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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레전드(4)] 코비 브라이언트 - 농구 코트의 불꽃, 별이 되다

코비 브라이언트 동상 세워져 + 승리와 도전의 상징, 코비의 농구 인생과 그가 남긴 영감

등록일 2024년02월09일 18시00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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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ted by Midjourney.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는 2024년 2월9일(한국시간) 故 코비 브라이언트를 기리는 5.8미터짜리 동상을 공개했다.

 

1814kg 무게의 동상은 2006년 1월 토론토 랩터스를 상대로 81점을 기록한 후 코트를 떠나는 브라이언트가 오른손 검지를 치켜세운는 모습이다. 

 

카림 압둘 자바는 동상 제막 기념식 연설에서 "이 동상은 코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탁월함이 어떤 모습인지, 규율이 어떤 모습인지, 헌신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동상의 아래쪽에는 "코비 빈 브라이언트"라는 이름과 그의 별명인 "블랙 맘바"가 새겨져 있고 동상은 삼각형 플랫폼 위에 서 있는데 이는 2000년대 레이커스의 성공의 기반이 된 텍스 윈터의 유명한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상징한다.

 

브라이언트는 레이커스 선수로서 여섯 번째 동상이 세워진 선수로 기록됐다. 그에 앞서 동상이 세워진 선수는 섀킬 오닐, 카림 압둘-자바, 매직 존슨, 제리 웨스트, 엘진 베일러였다. 모두 NBA의 전설이다. 

 

오랫동안 팀 동료였고 코비와 같은 해에 레이커스에서 NBA 데뷔를 했던 데릭 피셔는 "그는 단순한 챔피언이 아니었다. 그는 상대 선수들을 경악하게 만들고, 동료들에게 영감을 주는 매우 드문 선수였다. 코비는 농구의 기준을 설정했다. 그는 주요한 기록을 깨뜨렸다. 그가 남긴 유산은 현재 선수들과 미래 선수들이 그들의 꿈을 구축하는 기반이 됐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코비 브라이언트 관련 NjT가 과거에 올렸던 특집 기사.

 

코비 브라이언트. 미국 프로농구(NBA) 역사상 가장 스토리가 많았던 선수. 2020년 1월26일 그는 헬리콥터 사고로 젊은 나이(41세)에 세상을 떠났다. 

필자는 코비가 18세였을 때 그를 단독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는 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에 나의 미국 이민 생활에서 몇 안 되는 활력소가 되는 스타였다. 그래서 그의 사망소식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안타까웠다. 

 

다음은 필자가 코비가 18세였을 때 했던 인터뷰와 관련된 내용이다. 
 

 

 

코비 브라이언트. 그를 만난 것은 1997년이었다. 1996-97시즌은 브라이언트가 신인이었던 해다. 한국의 스포츠 전문잡지인 루키의 특파원이었던 필자는 그와 인터뷰를 시도했다. 첫 인상은 매우 좋았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선수였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모든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했고 한국말 인사도 열심히 하려고 했다. 신인이었기에 인터뷰가 어렵지 않았다. 

 

인터뷰어: 박병기

인터뷰이: 코비 브라이언트

인터뷰 장소 및 방법: 그레이트 웨스트 포럼(전 레이커스 홈경기장) 라커룸에서 직접 만남

 

▶지난 2월(1997년)에열린 NBA올스타전 덩크슛 경연대회에서 챔피언이 됐다. 그때 기분이 어땠나?

▷코비: 내 평생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정말 기뻤고 흥분이 됐다.
 

▶덩크슛 컨테스트에서 우승하리라 기대했었나?

▷코비: 물론이다. 누구든지 우승을 기대하고 컨테스트에 나간다. 덩크슛 묘기는 오래전부터 준비했었기 때문에 자신있게 임했다.


▶첫번째 덩크에 성공한 나이는

▷코비: 14세 때다.


▶농구선수로서 누구를 가장 존경하나?

▷코비: 모든 선수를 존경한다. NBA 선수라면 모두가 훌륭한 기술과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플레이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나는 당신이 차세대 '마이클조던'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데

▷코비: (미소를지으며) 최고의 선수가 되고자 하루하루 온힘을 다한다. 열심히 하다보면 인정받는 선수가 되고 '제2의 마이클 조던'이 아닌 '제1의 코비 브라이언트'로서 이름을 날릴 수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LA 레이커스에서 친한 선수는 누구인가?

