 종군화가로서의 그의 작품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어두침침한 건물의 벽, 황폐한 뜰, 오래된 성이나 유적의 잔해들을 연상시키는 그의 작품에는 한국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남관 자신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종군화가로서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내 그림의 모티브는 자주 전쟁의 기억에서 온다. 벌판에 쓰러진 젊은 병사의 얼굴, 토막 나 뒹구는 팔다리, 시체 위로 쏟아지는 햇볕, 전란으로 우왕좌왕하는 군중의 모습…얼굴, 얼굴들을 나는 길 가다가 땅 위에 구르는 이끼 낀 돌 위에서도 보고 고궁의 퇴색한 돌담에서도 본다. 나는 돌에서 참 많은 역사를 본다. 태곳적부터 비바람에 씻기고 닳고 버려져서 지금에 있고 또 미래에도 남을 돌과 온갖 풍상을 겪고도 살아남는 인간의 얼굴이 비슷하게 여겨지는 것, 이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얼굴이다.”<남관, 꿈의 나라, 조선일보, 1973> 


그는 한민족의 전쟁으로 인한 아픔을 화폭에 잘 담았다. 그는 전쟁터에서 본 그 얼굴들을 구체적으로 그리지 않고 추상화를 통해 상처를 표출하고 어루만졌다. 


국민일보 손영옥 문화전문기자는 “남관은 작품세계가 인정받아 파리에 온 지 3년 만인 58년부터 ‘살롱 드 메’에 거듭 초대받았고 11년 만인 66년 망통 비엔날레에서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으로 대상을 받았다. 프랑스 정부와 파리시가 작품을 소장할 정도로 입지를 굳혔다.”라고 소개했다. 그는 한국의 아픔을 추상화에 담아 전 세계에 알린 애국자였다.
 

이런 그에게 ‘친일파’ ‘반민족’이라는 굴레를 씌운 이들은 상당히 의도적으로 이런 일을 했음이 자명한 일이다. 

 


한국 근대사와 현대사의 상징적인 인물



남관을 한국 근대사와 현대사의 상징적인 화가라고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는 너무나 배고픈 화백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화가들 대부분 그랬다. 이중섭, 김환기 등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들은 대부분 극도로 가난했다. 


남관은 일기를 썼는데 문화저널21은 그의 일기 일부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파리에서 값싼 빵, 감자, 우유만 먹었더니 머리가 다 빠졌다. 이 대머리는 고생스럽던 파리 생활의 선물이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순간이 가장 위대한 순간이며, 그 모든 것을 잊기 위하여 그림을 그렸다.”


국민일보의 문화전문기자 손영옥도 남관의 가난함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센강 변에서 관광객용 그림을 그려 팔아가며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유학, 한국전쟁과 종군화가가 됨, 가난한 도불 유학생이 됨, 비정형을 추구하는 시대의 새로운 미술 기조(앵포르멜) 도입 등은 그가 한국의 근대사, 현대사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말이 억지 주장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의 근대사와 현대사는 불합리함이 득세했던 시기이다. 불합리함, 혈연, 지연, 학연이 질서가 되었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를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다음은 남관이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예시이다. 


“1968년 제17회 국전에서 서양화분과위원장인 남관은 입상작 선정투표가 사전담합에 의한 돌려먹기식이라고 비난, 심사 도중 퇴장하여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큰 파문을 일으켰다. 종합심사 하루 전날에 ”대통령상은 XX 부문이다“라고 떠돌던 소문이 현실로 나타나고 대통령상, 국회의장상, 국무총리상 등 선정 득표수가 똑같이 나온 것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남관이 선정을 거부한 서양화 부문 문공부장관상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결정되자 크게 분개하여 심사장을 박차고 나와 사퇴를 발표해 버린 것이다. 실력이 우선하기보다는 지연, 혈연 등 인맥으로 결정되는 국전의 선정 풍토를 쇄신하고자 했던 그의 분노는 당시 국내 화단의 불합리한 관행에 쐐기를 박는 등 큰 변화를 일으켰지만, 남관 개인으로서는 질시와 회피의 대상이 되는 결과가 되어버렸다.”

