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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레전드(7)] 이정후가 닮았으면 하는 전설 윌리 메이스

2024년 6월18일 향년 93세에 세상을 떠나다

등록일 2024년06월19일 18시00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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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New York World-Telegram and the Sun staff photographer, William C. Greene. Public Domain

 

 

[스포츠 레전드(7)] 이정후가 닮았으면 하는 전설 윌리 메이스. 2024년 5월3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중견수 이정후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4회말 상대 타자 요한 로하스의 장타를 멋지게 잡아내 선발 투수 조던 힉스뿐만 아니라 많은 야구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미국 언론은 이정후의 놀라운 캐치를 상세히 설명할 정도로 대단한 플레이였다. 이정후의 멋진 캐치 장면. 이 장면이 X(옛날의 트위터)에 올려지자 미국 팬들은 '오타니보다 낫다' '윌리 메이스의 캐치보다 더 멋졌다' 'Hoo Lee S****' 등으로 반응했다. Hoo Lee S***** 은 Holy S****와 라임같은 것인데 ' ㅈ ㄴ 미쳤다' 이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개멋있었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여기서 나온 이름은 바로 윌리 메이스다. 메이스의  '더 캐치'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캐치 중 하나로 손꼽힌다. 메이스는 자이언츠의 전설적인 중견수였다. 그 위대한 캐치를 월드시리즈에서 해냈으니 더욱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 팬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 메이스가 오늘(미국 기준 2024년 6월18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 필자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며칠 전 윌리 메이스의 다큐멘터리를 시청할 기회가 있었다. 다큐를 보니 그는 전해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전 뉴욕 자이언츠 감독인 레오 듀로셔는 말했다. “누군가가 타율 .450, 100개의 도루, 그리고 매일 기적적인 수비를 보여준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윌리가 더 낫다고 말할 것이다.” 

16세에 니그로리그에 데뷔 

메이저리그 야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윌리 메이스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니그로 아메리칸 리그의 버밍햄 배런스에 합류해 본격적으로 야구를 하기 시작했다.

 

1950년 뉴욕 자이언츠가 버밍햄으로부터 그의 계약을 인수하면서 메이스의 메이저리그 첫 여정이 시작했다. 이듬해 그는 폴로 그라운드의 중견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첫 시즌 성적은 121경기 출장, 2할7푼4리, 홈런 20개, 68타점으로 신인왕이 됐다. 

군복무 2년 후에도 최고의 시즌 보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당시라 메이스는 1952년과 1953년 대부분을 군 복무로 보냈고(한국전쟁 파병 준비. 파병되지는 않았음) 1954년에 메이저리그로 돌아와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다. 23세였던 그는 리그에서 최고 타율(.345)과 41개의 홈런과 110개의 타점을 올렸다. 내셔널리그 MVP 투표에서 그는 1위표 16개를 받아 압도적으로 최우수선수가 됐다.

 

 

 

‘더 캐치’ 역사적 플레이 

자이언츠는 97승57패로 내셔널리그 챔피언이 됐고 월드 시리즈에서 111승을 거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만났다. 시리즈 1차전 8회 초, 2-2로 맞선 상황에서, 빅 워츠가 홈런성 타구를 날렸다. 다른 경기장 같았으면 홈런이 될 타구였다. 전진 수비를 하던 메이스는 등을 돌린 채로 공을 따라 달렸고, 홈 플레이트와 약 460피트 떨어진 지점에서 공을 등지고 잡아내었다. 그 후 2루에 있던 래리 도비는 3루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자이언츠는 메이스의 ‘더 캐치’ 덕분에 이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고 월드시리즈를 전승으로 마감했다. 따라서 ‘더 캐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비 플레이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메이스는 이후에도 변함없는 놀라운 플레이로 1966년까지 매년 MVP 투표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1965년에 다시 한 번 MVP로 선정돼 개인 통산 2번째 MVP 트로피를 받게 되었다. 공격과 수비에서 모두 뛰어났던 그는 1957년부터 1968년까지 매년 골드글러브를 수상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영웅 

뉴욕 자이언츠가 프랜차이즈 도시를 샌프란시스코로 옮긴 후 그는 1958년부터는 샌프란시스코 팬들의 영웅이 됐다. 1972년 41세의 나이에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될 때까지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더 맨’이었다. 

