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레의 육체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역사는 우리 안에 남아 있다. 그래서 그의 사망 해에 대한 표시가 없다. 무한대일 뿐이다. 사진 - 셔터스톡
펠레는 지난 2022년 12월29일 세상을 떠났다. 세계 축구 팬이 가장 슬퍼하는 날이었다. 향년 82세. 축구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어린이든 노인이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아시아에 살든 아프리카에 살든, 펠레라는 이름을 못 들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는 축구의 전설이고 황제였다.
조국 브라질을 위해 뛰며 월드컵 트로피를 3번이나 들어 올린 그는 역사상 챔피언 트로피를 3차례나 추켜올린 유일한 선수이다. 월드컵 14경기에 출전해 무려 12골을 기록한 ‘황제’ 펠레는 2022년 12월 29일 결장암의 합병증인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2022년 12월 21일, 펠레가 치료받고 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병원 측은 그의 종양이 진행되었고 "신장 및 심장 기능 장애와 관련된 더 큰 치료"가 필요하다고 발표한 바 있는데 며칠 후에 이 땅과 작별을 고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현존하는 수많은 스타가 펠레를 추모했다.
네이마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킬리앙 음바페, 리오넬 메시, 기타 주요 스포츠 인물, 유명 인사, 세계 지도자 등 현직 선수들이 그를 추모했다. 브라질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루는 3일간의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전 잉글랜드 축구 선수인 제프 허스트는 트위터에 펠레를 추모하며 “의심할 여지 없이 내가 상대해 본 최고의 축구 선수였다(바비 무어는 동료로서 함께 뛰었던 최고의 축구 선수였다).”라고 썼다.
사진 - 셔터스톡
펠레는 기록의 사나이였다. 1958년 월드컵에 출전한 그는 17세의 나이에 준결승 프랑스전에서 해트트릭(3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개최국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 펠레는 2골을 기록하며 브라질이 5-2로 승리해 챔피언이 되도록 이끌었다. 그는 월드컵 결승에 출전한 최연소(17세 249일) 선수가 되었다.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으로 펠레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리고 유럽에서 러브콜이 끊이지 않았다.
1962년 월드컵에서는 2차전에 부상을 당해 더는 출전할 수 없었지만, 동료들의 선전으로 2회 연속 우승컵을 안은 펠레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도 부상을 당해 소속팀 조별 예선 리그 탈락의 고백을 함께 마셔야 했다. 당시 브라질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이 있었다. 브라질이 예선 탈락하자 브라질에서 그리스로 유학을 하러 간 여학생이 배에서 투신하는 사건까지 일어났고 거친 플레이와 안하무인 격의 심판들의 판정에 화가 난 펠레는 더는 월드컵에 출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FIFA가 판정과 카드 제도를 보완하자 자신의 선언을 번복하고 1970년 마지막 월드컵에 참가한 펠레는 생애 세 번째 월드컵을 안게 되었다. 월드컵이 열리기 1년 전인 1969년 펠레는 통산 1000골을 기록하며 축구의 역사를 바꾼 바 있는데 월드컵 3회 우승으로 축구의 황제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영국 가디언지는 1959년 5월30일자 기사에서 펠레의 인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3가지 항존 요소가 있다. 그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 태양, 축구이다. 축구는 특히 라틴 아메리칸들의 현대적 아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공적인 공간에서 축구 외에 그 어떤 것도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펠레는 그 축구에서 가장 팬들에게 칭송되는 선수이다. 펠레는 지난해 여름 월드컵에서 브라질에 우승을 가져다 준 뛰어난 젊은 축구 선수이다. 그리고 그는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에 1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이적할 수 있는 선수인데 이적이 이뤄지면 펠레의 소속팀(산투스)에는 혁명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펠레는 그러나 유럽으로의 이적을 거절했다. 그럼에도 워낙 그에 대한 인기가 높다보니 다음과 같은 오보가 나오기도 했다.
이 오보의 내용은 펠레 측이 약 8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받고 레알 마드리드로의 이적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18세의 나이에 이미 세계적인 축구 선수가 된 펠레는 그러나 커리어 내내 단 한 번도 유럽에 진출한 적이 없다. '자국' 리그인 산투스에서 약 18년 가량을 있었고 은퇴 즈음에는 미국에서 잠시 뛰었다. 펠레는 "레알 이적에 가까운 적이 몇 차례 있었다. 나폴리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산투스를 떠나지 않았다"라며 이유는 산투스에서의 축구 생활이 너무나 행복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축구 인생에서는 독특한 이력이 있다. 산투스에서 18년 동안 뛴 후 1975년부터 유럽이 아닌 미국의 축구 리그에 참여하게 된 것. 수백만 명의 미국인을 축구 경기에 끌어들이고자 하는 뉴욕 코스모스 팀의 노력으로 그는 미국에서 뛰게 되었다. 미국 축구의 부흥을 이끈 펠레는 1977년 뉴욕 자이언츠 풋볼 경기장에서 은퇴 경기를 치렀는데 이날 경기에는 7만 명 이상의 축구 팬들이 몰려들었다.
