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레전드(2) 타이 콥: 들어가는 말] 야구장의 먼지와 햇살이 어우러진 1905년의 여름날, 한 젊은 타자가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새로 쓰기 위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밟았다. 주인공 타이 콥. 이것은 단순히 한 선수의 데뷔 이야기가 아니라, 야구 역사의 한 페이지가 태어난 순간이었다. 첫 타석에서 상징적인 2루타를 날림으로써 그는 야구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는 곧 그의 전설적인 경력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통산 타율 3할6푼6리는 시대를 초월한 기록이다. 그의 업적과 경력은 현대 야구선수들에게도 여전히 도전의 대상이다. 그의 스토리는 단순히 숫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성격, 스타일, 그리고 그라운드 안팎에서의 독특한 캐릭터는 그를 단순한 선수를 넘어 신화적 존재로 만들었다.
타이 콥이라는 인물은 그의 화려한 기록만큼이나 복잡하고 모순적인 면모를 갖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그라운드의 룰을 교묘히 이용하는 엽기적인 행동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의 성격 또한 '독특함'을 넘어서 '과격함'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의 인생과 경력에 대한 재평가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타이 콥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그의 삶과 업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에 따라 계속 변화하고 있다.
뉴저널리스트 투데이는 타이 콥이라는 인물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그가 남긴 유산의 진정한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의 승리와 패배, 기쁨과 아픔, 성취와 논란을 고스란히 담아 그가 어떻게 영웅이자 반항아, 전설이자 지적받는 인간으로 살아냈는지를 들여다보려 한다. 타이 콥의 이야기는 야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감을 주며,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스포츠 문화의 근원적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사진 - 퍼블릭도메인. 1912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소속이었던 타이 콥이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와의 경기 중 홈 플레이트에서 포수 폴 크리첼에게 ”날아가는” 슬라이딩을 선보였다. 해당 장면은 콥의 공격적이고 화려한 플레이 스타일을 상징하는 순간으로, 야구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콥은 당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빠르고 과감한 베이스 러닝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 이 슬라이딩은 그의 경기 스타일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였다.
104년 전인 1905년 8월30일 타이 콥(Ty Cobb)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3주 후 메이저리그로 콜업된 그는 첫 타석에서 이전 시즌 41승을 기록했던 투수와 상대해 2루타를 날렸다. 상대팀은 뉴욕 하일랜더(양키스 전신)였고 투수는 1904시즌에 41승을 올렸던 잭 체스브로였다. 그렇게 그의 메이저리그 선수 인생은 시작했다.
■ 만화야? 통산 타율 3할6푼6리!
1905년부터 1928년까지 메이저리그 야구(MLB)에서 뛰었던 타이 콥의 통산 타율은 3할6푼6리였다. 로저스 혼스비가 비슷한 시기에 타이 콥의 기록에 도전했지만 3할5푼9리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그쳤다는 표현이 어색하지만 말이다.
현대 야구에서는 통산 평균 타율 3할 이상을 기록하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다. 3천 타석 이상을 기록했던 선수 중 타이 콥에 가장 근접했던 현대 타자는 토니 그윈으로 그는 1982년부터 2001년까지 샌디에이고 파드레스 유니폼을 입고 타율 3할3푼8리를 기록했다. 타이 콥은 지금은 불가능한 시즌 타율로 여겨지는 4할 이상을 세 번이나 기록했다. 3할8푼 이상을 기록한 시즌도 아홉 번이나 됐다. 그의 통산 기록은 다음과 같다.
3034경기 출전, 4191안타, 홈런 117개, 1944타점, 도루 892개, 출루율 4할3푼3리, OPS 0.946.
콥의 기타 경력을 보면 1911년 아메리칸리그 MVP, 타격왕 12회, 월드시리즈 출전 3회, 트리플 크라운 달성 1회(1909년) 등이 눈에 띈다. 역대 최고 기록 보유 부문에서는 통산 타율(3할6푼6리), 최다 타격왕(12회), 최다 3할 시즌(23회), 최다 홈스틸(50회) 등에서 1위에 올라 있다. 최다 안타와 최다 도루 부문에서도 1위였지만 이는 피트 로즈와 리키 헨더슨에게 왕좌가 넘겨졌다.
1928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했을 당시 그의 선수로서의 가치는 100만 달러 수준이었다. 당시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최고 가치를 자랑했다. 타이 콥의 1928년 연간 수입은 7만5천달러로 이 역시 당시 스포츠 스타 중 최고의 수입이었다. 그는 떠오르는 최고 기업이었던 GM과 코카콜라가 주식 가격이 낮았을 때 주식을 다량 구입해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은퇴했던 해인 1928년 그는 여전히 높은 3할2푼3리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40세가 넘었기에 이전과 같은 플레이를 선보이지는 못했다. 그는 은퇴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지의 1928년 9월18일자 기사다.