 

메이스는 1973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했는데 그는 10회 이상 시즌 타율 .300을 기록했고 통산 타율 3할2리, 3,283안타를 기록했다. 메이스는 3,000안타 클럽의 33명 중 한 명이지만, 3,000안타, .300의 타율, 300홈런, 300도루를 기록한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일한 선수이다. 

WAR 역대급 

메이스는 대체 선수 대비 승리(WAR) 순위에서 역대 상위에 위치해 있는데 1954년부터 1966년까지 13시즌 동안 최소 7.0 bWAR을 기록했으며, 이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긴 연속 기록이다. 메이스 외에 10시즌 연속 7.0 WAR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는 루 게릭이었다. 메이스는 1954년부터 1966년까지 124.1 WAR을 기록했으며, 이는 그 기간 동안 다른 어떤 선수보다 27.7 WAR이 더 많았다. 당시 행크 애런이 96.4 WAR으로 2위였으며, 미키 맨틀이 90.0 WAR로 3위에 오른 바 있다. 

 

통산 660홈런을 때려냈던 그가 군복무로 2년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700홈런 이상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두 차례 내셔널리그 MVP(1954, 1965), 24회 올스타(1963, 1968년 올스타 게임 MVP 수상) 선정, 12개의 골드 글러브 상을 수상했다. 또한, 홈런, 도루, 장타율, 총 루타수, 3루타 등 다양한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메이스는 1979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배리 본즈의 ‘갓파더’로 유명 

 

메이스는 전설적인 홈런타자 배리 본즈의 ‘대부’로 유명했다. 옛날 야구를 몰랐던 팬들에게 메이스는 배리 본즈의 ‘대부’ 정도로 여겨졌을 것이다. 메이스가 배리 본즈의 대부가 된 것은 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바비 본즈의 동료가 됐기 때문이다.

 

바비 본즈는 개인적, 인종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가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메이스의 도움과 지지 덕분이었다. 메이스는 바비 본즈가 알코올 중독과 같은 개인적인 문제를 겪었을 때 지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바비 본즈의 아들인 배리 본즈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메이스의 멘토링과 관심을 받다. 두 사람의 관계는 배리가 프로 경력을 쌓는 동안에도 지속되었으며, 메이스는 배리에게 늘 소중한 조언을 제공했다. 금지 약물 복용으로 배리는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공포스러운 타자로 기록될 것이다. 배리가 성공을 거두는 데에 메이스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메이스는 배리에게 야구 기술뿐만 아니라 야구 선수로서의 자세와 태도에 대해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특히, 배리는 팀 동료와 프런트 오피스, 언론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배리의 아버지인 바비 본즈가 암으로 사망했을 때, 메이스는 배리에게 큰 위로와 지원을 제공했고 본격적으로 아버지 역할을 했다. 메이스는 배리가 발코 스테로이드 사건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그의 곁을 지키며 정서적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메이스는 공개적으로는 침묵했지만, 배리에게는 개인적으로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인종차별로 원하는 주택 구입하지 못해

뉴욕 자이언츠가 샌프란시스코로 근거지를 이전했을 때 메이스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가야했고 당시 그가 구입하고자 하는 집이 있었지만 동네 백인 주민들이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구입을 반대했다. 결국에는 그의 집념으로 특별한 싸움 없이 원하던 집을 갖게 된 이야기는 메이스가 1950년대와 60년대의 인종차별과 다른 방식으로 싸웠던 유명인으로 기억되게 했다.

 

그런데 현대 메이저리그 야구에서 첫 흑인선수였던 재키 로빈슨은 메이스가 인종 문제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비판한 적이 있었다. 두 선수의 인종 장벽을 극복하는 방법은 달랐다. 누가 옳고 틀린 게 아니라 그저 달랐다.  