펠레가 1975년 미국 프로축구에서 뛰었던 당시 미국에는 축구 붐이 일었는데 당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축구 경기를 전국으로 TV중계를 하기도 했다. 당시 경기장에는 미국인 10대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미 전국에 축구를 하는 청소년은 60만 명이었는데 그들이 펠레의 경기를 보고자 경기장을 찾아 열성적으로 응원을 했다고 한다.
펠레는 미국 구단에 입단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470만 달러의 몸값 때문에 미국에 온 게 아니라 미국에 축구를 대중화 하기 위한 자신의 꿈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동아일보 1975년 6월11일자는 보도했다.
미국은 당시 미식축구, 야구, 농구 등으로인해 축구의 불모지나 마찬가지였고 펠레는 "미국은 세계에서 축구가 알려지지 않은 유일한 나라이며 나는 언젠가는 미국에 축구를 보급한다는 꿈을 갖고 이었다"고 말했다.
미국 은퇴 경기에서 펠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눈물이 글썽이던 그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지만 사랑은 남습니다."라고 말했고 '러브, 러브, 러브'를 외쳤는데 7만5천여 팬들은 화답으로 역시 '러브, 러브, 러브'를 외쳤다. 그는 사랑 받는 축구선수였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번졌으면 하는 메시지를 전했던 것이다.
한편, 이날 은퇴식에는 복서 무하마드 알리도 참여했는데 경기 후 펠레를 껴안은 후 알리는 "잊지 마세요. 당신과 나는 온 세상에서 두 명의 가장 위대한 선수다"라고 말했다. 펠레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씩 웃으며 "믿습니다"라고 답했다. 미국 언론은 ‘겸손한 펠레 은퇴하다’라는 타이틀로 축구의 황제를 떠나보냈다.
펠레는 프로 리그에서 총 541골을 넣었고 비공식적인 친선 경기와 투어 경기를 포함해 1363경기에서 1279골을 기록했다. 이는 기네스북에서 세계 축구 최다 골 기록 부문으로 인정되었다. 그에게는 "검은 진주(A Pérola Negra)", "축구의 왕(O Rei do Futebol)". "왕 펠레(O Rei Pelé)", "왕(O Rei)"라는 별명이 있다. 그는 브라질의 국보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는 1999년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FFHS)이 실시한 투표에서 세기의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었고,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가 선정한 세기의 스포츠 선수가 되었다. 펠레는 또한 ‘타임 매거진’이 선정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해는 1966년이었다. 그가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킨 8년 후였다.
경향신문의 1966년 7월15일자 기사를 보면 이탈리아의 '밀라노' '인터밀란'이 펠레를 영입하고자 1백만 달러를 제시했다는 보도가 떴다. 런던 데일리 익스프레스지의 보도를 인용한 경향신문은 이탈리아 구단들이 산투스 구단에 추가 1백만 달러를 지급하겠다는 내용을 소개했다. 1967년에는 펠레가 영화계에 진출했던 소식이 전해졌고 1969년에는 펠레가 각종 기록을 세우고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소식을 한국 언론도 보도했다.
이미 3회 월드컵을 차지한 펠레는 1972년 소속팀이던 산투스FC 소속으로 한국을 방문해 한국 축구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펼쳤다. 당시 산투스가 3-2로 승리를 거뒀다. 당시 한국 팀에는 차범근, 이회택 등이 뛰고 있었다.
당연히 한국 언론은 펠레를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펠레가 내한 했을 당시 한국 언론은 그를 집중 조명했는데 그중 동아일보의 기사가 눈에 띈다. 1972년 6월2일자 기사 내용이다. 펠레와의 일문일답 내용이다.
(한국 언론) 당신은 많은 사람에 의해 축구황제로 칭송되는 묘기를 가졌는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펠레) 나 자신은 그런 칭찬을 받을만큼 훌륭한 선수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내 나이 십칠세 때인 1958년 스웨덴 월드컵과 1962년 칠레 월드컵 대회에 이어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브라질이 세계 축구의 패권을 차지하자 그와 같은 영예로운 칭호를 우리팀 아닌 나 개인에게 준 것뿐입니다.
특별한 종교는 없으나 술과 담배를 모르는 그는 항상 몸과 마음을 깨끗하고 정직하게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스포츠인의 향상의 비결이라면 비결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그가 속한 산토스 팀메이트들과는 하루도 연습을 쉬지 않으며 경기를 앞두고는 언제나 엄격한 규율 속에 행동하는 자율집단의 일원이라고.