"아이들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아이들은 곧 결혼을 하는데 아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거의 없었다. 여름 휴가 때 나는 야구를 하고 있었고 야구 시즌이 끝나고 집으로 가면 아이들은 학교에 가 있었다. 그들과 함께 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가족과 함께 시간을 갖기 위해 은퇴를 결정했다.“
1913년 타이 콥. 사진 - 퍼블릭 도메인
■ 독특한 성품
그는 성격이 독특했다. 나쁘게 말하면 괴팍했고 좋게 말하면 개성이 넘친 선수였다. 그의 독특함은 은퇴 후에도 유지됐다. 타이 콥은 은퇴 후 30년이 지난 1958년 어느 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신이 지금 뛴다면 타율이 어느 정도일까?"라는 질문에 "3할1푼 정도"라고 답했다. 그의 부연 설명은 걸작이었다. "내 나이 72세이니 그 정도밖에 기록할 수 없겠지"
그의 독특한 행동은 계속 이어졌다. 올드 스타 자선 야구 행사에 출전한 그는 포수에게 "나이가 들어 방망이를 놓칠지 모르니 뒤로 앉아 있어라"고 말한 후 기습 번트를 대고 1루에 진루한 적도 있었다. 이 같은 행동은 현역 시절에도 자주 목격됐다. 그는 주루 플레이를 할 때 항상 신발 스파이크가 선명하게 보이게 하면서 상대 수비수를 차는 자세로 질주했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일부 야구 전문 작가들은 타이 콥이 수비수에 위협을 주기 위해 스파이크 날을 매일 갈았다는 엽기적인 이야기를 전하기도 한다. 콥은 지나친 승부욕과 잔인함 등으로 인해 '그라운드의 외로운 늑대' '방망이를 든 난봉꾼'으로 불렸다. 그는 또 '더러운 선수' '인종차별주의자', '폭력적인 사람'으로 통했다. 그는 상대팀 선수뿐만 아니라 팀 동료 그리고 팬과도 싸움을 했다.
다음은 1906년 10월7일자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 기사의 일부 내용이다.
“타이 콥이 플랜터스 호텔 로비에서 에드 시버와 맞붙어 싸움을 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투수 시버와 중견수 콥이 플랜터스 호텔에서 주먹다짐을 하며 싸움을 했던 것. 시버는 얼굴을 크게 다쳤고 콥의 얼굴은 스크래치가 조금 있는 정도였다. 두 사람은 경기 후 호텔 로비에서 언쟁을 했고 콥이 먼저 오른 주먹을 날렸다. 이에 시버는 바닥에 넘어졌다. 콥은 시버가 넘어지자 발로 얼굴을 찼다. 의사가 출동했고 콥은 조용히 호텔 로비를 떠났다. 당시 호텔에는 두 사람이 큰 소리를 지르고 싸우자 많은 사람이 몰려 들어 주먹싸움을 지켜봤다.”
다음은 1912년 5월에 벌어졌던 타이 콥과 관중석에 있던 팬의 싸움을 당시 언론이 묘사한 내용이다.
“타이거스의 유명 선수 타이 콥이 관중석으로 들어가 한 팬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싸움은 급속도로 다른 선수들과 팬들까지 연관짓게 되었고, 콥은 퇴장당하고 벌금을 내며 출전 정리 처분을 받았다. 이에 대한 항의로 그의 팀 동료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콥이 복귀할 때까지 경기장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타이거스 선수들의 파업은 단순히 한 선수의 복귀 요청을 넘어, 프로 스포츠에서의 선수 권리와 단체 행동의 초석이 되었다. 이 사건은 야구뿐만 아니라 전체 프로 스포츠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선수들의 단결과 연대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클로드 러커라는 하이랜더(양키스 전신) 경기에 자주 오던 팬이었는데 그는 경기에는 관심 없고 끊임없이 선수들을 도발한 사람으로 팬들 사이에도 유명했다. 당시 러커는 일방적으로 맞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옆에 있는 하이랜더 팬들은 콥을 응원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러커의 평소 행실이 좋지 않았다.”
콥이 엽기적인 행동을 계속 했던 이유는 어쩌면 그가 정의로운 성품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러커라는 팬은 뉴욕을 방문하는 모든 선수들에게 골치거리였고 그의 반복적인 비난은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오늘날로 보면 끊임없이 댓글로 선수와 그 가족을 욕하는 댓글러와 비슷했을지 모르겠다.
야구의 전설들이다. 왼쪽부터 루 게릭, 트리스 스피커, 타이 콥, 베이브 루스. 1928년의 사진으로 이때는 베이브 루스와 콥이 화해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 그라운드의 엽기맨
그의 엽기적인 행동만 모아도 책 한 권 쓸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라고 한다. '홈런왕' 베이브 루스에 대한 이야기가 연일 보도되고, 한 기자가 그에게 "루스의 파워는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하자 승부욕이 발동한 콥은 한 경기에서 홈런 3개, 다음 경기에서 2개를 폭발시켰다. 홈런을 못치는 것이 아니라 안치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대목이었다. 홈런 12개가 콥의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었기 때문에 그는 확실히 홈런 타자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콥은 홈런 타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베이브 루스와의 신경전은 당시 언론의 관심사였다.