▷코비:에디 존스다. 같은 지역(필라델피아)에서 자랐고 어린시절부터 농구를 같이하면서 그를 존경했다. 그를 레이커스에서 다시 만나게돼 기뻤다.


▶레이커스가 NBA챔피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는가?

▷코비: 그러길 바란다. NBA 챔피언이 되는 것은 어린 시절의꿈이다. 레이커스 팀원 전원이 우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고 있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무엇인가?

▷코비: 목표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나와 내 가족이 항상 건강하게사는 것이다.


▶종교는 있는가

▷코비: 종교는없다. 나는 나 자신을믿는다. [이후 그는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한국에 당신의 팬이 많은데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코비: 한국어로 'Hi'를 어떻게 말하나?


▶'안녕!"

▷코비: 안녕? 안녕? 

 


 

기자는 이후 레이커스 경기 취재를 갈 때 마다 코비를 만났는데 유명해진 후에는 단독 인터뷰가 불가능해졌다. 너무 많은 기자가 질문공세를 펼칠 정도로 그는 수퍼스타가 되었다. 그가 했던 말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제2의 마이클 조던'이 아닌 '제1의 코비 브라이언트'가 되겠다는 것인데 실제 그는 그런 선수가 됐다.

 

코비를 모르는 농구팬은 없을정도가 됐다. 물론 '위대함'에 있어 조던을 따라갈 선수는 없지만 코비는 21세기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힐만큼 뛰어난 선수가 됐다. 뛰어났음에도 그는 '이기적'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조던과 같은 영향력을 끼칠 수 없었다. 성폭행 사건과 연루되면서 그의 이미지는 더욱 실추됐다. 그는 모든 면에서 '뉴스메이커'였다.

 

농구장 안팎에서 그의 행동과 말은 큰 뉴스가 됐다. 2007-08시즌이 시작하기 전, 그는 레이커스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청해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 그는 분명 미성숙한 면이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악동'이라고 할까. 그는 인간으로서하기 어려운 움직임으로 많은 농구팬의 눈을 즐겁게해 줬다. 자신의 꿈처럼 그는 레이커스에서 3차례나 NBA챔피언 반지를 받았다. (이후 2개 더 추가함)

그러나 섀킬 오닐 덕분에 받은 반지라는 이미지가 강해 평가절하된 것이 사실이었다. 90년대에 인터뷰를 했을때 "사람들이 당신을 향해 폼생폼사(show boat)'라고 놀리던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필자가 하자 그는 정색하며 "나는 팀을 위해 플레이 한다. 팀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치 않겠다."라고 답을 했다. 첫 10년 동안 그는 '쇼보트'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2007-08시즌에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됐다. 필 잭슨 당시 레이커스 감독도 코비의 팀 플레이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코비'라는 드라마를 만든다면 아주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인생에는 희로애락이 너무나 잘 담겨있다.

 

코비를 추모하는 팬들. Photo by Markowijaya

 

위 기사는 2008년에 필자가 작성한 것이다. 이후 코비는 2차례 더 챔피언이 돼 총 5개의 챔피언십 반지를 받았다. 

 

코비는 2020년 1월26일 헬리콥터 사고로 4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필자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당시 뉴스를 보니 그의 수퍼스타로서의 자산 가치는 500억원이 넘었다. 그렇게 엄청난 무형 유형의 자산을 한 순간의 사고로 제대로 쓰지 못하고 가는 삶을 보면서 인생의 허무함을 필자는 보게 되었다.

 

만약 오늘 죽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일 죽게 된다면 오늘 무엇을 할까?

 

지난 2023년 1월, 필자는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가스에서 CES를 취재하고 LA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길을 지나가는데 추억을 되살리게 하는 그림을 보게 되었다. 어떤 상점에 그려진 코비 그림.  너무나 반가웠다. 동승했던 지인이 “저런 그림이 LA에 많다. 그만큼 코비는 많은 이에게 사랑 받는 스타였다”라고 말했다. 그는 어떤 선수였을까? 어떤 사람이었을까? 
 