 

로빈슨은 인종차별에 대해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대결을 선택한 반면, 메이스는 경기력을 통해 인종 장벽을 허물려 했다. 로빈슨은 정치적 활동과 민권 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나, 메이스는 정치적 발언을 피하고 경기에 집중했다. 로빈슨은 다른 흑인 선수들의 침묵을 비판했지만, 메이스는 조용히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의 인종 장벽을 허무는 방법은 달랐을 뿐이지 누가 맞고 누가 틀리다고 할 수 없었다.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한 미국 언론

다음은 윌리 메이스가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나자 미국 언론들이 그를 기리며 올린 특집 기사 내용이다. 

따뜻함으로 사회에 공헌 

뉴욕 타임스: 그의 경기는 단순히 기록을 넘어서, 그의 열정적이고 활기찬 플레이 스타일로 많은 팬들에게 사랑받았다. 메이스는 미국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의 이름은 야구 팬들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Say Hey Kid'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미국 전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메이스는 흑인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특히 할렘에서 어린이들과 스틱볼을 즐기며, 흑인 사회와 긴밀한 유대를 맺었다. 그의 인종차별 경험과 싸운 방식은 다른 흑인 선수들과 달랐다. 그는 공개적으로 인종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자신의 경기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메이스는 경기 외적인 활동에서도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2015년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 메달을 수여받았고, 그의 공로는 계속해서 기려졌다. 메이스는 경기장에서의 성과와 더불어 그의 따뜻한 인간성과 사회적 공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사회적으로 영향력 큰 인물 

AP 통신: 윌리 메이스는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The Donna Reed Show", "Bewitched" 등 여러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의 인기는 음악에도 영향을 미쳐 "Say Hey (The Willie Mays Song)" 같은 노래들이 만들어졌다. 2015년에는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 메달을 수여받았는데, 오바마 대통령은 메이스가 흑인 사회와 미국 사회에 미친 긍정적인 변화를 강조하며 그를 기렸다. 윌리 메이스는 배리 본즈와 같은 후배 선수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배리 본즈를 멘토링하며 그의 경력과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윌리 메이스는 자신의 친근한 성격과 뛰어난 경기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으며, 그의 경기는 세대와 인종을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단순한 야구 선수를 넘어,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문화적 아이콘 

CNN: 메이스는 문화, 사회적으로도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으며, 지역 사회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개빈 뉴섬은 메이스가 샌프란시스코의 문화적 특성과 긴밀히 연결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메이스는 그의 뛰어난 경기력과 더불어, 사회적 영향력과 문화적 기여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그의 삶과 업적은 야구계를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유산으로 남아 있다.

5툴 플레이어, 다재다능함, 영감을 주는 인물 

워싱턴 포스트: 윌리 메이스는 흑인 선수로서 인종차별의 장벽을 넘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초기 선수들 중 한 명이었다. 그의 다재다능한 능력은 그를 특별하게 만들었으며, 수많은 팬들과 선수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뛰어난 타격, 수비, 주루, 그리고 강력한 팔을 겸비한 '5툴 플레이어'로서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성과를 남겼다. 그의 가장 유명한 수비 플레이는 1954년 월드 시리즈에서 보여준 "더 캐치(The Catch)"로, 이는 야구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메이스는 빠른 발과 예리한 감각으로 수많은 경기에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윌리 메이스는 "Say Hey Kid"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전설적인 야구 선수로, 그의 탁월한 운동 능력과 우아한 스타일로 수많은 팬들을 매료시켰다. 그는 93세의 나이로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마이클 메이스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발표했다.

 

그는 뛰어난 타격, 수비, 주루 능력을 가진 '5툴 플레이어'로 평가받았으며, 특히 그의 공격적이고 때로는 비정통적인 플레이 스타일과 특유의 바스켓 캐치로 유명했다. 메이스는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서 모두 큰 사랑을 받았고, 그의 동상은 오라클 파크 앞 윌리 메이스 플라자에 세워져 있다.

 

메이스는 인종 장벽을 허물며 흑인 선수로서 메이저리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생애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Say Hey Foundation을 통해 어려운 환경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데 힘썼다. 메이스는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남아 있으며, 그의 유산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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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기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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