 

Photo by NJT

 

 

필자의 추측이지만 아마도 이때 ‘친일파론’ ‘반민족론’이 힘을 얻지 않았을까 한다. 


그는 이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74년)을 수상했으며, 대한민국 문화훈장(1981년)도 받았다. 


이두연은 석사논문에서 남관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전통은 이어지되, 뿌리로, 속으로 이어져야 한다. 정신으로 이어져야 한다. 뿌리가 없이, 속이 비고, 정신은 빠져버린 채 형식만 강조되면, 그런 전통의 계승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올바른 예술문화의 발전은 그렇게 새로운 전통의 창조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런 예술의 발전, 정신의 발전 없이는 국가가 절대로 발전할 수 없다. … 좋아하는 일은 아무리 힘들어도 이겨낼 수 있다. 일하는 순간순간 그 일의 즐거움이 샘솟는다. 그것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희열이다. 그런 희열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인생은 행복하다. … 그래서 작가는 그것을 계속한다. 그것은 자유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방법으로써 하는 자유이다.” 


그는 근대사, 현대사를 살았고 살아왔고 살고 있는 이들에게 온몸으로 온 맘으로 온정성으로 말한다. 그는 단순한 화백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자신의 삶 안에 녹여낸 위대한 인물이다. 

 


'청송문화광광재단'에서 '파리가 사랑한 화가 남관' 특별전 진행



기자는 최근 청송문화관광재단이 주최하고 청송군, 청송군의회, 남관기념사업회, 구암농산이 후원한 ‘파리가 사랑한 화가 남관’이라는 특별전을 취재했다. 


그의 그림을 보며 대한민국의 역사가 그 안에 모두 담겨 있음을 체감했다. 그의 삶의 철학, 그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 인간에 대한 존엄성, 아픔과 희로애락이 그의 작품에 실려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신문지에 그렸던 작품들이다. 일본 유학 시절, 프랑스 유학 시절, 한국 거주 시절 모두 가난했던 그는 신문지에 그림을 그렸고 종이 쪼가리에 그림을 그렸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명화백은 종이를 가리지 않는다. 그는 어떤 종이에든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표현했다.


기자는 ‘파리가 사랑한 화가 남관’이라는 제목이 감사하면서도 불편했다. 한국은 왜 그를 사랑하지 못했을까? 이런 질문을 하며 ‘한국이 사랑했어야 했던 화가 남관’이라는 제목을 붙여주고 싶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 하면 김기창, 김환기, 도상봉, 박수근, 유영국, 이중섭, 천경자 등이 떠오른다. 이렇게 해야 했다. 김기창, 김환기, 남관, 도상봉, 박수근, 유영국, 이중섭, 천경자.

이제는 남쪽이 그에게 관대하기를 바란다.

 

 

Photo by NJT. 남관은 전쟁의 아픔을 사실 그대로 그리기보다는 추상화 형식으로 그려냈다. 전쟁의 아픔을 그는 그림으로 달랬다.

 

Photo by NJT. 남관 화백의 작품.

 

Photo by NJT. 신문지에 그린 작품.

 

본 기사는 유료기사로 기사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 결제 즉시 유료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디지털 콘텐츠 특성상 환불되지 않습니다. (단, 미사용시 환불 요청 가능)
- 결제한 내역은 마이페이지 결제내역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 환불 및 변경 문의와 관련해서는 메인페이지 하단 [이용약관 및 고객지원]을 통해
더 자세한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 정기회원권은 회원가입 후 이용이 가능합니다.
- 정기회원권은 마이페이지 또는 사이트 우측 상단 이용권결제를 이용해주세요.
박병기 편집장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올려 0 내려 0

가장 많이 본 뉴스

뉴스 인물 교육 시리즈 짘놀

포토뉴스 더보기

현재접속자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