Photo by NJT. 코비 브라이언트를 그리워하는 팬들이 많다. 한 상점에 코비 그림이 눈에 띈다. 사진- 뉴저널리스트 투데이

 

"당신이 정녕 위대해지길 원한다면, 그리고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이 되고자 한다면, 그 일을 위해 끝까지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한다.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다." (코비가 르브론 제임스에게 해준 말)


17세였던 1996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13번으로 샬럿 호네츠에 지명된 코비 브라이언트는 지명 직후 레이커스로 트레이드됐다. 제리 웨스트 당시 레이커스 단장은 브라이언트의 장래성을 보고, 유고 출신의 인기센터 블라디 디박(또는 디바치)을 호네츠로 보냈다. 웨스트의 결정은 훌륭했다. 레이커스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농구 팬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브라이언트의 존재 덕분이었다. 

■ 첫 2년 적응기간

브라이언트는 '수퍼스타' 후보였지만 첫 2년 동안은 벤치 선수로서 뛰었다. 신인 시즌에 8.2득점을 기록했던 그는 2년차 시절에도 8.7득점에 그쳤다. 신인 시즌이었던 1997년 2월, 그는 올스타전에서 슬램덩크 챔피언 자리에 등극했다. 화려한 플레이로 팬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은 브라이언트는 1998년 올스타전에서는 서부 컨퍼런스 주전으로 선발됐다. 그는 NBA 역사상 가장 어린 올스타 주전으로 기록됐다.

 

코비는 1997년 당시 올스타전 루키 게임에서 MVP를 앨런 아이버슨에 내준 후 다음 이벤트에서 슬램덩크 챔피언에 올랐다. 다음은 1997년 2월9일자 LA타임스 기사다. 코비의 말이다.

 

"3년 전 첫 덩크를 성공시켰는데 제대로 된 덩크는 아니었다. 이전까지 림도 제대로 터치하지 못했는데 그날은 억지로 덩크를 성공시켰다. 키가 컸던 것이다. 림을 잡았고 공은 우연히 림 안으로 들어갔기에 제대로 된 덩크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첫 덩크였기에 정말로 기뻤고 기분이 업됐다. 이후 덩크는 내가 늘 열심히 연습했던 기술이 되었다." 그랬던 그가 3년 후 덩크 콘테스트에서 챔피언이 되었던것이다.

 


 

■ 3년차에 주전 발탁

에디 존스, 닉 밴 엑셀의 백업 가드로 뛰었던 브라이언트는 NBA 진출 후 세 번째가 되는 시즌에 팀내 주전 자리를 꿰찼다. 레이커스는 존스, 밴 엑셀이 떠난 후라 가드 자리가 비었고 자연스럽게 브라이언트를 주전 가드로 세울 수 있었다. 오닐-브라이언트 콤비가 레이커스에 챔피언십을 가져줄 것이라는 믿음은 코비의 NBA 생활 첫 3년 동안 실현되지 않았다.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 레이커스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4전 전패를 당하고 탈락했다. 마지막 경기에서 '에어볼쇼'를 했던 코비에 대해 당시 LA팬들은 야유를 보냈다. 아래 LA타임스의 보도 내용이다. 

 


 

■ 새 감독 필 잭슨

브라이언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를 꼽는다면 필 잭슨일 것이다. 잭슨 감독은 1999-2000시즌에 레이커스 감독이 됐다. 레이커스의 핵심 간부였던 매직 존슨은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가지 예상되는 변화는 우리가 한 팀으로 뛰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다. LA는 열심히 뛰는 팀을 마침내 갖게 되었다. 우리는 수비를 잘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1999년 6월17일자)

 

당시 잭슨 감독 영입 발표 기자회견 장에는 필자도 있었는데 잭슨 감독은 "우승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라고 말했지만 겸손의 말이었고 그는 당장 레이커스가 필요한 것을 안겨줬다. 
 

