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0월6일. 김혜자 씨가 월드비전 행사 관계로 LA를 방문했을 때였다. 당시 양현승 목사의 주선으로 기자는 대배우 김혜자 씨와 인터넷 채팅을 하게 되었다. 인터넷을 통해 채팅을 하면서 네티즌들의 질문에 답하는 시간이었다. 그 내용을 소개한다.
*인터뷰어: 박병기
*인터뷰이: 배우 김혜자 씨
*인터뷰 장소: LA 팔레스 호텔 로열볼룸
*인터뷰 날짜: 1999년 10월6일 오전 7시
Photo by NJT. William Choi. 김혜자 씨와의 라이브 채팅 당시의 모습
『북한 동포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기 보다는 실제적인 도움을 줘야한다고 생각했어요.』
탤런트 김혜자씨가 인터넷 라이브 채팅 이벤트에서 전 세계 이용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지난 1999년 10월6일 오전 7시 LA 서울 팔레스 호텔 로열볼룸에서 열린 이번 행사에는 한국, 미국, 중국등지의 네티즌들이 참가해 평소에 궁금한 북한 이야기, 김혜자씨 개인 이야기에 대해 인터넷을 통해 대화를 나눴다.
다음은 채팅을 간추린 내용. 사회는 필자와 양현승 목사가 함께 맡았다.
▷먼저 인사 말씀을 해주세요.
▶김혜자(이하 김): 이런 매체를 통한 대화는 처음이에요. 너무 기대가 됩니다. 각 처에서 (인터넷을 통해) 동시에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이들고 모두가 마음을 같이 한다고 생각하니 기뻐요.
▷북한에 방문하셨던 이야기를 해주시겠어요.
▶김: 평양, 안주, 개천, 선천 등을 둘러보았어요. 아이들을 많이 만났지요. 영아원과 고아원을 주로 방문했습니다.
▷아이들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셨나요?
▶김: 저는 보통 아이들을 보면서 정말 예뻐하거든요. 그런데 그곳 아이들이 명랑하게 뛰놀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참 안타까웠습니다. 옷을 충분히 가져 갔고 일일이 입혀주다 보니까 너무 많아서 나머지는 그곳 어른들에게 입혀주시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입혀주지 않은 어린이들은 울고 그러드라구요. 역시 아이들은 어디나 다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양은 어떤 곳인가요?
▶김: 생각보다 깨끗하고 조용한 도시였어요. 마치 「인형의 방」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아름다운 도시였는데 도시의 맥박은 느끼지 못했어요.
▷월드비전 친선 대사로 아프리카도 다녀오셨지요?
▶김: 이 이야기는 공개하지 않았었는데 솔직히 아프리카에 갔을때 처음에는 여행간다는 기분이었어요. 이곳의 네티즌들에게 처음으로 밝히는데 「건들거리는 마음」으로 갔었어요. 그런데 너무 놀랐어요. 지구상에 이런 일이 있구나 하고요. 일주일 내내 울기만 했어요. 아이들도 새다리 처럼 얇고 우리 옛날 전쟁 때 배들이 튀어난 것처럼 눈에 파리 떼가 붙어있어 있는데도 당연한 것 처럼 사는 아이들을 보고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그곳은 눈병도 많더라구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라구요. 한화로 8백 원만 있으면 페니실린을 살수 있는데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했다고 하더라구요. 아이들이 전염병으로 픽픽 쓰려지는 것을 보면서도 많이 놀랐고 일가족이 아파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구요. 여기가 바로 지옥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월드비전 친선 대사로서 다른 자세를 갖게 되셨군요.
▶김: 처음엔 양심의 가책을 받아 울기만 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눈물보다는 이제 실제적인 도움을 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연예인 신분이다보니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 달란트를 쓰라고 하셨나봐요. 연예인들이 움직이면 호소력도 있고 좋은 일을 하는데 효과적이니까요. 사실 제 성격상 내놓고 무슨 일을 하지는 않거든요. 이 일은 그러나 좀 성격이 달라요. 그런데「월드비전의 친선대사」라고 불릴 때마다 솔직히 부끄러워요. 그냥 월드비전의 도우미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북한 어린이를 돕게다는 마음을 처음 품게 되셨습니까?
▶김: 제 나이쯤 되신 분들은 『북한이 우리나라인데』라고 늘 생각합니다. 젊은 청년들은 남북이 갈라진 것이 가슴에 와 닿지는 않지만 저희 세대들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런 마음이 항상 있었지요. 개인적으로 통일이 되면 한국이 세계 최고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신념이 있어요. 이북의 자원과 아름다운 강산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남북이 빨리 화해를 하면 좋겠어요.
▷친분 있으신 연예인분들중 기아 돕기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누구인가요?
▶김: 탤런트 정영숙씨, 임동진씨, 한인수씨, 박상원씨등도 월드비전과 유니세프의 친선대사로 일하고 계세요. 소설가이신 박완서 선생도 참여하고 있지요.
▷북한에서 어린이들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없었나요?
▶김: 선천에 갔을때 아이들이 재롱을 보여줬는데 남자애가 노래를 하는데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보는 것 같았어요. 너무나 재능이 뛰어나서 놀랐어요. 저는 그 아이를 계속 지켜볼거라고 결심했죠. 그 아이는 잘만 가르치면 세계적인 성악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북한이 시급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김: 우리는 정치가가 아니니까, 그쪽은 잘모르겠고 아이들을 굶기지 않고 먹이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은 정직하기 때문에 배만 고프지 않으면 잘 뛰어놀거든요. 북한 아이들도 개구장이들이 되면 좋겠어요.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한국의 어머니 상」이라고들 하고 이미지가 너무 좋은신데요 김치를 못 담그신다는게 사실인가요?
