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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Outro)] '팝의 황제'로서 영원히 기억될 마이클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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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24년08월23일 07시46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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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 팝 그룹 잭슨 파이브, 잭슨 형제들로 구성된 이 그룹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저메인, 티토, 재키, 마이클, 말론, 그리고 뒤에 랜디가 있다. (사진: William Milsom/Getty Images)

 

마이클 잭슨은 단순히 한 시대를 풍미한 음악가가 아니라, 전 세계 대중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무대 위에서 시작되었고, 그는 끊임없는 노력과 타고난 재능으로 '팝의 황제'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그의 성공 뒤에는 수많은 논란과 개인적인 고통이 존재했다.

 

잭슨의 어린 시절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조 잭슨은 어린 마이클과 형제들을 '잭슨 파이브'라는 그룹으로 결성해 대중 앞에 세웠다. 잭슨 파이브는 탁월한 퍼포먼스와 마이클의 독보적인 목소리로 음악 차트에서 연속적인 히트를 기록하며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마이클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무대 장악력과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그룹의 중심 인물로 자리 잡았다.

 

1980년대 초반의 잭슨 가족 사진. 왼쪽부터 재키, 티토, 마이클, 랜디, 그리고 말론 잭슨. (사진: Hulton Archive/Getty Images)

 

마이클 잭슨의 스타덤은 그룹 활동에 그치지 않았다. 1970년대 후반, 그는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Off the Wall'이라는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그의 음악적 성장을 증명해주었고, 퀸시 존스와의 협업을 통해 비평적,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이 앨범은 잭슨이 솔로 아티스트로서 독립적으로 설 수 있음을 입증한 첫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의 진정한 세계적 스타로의 도약은 1982년 발매된 'Thriller' 앨범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앨범은 음악 산업 역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을 세웠다. 'Thriller'는 단순히 음악 차트의 1위를 차지하는 것을 넘어, 뮤직 비디오라는 새로운 미디어 형식을 통해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Billie Jean', 'Beat It', 'Thriller'와 같은 히트곡들은 MTV에서 수없이 재생되며, 음악과 비주얼의 결합이 어떻게 대중문화를 지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앨범은 1억 장 이상 판매되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로 기록되었고, 마이클 잭슨은 전 세계 음악계의 중심에 섰다.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잭슨의 삶은 점차 복잡해지고 어려워졌다. 그는 극심한 대중의 주목과 사생활 침해로 인해 큰 스트레스를 받았고, 이는 그의 성격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점점 더 내성적이고 고립된 삶을 살게 된 잭슨은 결국 네버랜드라는 자신의 개인적인 도피처를 만들었다. 이곳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잭슨의 내면적 평온을 찾기 위한 공간이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 - 1996년 11월 10일: 마이클 잭슨이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에릭슨 스타디움에서 열린 ”HIStory” 월드 투어 콘서트 중 무대에서 공연하고 있다. (사진: Phil Walter/Getty Images)

 

잭슨의 개인적 변화는 외모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80년대 초반부터 그의 피부색이 점점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백반증이라는 질환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중과 언론은 그가 자신의 흑인 정체성을 부정하고자 피부를 표백했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오해와 왜곡된 보도는 잭슨에게 큰 고통을 안겼고, 그는 여러 차례 이에 대해 해명했지만, 대중의 시선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와 함께 성형수술 논란도 잭슨을 괴롭혔다. 그는 코 수술 외에는 다른 성형수술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외모 변화는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가장 큰 논란은 아동 성추행 혐의와 관련된 사건이었다. 1993년과 2003년에 두 차례의 아동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한 잭슨은 모두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 사건들은 그의 이미지에 지울 수 없는 흠집을 남겼다. 잭슨은 자신이 결백하다고 주장했지만, 대중의 시선은 여전히 그를 의심했고, 이는 그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2003년 사건 이후 잭슨은 깊은 상처를 입었고, 이로 인해 점점 더 은둔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1993년 1월 31일: 가수 마이클 잭슨이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의 로즈 볼에서 열린 슈퍼볼 XXVII의 하프타임 쇼에서 공연하고 있다. 이 경기는 댈러스 카우보이스와 버펄로 빌스의 대결로, 카우보이스가 52-17로 승리했다. (사진 제공: Mike Powell /Allsport)

 

잭슨의 삶에서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그의 약물 문제였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진통제와 수면제에 의존했고, 이는 결국 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게 된다. 2009년, 마이클 잭슨은 약물(프로포폴) 과다 복용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죽음은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안겼다. 잭슨의 주치의였던 콘래드 머레이 박사는 과실치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이 사건은 의료계와 대중 사이에서 유명인의 약물 남용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마이클 잭슨의 삶은 수많은 업적과 논란이 공존했던 복잡한 여정이었다. 그는 '팝의 황제'로서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의 음악과 퍼포먼스는 지금도 전 세계 수많은 팬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인 삶은 고통과 외로움으로 가득 찼고, 대중의 지나친 관심과 기대는 그를 점점 더 고립시켰다.

 

마이클 잭슨의 유산은 그의 음악과 춤, 그리고 대중문화에 미친 깊은 영향력으로 남아 있다. 그는 음악적 혁신을 이루었고,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 사랑이 불러온 고통 속에서 살았다. 잭슨은 그의 노래와 춤을 통해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고, 그의 삶은 예술가의 창작과 인간의 고뇌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그의 음악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세대를 넘어 울려 퍼질 것이며, '팝의 황제'로서의 마이클 잭슨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는 단순히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가 아니라, 음악 역사에서 빛나는 별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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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훈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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