시카고 불스를 '왕조'로 만들었던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들고온 잭슨 감독은 첫 시즌에는 큰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브라이언트와 특급 센터 섀킬 오닐은 생각이 달랐다. 3년 동안 꿈을 이루지 못했던 이들은 잭슨 감독 아래서 당장 우승하기를 원했다. 이 두 선수의 각오는 남달랐다. 그리고 결과는 잭슨 감독도 놀라워한 우승이었다. 잭슨 감독 부임 후 첫 시즌에 챔피언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NBA 4년차였던 브라이언트는 22.5득점, 6.3리바운드, 4.9어시스트로 데뷔 후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마침내 레이커스의 시대가 열렸다. 레이커스는 챔피언 결전정에서 레지 밀러의 인디애나 페이서스에 4승2패로 승리했다. 코비의 시리즈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코비는 코트를 종횡무진 날아다녔다. 1988년 이후 레이커스가 첫 챔피언십 링의 영광을 누리는 해가 2000년이었다.

 


 

■ 2인자의 설움?

브라이언트는 매년 성장해 2000-01시즌에는 기량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즌에 28.5득점, 5.8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한 브라이언트는 MVP가 될 수 있는 개인성적을 냈지만 팀내 MVP도 될 수 없었기에 리그 MVP 선정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팀내 MVP는 섀킬 오닐이었다. 레이커스는 잭슨 감독 체제하에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지만 브라이언트와 오닐의 자존심 싸움이 시작됐다.

 

맨해튼 머큐리지는 2001년 챔피언 결정전에서 레이커스가 챔피언에 오르고 MVP가 오닐에게 돌아가자 가드 데릭 피셔와의 인터뷰를 통해 "때로는 한 명에게 MVP가 돌아가는 게 부끄러울 때가 있다. 코비는 MVP급 플레이오프 활약을 펼쳤다"고 전했다. 2001년 6월17일자에서 이 신문은 "오닐이 플레이오프 원정경기에서 완벽하게 막혔을 때 레이커스를 이끌어간 선수는 코비였다"며 그가 MVP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명했다. 
 


 

2001-02시즌에도 챔피언이 된 레이커스는 3년 연속 우승의 금자탑을 세웠다. 브라이언트는 그러나 여전히 2인자였다.


■ 왕조의 끝?

브라이언트의 기량은 더욱 향상됐다. 2002-03시즌에 그는 평균 30득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는 9경기 연속 40득점+를 기록했다. 2003년 2월 한 달 동안 브라이언트의 평균 득점은 40.6득점이었다. 브라이언트가 떴지만 레이커스는 4연패를 이루지 못했다. 서부 컨퍼런스 준결승 시리즈에서 스퍼스에 2승4패로 무릎을 꿇었던 것. LA 언론은 "브라이언트가 잘하는 것은 레이커스에 독약"이라는 식으로 모든 책임을 브라이언트에 떠넘겼다.

 


 

■ 성폭행 사건에 연루

브라이언트는 2003-04시즌이 시작하기 전 성폭행 사건에 연루됐다. 미 전국 언론은 이 소식을 연일 중계방송 하듯이 전했다. 농구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브라이언트는 이 사건으로 이미지가 추락했다. 깨끗한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브라이언트와 오닐의 신경전은 이 사건으로 더욱 첨예해졌다. 브라이언트는 자신이 성폭행 고소를 당해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오닐이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고 분개해했다.

코비는 트레이닝 캠프가 시작하기 전, 잭슨 감독에게 "오닐이 언론에서 나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코비와 친했던 트레이너인 개리 비티는 오닐에 접근하지 못했고, 오닐과 친했던 칩 셰이퍼 트레이너는 코비의 테이핑을 돕지 못했을 정도로 두 선수는 앙숙이었다. 또한, 어떤 기자가 오닐과 친하면 그는 브라이언트와 인터뷰를 할 수 없었다. 레이커스는 당시 슈퍼스타였던 개리 페이튼, 칼 말론을 영입하고도 두 선수의 감정싸움으로 인해 NBA 챔피언 결정전 진출에 만족해야 했다.

 

 


 

■ 모두 떠나고 홀로 남아

혼란스러운 시즌이 끝나고 오닐은 마이애미로 트레이드됐다. 그리고 잭슨 감독도 떠났다. 잭슨 감독은 떠나면서 코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실은 '마지막 시즌(The Last Season)'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에는 잭슨 감독의 코비를 향한 애증이 잘 드러났다. 잭슨은 이 책에서 코비와 오닐의 신경전을 다음과 같이 썼다. 


