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산타마리아 - 3월 2일: 2005년 3월 2일, 마이클 잭슨이 캘리포니아 산타마리아에 있는 산타바바라 법원에 아동 성추행 재판의 세 번째 날을 맞아 도착하고 있다. 잭슨은 소년을 성추행하고, 술을 제공하며, 아동 유괴, 불법 감금, 그리고 공갈 음모를 꾸민 혐의로 10건의 기소를 받았으며,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사진 제공: Carlo Allegri/Getty Images)
아동 성추행 진위마이클 잭슨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오명은 바로 아동 성추행 혐의로 두 차례 고소를 당했던 일이다. 잭슨은 1993년 13세 소년의 부모로부터 아동 성추행 고소를 당했지만 법정 밖에서의 합의를 통해 무죄가 됐고 2003년에도 아동을 성희롱한 혐의로 재판을 받아 역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무혐의 판정을 받았지만 마이클에 대한 이미지는 아동을 학대한 사람으로 굳혀졌다.
마이클은 1995년 ABC-TV의 프라임타임 라이브에 출연 첫 번째 아동 성희롱 사건 재판에 대해 입을 열었다. 마이클은 “나는 어린 아이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다. 내 마음에 그런 것은 없다. 그런 일에는 흥미조차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그렇다면 왜 법정 밖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나’라는 질문에 대해 “변호사가 이 사건을 법정으로 끌고가면 무죄로 풀려날 보장이 없다고 권고해서 안전한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변호사는 이 사건이 마무리되려면 7년 정도 걸릴 수도 있다고 말해 나는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마이클 잭슨: 팝의 황제’라는 책을 쓴 리사 캠벨은 이 사건의 발생 동기는 ‘돈’이었다고 결론을 냈다. 즉 13세 소년의 아버지가 돈을 노리고 이와 같은 일을 벌였다고 설명했다.
실제 1993년 마이클을 고소했던 에반 챈들러의 아들 조디 챈들러는 아버지가 거짓말을 했다고 최근 온천하에 밝혔다. 당시 마이클을 고소함으로 챈들러 가족이 받은 금액은 1,500만 달러 이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두 번째 사건은 2003년에 발생했다. 역시 13세였던 소년이 잭슨의 네버랜드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마이클과 한방을 썼다고 말한 것이 문제가 됐다. LA 카운티의 아동 복지국은 잭슨이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확인했고 소년의 가족들도 아무런 일이 없었다고 밝혔지만 문제는 커졌다.
마이클은 암수술을 받았던 이 소년을 격려하기 위해 네버랜드로 초대한 것이었고 한방 또는 한침대에서 잠을 잤을 뿐인데 이것이 성희롱 사건으로 불거졌던 것이다. 이후 마이클은 "이 소년과 한침대를 썼지만 결코 아무일도 없었다"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법정을 드나들었던 마이클은 정신적으로 충격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심령연구가이자 마술사인 유리 겔러는 언젠가 최면상태에서 마이클에게 성희롱 여부를 질문했는데 이에 '팝의 황제'는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한편, 마이클은 이 사건으로 인해 외국으로의 이민을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아동 성학대 사건이 터진 후 대부분의 미국인은 그가 아동을 희롱했다고 믿었지만 캐나다 몬트리올의 시민들은 성희롱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바 있다. 이런 결과에 감화한 마이클은 몬트리올로의 이사를 심각하게 고려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마이클은 실제 몬트리올을 방문해 자신이 살 곳을 알아봤지만 프라이버시가 침해되지 않을 장소를 찾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이 일은 잭슨의 공인으로서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그의 수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여러 광고 계약이 취소되었고, 특히 10년 동안 유지되던 펩시와의 계약이 종료되었다. 잭슨은 이 사건으로 인해 건강도 악화되어 투어를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잭슨의 누나 라 토야 잭슨은 한때 잭슨이 소아성애자라고 주장했으나, 나중에 이를 철회하면서 당시 남편의 강요로 그런 발언을 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이후에도 잭슨의 삶과 경력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음악 활동에도 지속적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인 2019년에는 다큐멘터리 Leaving Neverland 가 공개되며 잭슨을 둘러싼 성추행 의혹이 다시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사건은 잭슨의 개인적, 직업적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