1924년 7월5일자 오클랜드 포스트 인콰이어러지는 타이 콥과 베이브 루스의 신경전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두 선수는 지난 몇 년 동안 서로를 싫어하는 적과 같았다. 두 선수가 서로를 싫어하게 된 계기는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1년 여름, 어떤 경기가 시작하기에 앞서 사진 기자가 타이 콥에게 물었다. '당신과 베이브 루스를 사진 하나에 넣고 싶은데 촬영이 가능하겠어요?' 타이 콥은 동의했다. 그러나 베이브 루스는 전날 타이 콥과 갈등 상황이 있었기에 '돈을 주지 않으면 촬영에 응하지 않겠다'라며 거절했다. 사진 기자가 이 내용을 타이 콥에게 전하자 콥은 "그 코끼리가 미래에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부탁을 할 것이다. 야구에서 오늘 영웅이 내일은 부랑자가 된다. 그와 같이 못생긴 코를 갖고 있으면 사진 찍는 게 싫을 수도 있겠다."라고 비꼬듯이 말했다.”
이 사건 후 두 사람은 원수처럼 지냈다. 베이브 루스는 자신의 코에 대해 말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는 데 타이 콥이 그것을 건드렸고 둘은 필드 안팎에서 늘 으르렁거렸다.
콥은 또 원래 오른손 타자였으나 1루에 빨리 도달하기 위해 왼손 타자로 전향하기도 했다. 우투/좌타의 선수가 된 것이다.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의 야구 인생은 시작부터가 특이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17세가 되자 갑자기 야구를 하기 위해 타지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아들이 변호사가 되길 원했던 그의 부친(윌리엄 콥)은 강력히 반대했지만 고집불통의 타이 콥을 이겨내지 못했고 결국 15달러짜리 수표 6장을 써주며 "성공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라"는 말로 자식을 떠나보냈다.
콥은 어거스타 투어리스트라는 팀에 입단, 월급 90달러를 받는 선수가 됐다. 이 팀에서 맹활약한 콥은 이듬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500달러의 이적료로 권리가 이양됐다. 18세에 메이저리거가 됐던 것이다.
그런데 메이저리거가 되기 직전 콥은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전해 들었다. 1905년 8월 8일 밤, 그의 아버지는 총격으로 사망했다. 아버지는 젊은 아내 아만다 콥의 총에 맞았다. 콥은 "아버지는 내가 18살 때 산탄총에 머리가 날아가 죽었다. 우리 가족 중 한 명에 의해서. 나는 그 사건의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했다."
타이 콥의 친모 아만다 콥은 자발적 과실치사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이듬해 봄, 법정에서 남편을 침입자로 착각해 총을 쐈다고 증언한 후 무죄를 선고받았다. 아마도 이 사건이 콥으로하여금 독특한 행동을 하게 했을지 모른다.
1918년의 타이 콥. 사진 - 퍼블릭 도메인
■ 나쁜 사람 vs 좋은 사람
타이 콥 박물관의 큐레이터인 줄리 리즈웨이는 "그는 열정적이고 승부욕이 강했던 것이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타이 콥 헬스케어 시스템, 타이 콥 교육 재단 등이 탄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며 "실제 타이 콥은 병원 건립을 위해 1949년 10만 달러를 내놓았다"고 덧붙였다. 10만 달러는 당시로는 엄청난 액수였다. 타이거스 경기 중계 위원이었던 어니 하웰은 "1940년대에 방송인으로서 새내기였을 때 많은 사람이 '타이 콥은 경험 없는 언론인과는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는 친절하게 자신의 집에서 인터뷰에 응했다"며 비열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타이 콥이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힌 것은 그의 자서전을 대필한 앨 스텀프가 콥의 사후에 발간한 책 때문이다. 콥이 죽기 전 10개월의 생활을 상세히 소개했던 스텀프는 부정적인 내용만을 다뤘다. 이에 대해 타이 콥 박물관 측은 "암 선고를 받은 사람의 마지막 10개월은 아름다울 수 없다. 그것이 마치 타이 콥 인생의 전부인 양 글을 쓰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타이 콥 박물관: www.tycobbmuseum.org
[타이 콥 프로필]
이름: 타이러스 레이몬드 콥
생년월일: 1886년 12월18일
출생지: 조지아주 내로우스
사망일: 1961년 7월17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메이저리그 데뷔: 1905년 8월30일
포지션: 중견수
명예의 전당: 98.23%의 득표율로 헌액(1936년)
소속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1905-1926), 필라델피아 A's (1927-1928)
[타이 콥 관련 영화 Cobb(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