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예수의 리더십’이라는 주제를 오랫동안 생각하면서 어떤 기준으로 예수를 볼까 고민을 했다. 나는 예수의 최고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이 쓴 빌립보서라는 편지글에서 예수의 리더십을 볼 수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합시다. 그분은 하나님과 똑같이 높은 분이셨지만, 결코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겸손함] 오히려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자발성]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종과 같이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성실함/신실함] 이 땅에 계신 동안 스스로 낮은 자가 되시며,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예의/순종] 예수님은 목숨을 버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지속성]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최고로 높은 자리에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협력]” (빌립보서 2:5-9, 쉬운성경)
리더십이란 누군가를 이끌어가는 생각과 행동이다. ‘예수의 리더십’은 위대한 사상에서 시작되었고 놀라운 행동으로 이어져 수많은 사람의 스승이 되게 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의 마음의 태도와 행동은 겸손했다. 그는 높은 자리를 원치 않았다. 이미 높은 분이지만 높은 자리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낮은 곳을 향해 자신의 삶을 나아가도록 했다. 그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마치 건물주인데 ‘내가 있을 방은 없어요’라고 하는 그런 겸손함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러한 겸손함의 행동은 자발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놓인 모든 일을 자발적으로 진행했다. 그는 늘 ‘종’의 모습을 보였다. ‘종’은 성실해야 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늘 순종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예의와 순종을 늘 잊지 않았다. 그는 3년 동안의 활동을 위해 30년을 준비했다. 그의 지속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30년 동안 그는 어떤 지속성을 가졌을까. 3년 동안의 공시 활동에서도 그는 지속성을 보여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십자가상에 자신의 몸을 실었다. 그는 하나님, 성령님과 동행하는 협동심을 늘 발휘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자성지겸예협 리더십'이라고 정리해볼 수 있다. '자'는 자발성, '성'은 성실함, '지'는 지속성, '겸'은 겸손함, '예'는 예절, '협'은 헙동심이다. ‘자성지겸예협 리더십’의 안경을 쓰고 예수의 리더십을 살펴본다. [필자주]
[자발성] 연합을 품은 자발성
헤겔에 의하면 기독교와 유대교의 큰 차이는 자유와 자발성에 있다. 헤겔은 유대교를 ‘분리’와 ‘복종’으로 보았다면 기독교를 ‘자유’와 ‘자발성’으로 보았다. 헤겔에 따르면 예수는 그야말로 자유와 자발성의 아이콘이었다. 헤겔에게 예수는 아가페의 자발성으로 율법을 완성하러 온 선생이었다.
예수를 인류가 본받고 따라야 할 가장 완전한 인간의 원형으로 본 칸트는 인간이 자발성 혹은 자율성을 통하여 도덕법칙을 이행할 때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 된다고 보았다.
예수의 자발성을 이야기할 때 우리의 자발성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의 자발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반응’이라면 예수의 자발성은 연합에의 의지와 연관된 자발성이다.
보통 사람은 ‘자발적으로 후원한다’라고 할 때 어떤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있고 그를 도와주자는 요청에 대해 ‘자발적’으로 반응을 한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과의 연합에 의지가 있는 자발성을 보였다.
그래서 예수의 자발성은 한 차원 높다고 할 수 있다. 연합을 위한 자발성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팀 켈러는 예수의 자발적 사랑이 정의를 극복했다고 말한다. 정의는 필요한 것이지만 그 위에 있는 것이 자발적 사랑인 것이다.
얼마 전 한 노인이 전셋집을 찾고 있었다. 함께 부동산을 들려 5천만 원도 안 되는 전셋집을 찾으려고 했다. 젊은 부동산 중개인들은 “방을 찾기가 쉽지 않다”라고 했다. 맞다. 해당 지역은 최근 침수로 인해 전셋집을 찾기가 쉽지 않았고 집을 찾는 이는 80대 노인이기에 더더욱 쉽지 않았다. 여기서 ‘정의’로 생각한다면 젊은 중개인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좌절의 순간 ‘자발적 사랑’이 펼쳐지며 노인은 꽤 마음에 드는 방을 구하게 되었다. 80세에 가까운 부동산 중개인이 ‘자발적 사랑’을 펼쳐 여기저기 알아보고 전화해보고 월세로 내놓은 집의 주인을 설득해 전세를 놓게 한 것이었다. 그는 단순히 부동산중개료를 받고자 그 일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는 자발적 사랑이 있었다. 이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자발성, 자발적 사랑 등은 연합과 연관이 되어 있다. 이 노인과 연합하고자 하는 노력을 80세 부동산 중개인이 보였다. 이는 사람과의 연합이고 그가 믿는 신과의 연합이었다. 대화 중에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의 자발성의 핵심어는 ‘연합’이다. 연합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에게는 자발성이다. 우리가 그에게서 배워야 할 자발성은 바로 ‘연합’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사람과의 연합, 그리고 신과의 연합. 무신론자라면 사람과의 연합에 집중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성지겸예협(자발성, 성실성, 지속성, 겸손함, 예절, 협동심)에서 자발성이 가장 먼저 소개된 이유는 이것이 아닐까.
[그림 출처: Gaudenzio Ferrari, Stories of life and passion of Christ, fresco, 1513, Church of Santa Maria delle Grazie, Varallo Sesia (VC), Italy. Public Do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