 

 잭슨은 이 책에서 사견을 전제로 브라이언트가 2인자가 되는 것을 싫어했다고 썼다. 그래서 1인자인 오닐과 경쟁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결정적으로 성폭행 사건이 터진 후 오닐이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위로 전화를 하지 않은 것에 분노했다고 잭슨은 전했다.


 코비는 트레이닝 캠프가 시작되자마자 잭슨의 사무실을 찾아 “만약 오닐이 언론을 통해서 나에 대해 말한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에 대항해 싸울 것이다”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결국 두 스타는 언론을 통해 스타 워즈를 치렀고 이를 LA 언론은 신나게(?) 기사화 했다. 언론 좋은 일만 시켰던 것이다.


 잭슨 감독은 두 스타를 이렇게 묘사했다. “오닐은 무엇을 하라고 하면 일단 ‘노(No)’를 말하고 나서 내 말을 따르는 스타일이고, 브라이언트는 일단 ‘예스(Yes)’라고 말한 후에 지시를 따르지 않는 스타일이다"


 잭슨 감독은 “두 사람이 서로를 너무 싫어해 코비와 친한 트레이너인 개리 비티는 오닐에 접근하지 못했고 반대로 오닐과 친한 칩 셰이퍼 트레이너는 코비의 테이핑을 돕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또한, 특정 기자가 오닐에게만 지나치게 집중하는 듯해 보이면 그 기자는 브라이언트와는 인터뷰를 못했고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잭슨 감독의 빈자리를 전 휴스턴 로키츠 감독 루디 탐자노비치가 채웠지만 탐자노비치는 2004-05시즌 중에 돌연 사임했다. 혼란이 이어졌고 레이커스는 리그의 웃음거리가 됐다. 오닐이 떠난 후 코비는 팀내 1인자가 됐지만 아무도 그의 리더로서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레이커스가 계속 헤매자 잭슨 감독은 2005-06시즌에 다시 LA로 돌아왔다. 레이커스의 부사장인 지니 버스는 잭슨의 여자친구였기 때문에 그의 컴백은 어렵지 않게 진행됐다. 잭슨이 돌아온 시즌에 코비는 무려 35.4득점, 5.3리바운드, 4.5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범죄자' '이기주의자' 이미지가 강한 그를 MVP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 필 잭슨과 함께 레이커스 재건

잭슨 감독 재부임 후 첫 2년은 평범한 시즌이었다. 레이커스는 2년 연속 플레이오프에서 피닉스 선스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2007-08시즌이 시작하면서 코비는 '팀 플레이어'가 됐다. 센터 앤드류 바이넘이 급성장하고 파워포워드 파우 가솔을 영입하자 코비를 중심으로 한 레이커스는 서부 컨퍼런스 최강이 됐다.

 

코비는 데뷔 후 줄곧 레이커스 유니폼만 입었다. 그의 영욕의 세월은 다른 사람의 인생과 크게 다르다. 독특한 인생을 보낸 그가 생애 첫 MVP 트로피를 받게 됐다. 2007-08시즌에 코비는 정규시즌 MVP로 선정됐고 레이커스는 오랜만에 서부 컨퍼런스 챔피언 자리에 등극했다. 레이커스는 그러나 결승에서 보스턴 셀틱스에 완패했다.
 

 


 

Photo by Tim Wang from Beijing, China

 

■ 코비 중심의 왕조 (1)

코비와 레이커스는 2008-09시즌에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레이커스는 시즌을 65승17패의 뛰어난 성적으로 마쳤고 코비는 MVP 투표에서 르브론 제임스(당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소속)에 이은 2위에 올랐다. 레이커스는 유타 재즈, 휴스턴 로키츠, 덴버 너기츠를 차례로 누르고 NBA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고 결승에서 올랜도 매직을 눌러 실로 오랜만에 NBA 챔피언이 됐다. 브라이언트는 NBA 챔프 결정전 MVP로 뽑혔다. 이는 코비의 네 번째 챔피언 등극이었고 오닐이 떠난 후 첫 번째 챔피언십이었다.