펠레는 단순히 축구만을 잘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브라질이라는 나라에서 흑인이 대접을 받고 나라를 함께 일으키는 데 공헌하도록 하는 인물이었다. 다음은 머니투데이에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 산업학과 교수가 기고한 글이다.
브라질은 미국 다음으로 흑인 노예들이 많았던 국가다. 이들은 제국주의 시대에 커피와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아프리카에서 브라질로 끌려왔다. 이후 브라질은 '커피의 나라'로 급부상했다.
브라질의 흑인 노예들은 1888년 노예 해방령이 선포된 후 서서히 사회 곳곳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분야는 축구였다. 흑인 노예들의 후손들이 대거 포진한 브라질 축구 대표팀은 1958년과 1962년 월드컵에서 연거푸 우승을 차지했다. 이들은 1970년 브라질에 세 번째 쥘 리메 컵을 안겼다. 커피 농사를 위해 브라질로 강제 이주당했던 노예의 후손은 이처럼 브라질을 커피왕국에서 '축구의 나라'로 바꿔 놓았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지난 29일(현지시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펠레(1940~2022)가 있었다. 그는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18세의 나이로 브라질의 첫 번째 월드컵 우승을 이끌며 화려한 축구 인생의 서막을 열었다. 이후 그는 브라질에 1962년과 1970년 월드컵 우승을 선사하며 브라질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축구 최강국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그는 명실상부한 '축구 황제'로 등극했다. 월드컵에서 세 차례 우승한 유일한 선수가 됐기 때문이다.
다음은 펠레에 관한 유명인들의 말.말.말이고 출처는 FIFA 홈페이지이다.
사진 - 셔터스톡
“펠레는 축구에 혁명을 일으켰다. 펠레는 전쟁을 중지시켰고 나라와 가족을 통합했다. 인종 문제, 언어 문제가 사라졌다. 나는 1970년생이다. 2002년에 나는 팀의 주장이었고 챔피언이 되었다. 그리고 영광의 월드컵 트로피를 다름아닌 바로 축구 황제 펠레로부터 건네 받았다. 말을 더 하면 눈물이 날 것 같다. 정말 감동적이었다!”
카푸(FIFA와 인터뷰에서)
"펠레가 축구하는 것을 보면 마치 어린 아이의 기쁨과 인간의 비범한 우아함이 완전히 결합된 것을 보는 것 같다.”
넬슨 만델라
“펠레는 (미래에는 누구나 15분의 명성을 누릴 수 있다는) 내 이론을 반증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는 15분 대신 15세기 동안 명성을 누릴 사람이다.”
앤디 워홀
“내 이름은 로널드 레이건이고 미국 대통령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자기 소개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펠레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로널드 레이건
“펠레가 특별한 이유는 펠레처럼 1,000골을 넣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다. 한 골이라도 펠레처럼 골을 넣는 것, 그것이 어려워서 특별한 것이다.”
카를로스 드루몬드 지 안드라지, 브라질 시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는 펠레가 아니라 디 스테파뇨다. 왜냐하면 나는 펠레를 선수로 분류하지 않기 때문이다. 펠레는 어떤 카테고리로도 분류할 수 없다."
페렌츠 푸스카스
“모든 사람이 펠레와 꼭 악수하고, 사진을 찍고 싶어했다. 펠레와 함께 파티를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영예로운 배지였다.”
믹 재거
“브라질 사람들에게 펠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의 객체, 모든 사람을 초월하는 그 무언가에 관해 이야기는 하는 것과 같다.”
호나우두(FIFA와 인터뷰에서)
"펠레는 논리의 경계를 초월한 유일한 축구선수다."
요한 크루이프
“펠레는 교황보다 인기가 더 많았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비틀즈, 무하마드 알리, 로버트 레드퍼드, 믹 재거, 엘튼 존에 열광하듯 열광했다. 모든 사람이 펠레를 경외했다.”
스티브 로스, 펠레의 뉴욕 코스모스 이적을 도운 사업가
"펠레 이전에 '10번'은 하나의 번호에 불과했다. 어디선가 이 문구를 봤는데, 이 아름다운 문장은 미완성이다. 나는 '펠레 이전에 축구는 단순히 스포츠에 불과했다'고 말하고 싶다"
네이마르
"영원한 왕 펠레에게 단순히 '안녕'이라고 하는 건 지금 축구계 전체를 감싼 고통을 표현하기엔 부족할 것이다. 그는 수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어제도, 오늘도, 언제나 기준이 되는 존재다.“
호날두
"축구의 왕은 우리를 떠났지만, 그의 유산은 절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음바페
"펠레는 월드컵에서 3회 우승한 유일한 선수였고, 그의 기술과 상상력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어떤 선수도 꿈꾸지 못할 일들을 해냈다. 그의 삶은 축구 그 이상이었다. 그의 유산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펠레의 육체적 존재를 잃은 것을 애도하지만, 그는 오래전에 불멸의 존재가 됐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인판티노 FIFA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