▶김: 제가 맛나게 잘 담구지 못한다는 말이지 그것은 잘 못 전해진 말이에요. 제가 외아들의 외며느리였거든요. 김치를 못담구면 어떻게 시집살이 했겠어요. (네티즌들, 이때 다양한 반응을 보였음) 그 이야기는 한국의 한 토크쇼에 나와서 탤런트 김수미씨가 한말씀 때문에 그래요. 그 분은 워낙 반찬을 잘하시는 분이거든요. 수미씨가 농담으로『혜자언니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식으로 말을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렇게 비춰졌어요. 그 일 이후 주위에서 『정말이냐구』 묻는 분들이 많아요.
▷연예활동은 언제까지 하실건가요?
▶김: 시청자들께서 『김혜자가 왜 이렇게 많이 나와』 그러시면 그만 두겠습니다.(웃음)
▷마지막으로 네티즌과 독자 여러분께 인사 말씀 부탁드려요.
▶김: 인터넷 채팅, 너무 신기했어요. 참 좋은 경험이었어요. 참가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려요. 안녕히계시고 모두 행복하시길.
영화 ’마더’의 포스터
[AI가 소개하는 배우 김혜자]
베테랑 배우 김혜자는 1991년부터 한국월드비전 친선대사로 활동했다. 김혜자의 연기는 배우의 몸에서 직접 발산되는 듯하다. 그의 손짓이나 눈빛 움직임 하나하나가 연기자가 아닌 실제 해당되는 인물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그가 출연한 영화 ‘마더’는 봉준호라는 뛰어난 감독의 연출로 2009년 최고의 한국 영화가 된 바 있다. 누아르 스릴러 ‘마더’에서 김혜자는 정신지체아에게 집착하는 중년 미혼모 연기를 했다. 그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라는 캐릭터를 갖고 있었는데 이 영화로 변신에 성공했고 국제적인 찬사를 받는 배우가 되었다.
그가 22년 동안 출연한 는 자식을 무조건으로 사랑하고 자기희생적인 (과거) 한국 어머니의 전형으로 대한민국 관객들에게 각인 시킨 바 있다. 관객들에게 알리고 대중의 이름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는 로스엔젤레스 영화평론가협회가 선정한 여우주연상을 받았는데 이는 한국 여배우로서는 최초로 받게 된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오랫동안 김혜자의 작품에 매료된 바 있으며 이 베테랑 여배우에 초점을 맞춘 영화를 연출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수년 동안 김혜자를 찾아 ‘마더’의 스토리를 말해주는 등 지극 정성을 보였다. 봉 감독은 ‘마더’에서 김혜자 배우가 보여준 모성애는 국가적 상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양현승 목사의 후기]
한국에서 장미와 콩나물이 인기리에 종영이 된 시점이었고 한국의 배우 김혜자 씨가 월드비전 친선 대사고 있어서 거기에 착안해서 김혜자 씨를 미국으로 초청해서 기금 모금 행사를 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김혜자 씨는 당시 북한을 방문한 직후였다. 행사 이름을 ‘눈물 젖은 외출’로 해서 김혜자 씨를 초청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나는 김혜자 씨를 본 적이 없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배우 임동진 씨가 뮤지컬을 미국에서 공연하고 싶어서 나를 초청하고 리셉션이 있었을 때 그때 출연했던 김혜자 씨가 있었음에도 나도 잘 모르고 지냈다.
장미와 콩나물이 인기 있어서 그를 초청하자고 추진을 했다. 오재식 한국 월드비전 회장이 적극적으로 도와줘서 성사가 되었다. 세계 복음 선교 연합회 주관으로 LA에 있는 동양선교교회에서 토크쇼 스타일의 기금 모금 북한 방문 행사를 가졌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갖는 행사 그리고 북한을 다녀와서 북한의 어린 아이를 도와달라는 행사는 보고식의 그런 집회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지양하고 교회 예배당에서 갖는 행사였지만 토크쇼 스타일로 나와 김혜자 씨가 교회 예배당 강대상에서 토크쇼를 하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그때로서는 드물었던 인터넷을 통한 문자 생중계를 실시했다.
토크쇼의 시나리오를 구성하면서 종영을 한 장미와 콩나물의 한 장면을 방영하고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 연속극을 본 적이 없는 나는 비디오 테이프를 10개 정도 빌려다가 장면 장면을 보면서 김혜자 씨가 우는 장면을 보게 되었고 그것을 관객에 보여줬다. 그날 특이했던 것은 탤런트인 김혜자 씨에게 노래를 시켰고 그분이 좋아하는 “색동옷 저고리…”를 불렀다. 나는 이를 위해 색동옷을 보자기에 싸서 토크쇼 강대상에 앉아서 프로그램 중간쯤에 김혜자 씨가 좋아하는 것을 보여주고…즉석에서 청해서 부르게 했다.
미주 한국일보, 중앙일보의 광고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여느 광고와는 달리, 교회에서 하는 행사에 ‘눈물 젖은 외출’이었다. 사람들이 뭔가 있을 것이라는 마음을 품고 너무 많이 와서 성가대가 서는 자리, 복도까지 사람이 꽉 찼다. 들어올 수 없어서 돌아가는 사람이 많았다. 돌아간 사람들은 그 이튿날 그날 실황을 녹음을 하는.
김혜자 씨가 뉴욕 집회도 같이 가자고 졸랐는데 내 아내와 함께 공항에 가면서…같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Photo by 뉴스인스타. 김혜자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