 

LA타임스는 우승한 다음날인 2009년 6월15일자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특별한 우승을 보도했다. "필 잭슨은 이제 레드 아워박 감독보다 더 많은 챔피언 반지를 받게 되었다. 지니 버스 부사장은 결혼 반지를 기다리고 있다. 코비는 섀킬 오닐 없이 챔피언 반지를 받았다. 그에게는 파우 가솔이 있었다. 이 팀에는 매직(존슨)이 없지만 반지는 있다. 코비와 필 잭슨의 우승을 향한 집념이 이 일을 가능케 했다."

 


 

■ 코비 중심의 왕조 (2)
 

2010년 보스턴 셀틱스와의 챔피언 결정전 재대결에서 브라이언트는 7차전 4쿼터에 10점을 쏟아부으며 소속팀을 다시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았다. 코비의 생애 다섯 번째 우승이고 그는 2년 연속 NBA 챔피언십 MVP상을 수상했다. 코비는 당시 “나의 5차례의 챔피언십 중 가장 만족스러운 행보였다”라고 말했다.

 

 

■ 하락세 그리고 은퇴 
 

코비는 이후 잦은 부상으로 결장하는 일이 많았다. 이는 레이커스의 성적과 그대로 연결되었다. 마이클 조던처럼 6번째 반지를 받고 은퇴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후 레이커스는 계속 추락했고 코비는 2016년 은퇴했다. 그는 생애 마지막 NBA 경기도 화려했다. 2016년 4월13일 시즌 피날레에서 브라이언트는 유타 재즈를 상대로 NBA 시즌 최고인 60점을 기록했다. 은퇴 경기에서 60점을 기록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당시 그의 나이 37세 234일이었다. 그는 한 경기에서 60점 이상을 득점한 최고령 선수로 기록됐다. 레이커스는 그 시즌에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악의 기록인 17승65패의 기록으로 시즌을 마쳤다.  

 

앙숙이었던 섀킬 오닐도 그의 은퇴 경기에 양복을 입고 참여했다. 코비는 은퇴 경기 후 "20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좋은 때도 있었고 나쁜 때도 경험했지만 중요한 것은 늘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레이커스 팬이었다. 레이커스를 정말 좋아했다. 내가 좋아하던 팀에 드래프트되어(드래프트날 트레이드) 20년 동안 뛴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레이커스 팬들은 우리가 못할 때도 함께 했다. 그게 대단한 일이다. 팬 여러분의 지지와 동기유발에 감사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여러분에게 감사한다는 말 뿐이다"라고 말했다. 

 

 

■ 코비 커리어 하이라이트 및 수상

5회 NBA 챔피언 (2000–2002, 2009, 2010)
2회 NBA 파이널 MVP (2009, 2010)
1회 정규시즌 최우수 선수 (2008)
18회 NBA 올스타(1998, 2000–2016)
4회 NBA 올스타 게임 MVP (2002, 2007, 2009, 2011)
11회 All-NBA 퍼스트 팀(2002–2004, 2006–2013)
2회 All-NBA 세컨드 팀(2000, 2001)
2회 All-NBA 써드 팀(1999, 2005)
9회 NBA 올 디펜시브 퍼스트 팀(2000, 2003, 2004, 2006–2011)
3회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2001, 2002, 2012)
2회 NBA 득점왕(2006, 2007)
NBA 슬램덩크 콘테스트 챔피언 (1997)
NBA 올 루키 세컨드 팀 (1997)
등번호 8번과 24번은 레이커스가 영구결번함

 

Photo by Steve Lanctot. This file is licensed under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2.0 Generic license.

 

나가는 말 

 

별들이 그렇듯, 코비 브라이언트도 우리 곁에 영원히 머무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2020년 1월 26일,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갑작스런 비극은 마치 촛불이 강한 바람에 꺼지듯, 우리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겼다.

 

필자가 코비를 처음 만난 건 그가 10대의 어린 선수였던 1997년이었다. 그는 NBA의 새로운 얼굴로,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신인이었다. 그의 열정과 낙천적인 태도는 인터뷰 내내 빛났고, 한국어로 인사를 시도하는 그의 모습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 후로 수년간, 코비는 농구 코트를 지배했다. 그는 '제2의 마이클 조던'이 아닌, '제1의 코비 브라이언트'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경기는 시대를 초월한 예술작품과도 같았다. 코트 위에서 그는 자유롭고, 대담했으며, 도전적이었다. 그의 농구는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감동과 영감을 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코비의 삶은 단순히 승리와 영광의 연속만은 아니었다. 그는 인간적인 실수도 했고, 때로는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고, 항상 자신을 다시 일으키는 법을 알았다. 그의 인생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였으며, 그 안에서 우리는 인간 코비 브라이언트의 진정한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코비의 은퇴는 그의 경력에 마침표를 찍는 듯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는 농구장 안팎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개척했고, 그의 열정과 헌신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코비의 삶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그것은 바로 끝없는 노력, 열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으로서의 성장이다.

 

코비 브라이언트는 단순히 위대한 농구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우리에게 꿈과 영감을 주는 인물이었다. 그의 삶과 경력은 오랫동안 우리 기억 속에 남을 것이며, 그의 정신은 계속해서 우리를 밝힐 것이다.

 

코비 브라이언트 씨, 당신은 영원히 우리 마음 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특히 나의 힘든 이민 생활에서 당신의 존재는 위로였고 세상의 근심을 잠시나마 잊게해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이클 조던의 코비 브라이언트 장례식 추모사

 

 

"나와 코비가 매우 친한 친구였다는 것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가까운 친구였다. 코비는 나의 소중한 친구였고, 마치 친 동생 같았다. 사람들은 항상 우리 둘 사이의 비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했지만, 나는 코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는 자주 나에게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곤 했다. 밤 11시 30분, 새벽 2시 30분, 3시에 포스트업 동작, 발놀림, 때로는 트라이앵글 오펜스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처음에는 성가셨다. 하지만 그것은 특정한 열정으로 바뀌었다. 이 친구는 여러분이 절대 모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열정에 대한 놀라운 점은 당신이 무언가를 사랑하고, 무언가에 대한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 열정의 대상에 대해 이해하거나 그것을 얻기 위해 극단으로 갈 것이다. 

 

코비 브라이언트는 자신이 사랑하는 농구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어했다. 그를 더 알게 되면서 나는 그의 최고의 큰형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가심, 늦은 밤 전화, 어리석은 질문들을 견뎌내야 했다. 나는 코비 브라이언트를 알게 된 것을 큰 자부심으로 생각한다. 그는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더 나은 농구 선수가 되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사업에 대해, 가족에 대해,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몇 달 전에 그가 나에게 문자를 보내면서 '나는 내 딸에게 몇 가지 동작을 가르치려고 하는데, 나는 그 나이 때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연습하고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신은 어릴 때 어떤 동작을 연습하려고 했었나요?'라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몇 살 때?'라고 물었다. 그는 '12살'이라고 했다. 나는 '12살 때, 나는 야구를 하려고 했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그렇게 농구 외에도 삶과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우리는 삶에서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을 거의 만나지 못한다. 

 

나는 1999년, 아마 2000년에 필 잭슨을 만나러 갔을 때 LA에 온 적이 있다. 내가 그를 만나러 그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거기에는 코비가 있었다. 그리고 첫 번째로 코비가 한 말은 '농구화를 가져 왔나요?'였다. 나는 '아니, 농구를 할 생각은 안 했다.'라고 답했다. 

 

자신의 게임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느끼는 누군가와 플레이하고자하는 그의 태도가 좋았다. 나는 그 친구를 정말 좋아했다. 나는 그를 존경했다. 왜냐하면 그의 열정은 보기 드문 것이고, 매일 자신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보는 것이 드물기 때문이었다. 스포츠뿐만 아니라 부모로서, 남편으로서도 그는 늘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후략)'

 

[코비 브라이언트 프로필]
 

□포지션: 슈팅가드
□키: 6피트6인치 (198 cm)
□몸무게: 205파운드 (93 kg)
□소속팀: LA레이커스
□등번호: 24번
□생년월일: 1978년 8월23일
□사망일: 2020년 1월26일 (향년 41세. RIP)
□출생지:펜실베이니아주필라델피아
□출신교:로워메리언고교
□드래프트: 1996년 전체 1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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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기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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