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og | 오바마 코드, 정치인들은 해독할 수 있을까?(8)]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계층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정치인 |
[들어가는 말 (매회반복)]
버락 오바마. 그에게는 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세계인이 인정하는 지도자”, “최초의 흑인 대통령”, “비탄자들의 총사령관”, “미국에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 지도자”, “절대 신념을 잃지 않은 대통령”, “모범적이고 자상한 아버지이자 남편”, “쿨(Cool)한 지도자”
오바마는 많은 수식어로 전 세계인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는 국민과 가장 가까이에서 소통하고 공감했던 리더로 인상 깊게 기억되고 있다.
오바마는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 미국 최초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대통령에 당선돼 제44대 미국 대통령이 됐다. 그는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해 총 8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퇴임 시 최종 지지율은 59%로 빌 클린턴(66%), 로널드 레이건(63%)에 이어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직전 대통령인 조지 W. 부시(34%), 다음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34%)에 비하면 엄청나게 높은 수치이다.
오바마는 퇴임 후 몇 년이 지난 2022년 NBC 뉴스의 설문조사에서도 공인(public figure) 중 긍정평가 51%를 받아 일론 머스크(31%), 조 바이든(42%), 케빈 매카시(13%), 도널드 트럼프(35%), 낸시 펠로시(31%), 마크 저커버그(8%)를 크게 앞질렀다.
2018년 퓨 리서치의 설문조사에서도 44%의 응답자가 오바마를 최고 또는 두 번째로 최고의 대통령으로 꼽아 단연 1위에 올랐고 빌 클린턴(33%), 로널드 레이건(32%), 트럼프(19%)를 제쳤다. 존 F. 케네디는(12%)를 기록했다.
오바마는 어떤 대통령이었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물론 그가 완벽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정책 중에는 필자의 철학과 맞지 않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민주주의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대통령이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많은 사람이 그를 높이 평가했던 이유다.
오늘날 많은 한국 정치인들이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지지를 받으려는 정치인이라면 오바마에게서 배울 게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시리즈로 나눠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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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때부터 열 살때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살았던 버락 오바마(이하 배리)는 10세 때 하와이로 터전을 옮겼다. 모친은 인도네시아에서 그대로 살고 배리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됐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백인이다. 외할머니 매들린이 은행에서 일을 했기에 배리는 사립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의 첫 미국 학교 이름은 푸나호우 사립학교(Punahou School)였다.
열살 때 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배리는 그해 크리스마스 날 큰 선물을 받았다. 바로 친아버지의 미국 방문이었다. 케냐 출신 버락 오바마 시니어는 처음으로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배리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헤어졌기에 아버지와의 추억이 전혀 없었다. 그저 어머니에게서 들은 말이 전부였다. 이 만남을 통해 배리는 케냐에 배다른 남매 6명이 있음을 알게 됐다.
이 만남에서 배리는 아버지가 자신감 넘치는 사람임을 알게 됐다. 아버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나쁜 기억도 배리에게 남겨졌다. 아버지는 어머니 그리고 외할머니와 논쟁을 했는데 이는 배리의 TV 보는 습관이 원인이 됐다. 아버지는 배리가 공부하는 시간보다 TV시청 시간이 더 길다고 생각했고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언쟁이 오간 것은 배리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다.
배리는 아버지와의 만남을 통해 부모가 결혼에 실패했고 친부는 가족에 대한 책임을 포기했음을 알게 됐다. 이전까지 친부에 대해 좋은 말만 들었던 배리에게는 혼란스러운 경험이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내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의 잠재력을 현실화시키지 못한 분이었다. 그는 똑똑한 분이었지만 그의 인생은 혼란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한편, 모친 앤 던햄(Ann Dunham)은 두 번째 남편인 롤로 소에토로와 관계가 나빠졌다. 앤은 롤로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하와이에서 롤로를 만났을 때 앤은 둘이 힘을 합하면 인도네시아인들을 위한 봉사를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롤로는 강한 자의 편에 서길 원했다. 앤은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더욱 커졌다. 이러한 이상이 서로 다르자 두 사람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1971년 인도네시아에서 하와이로 돌아온 배리는 조부모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조부모는 손자를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앤은 배리의 교육비나 생활비를 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배리의 양육은 조부모의 몫이었다. 할아버지는 생명보험 세일즈맨이었는데 돈벌이가 신통치 않았고 다행히 외할머니 매들린이 하와이 은행의 부사장으로 승진하면서 배리의 교육에 더욱 투자를 할 수 있었다.
Obama Inauguration-Punahou High Marching Band
Obama Inauguration-Punahou High Marching Band by xtol7 |
배리가 다녔던 푸나호우 학교는 호놀룰루에서는 최고의 사립학교였다. 배리는 장학금을 받기는 했지만 남은 학비는 조부모가 책임을 졌다. 이 학교는 다양한 인종과 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 다녔던 곳으로 유치원생부터 12학년생까지 입학할 수 있었다. 76에이커의 큰 땅에 세워진 푸나호우는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사립학교였다.
1971년 가을부터 5학년으로 이 학교에 들어간 배리는 처음에는 인도네시아에서 갖고 온 샌달을 신고 옛 분위기가 나는 옷을 입고 다녔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이방인임을 철저히 깨달았다. 입학 몇 달 후 친구를 사귀게 되어 적응을 할 수 있었던 배리는 “좋은 학생이었고, 착하고, 마냥 행복하고 자신을 지킬 줄 아는 학생이었다.” 배리에게 산수와 과학을 가르쳤던 팰 에드렛지의 말이다.
배리는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평균 B+는 유지했다. 그는 공부 외의 다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독서를 즐겼다. 고등학생이 됐을 무렵 배리는 농구에 푹 빠졌다. 친부인 버락 오바마 시니어가 아들에게 농구공을 선물로 보내줄 정도로 그는 농구 마니아가 됐다. 그는 학교에서 항상 농구공을 드리블하면서 다녔다. 그리고 기회만 되면 농구 연습을 했다. 더운 날에도 그는 아스팔트 코트에서 슛 연습을 했다.
고교 시절 그의 코치였던 크리스 맥래클린은 “배리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체육관 쥐(gym rat. 체육관에서 사는 연습벌레라는 의미)였다”고 회상할 정도로 배리는 농구를 좋아했다. 배리는 11학년, 12학년 때 학교 농구팀에 들어갔다. 배리는 팀에서 포워드로 활동했다.
배리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그의 곁에는 친모 앤 던햄과 여동생 마야가 있었다. 앤은 두 번째 남편 롤로와 헤어지고 하와이로 돌아왔다. 오바마 가족은 작은 아파트를 임대해서 살았다. 배리는 농구에 빠져 살면서 동시에 하와이의 천국과 같은 삶을 즐겼다. 그는 고교시절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방과 후에는 해변가에서 수영을 하거나 서핑을 했다. 그리고 농구팀에 들어간 후에는 농구에 열정을 쏟았다.
barack obama by TravelingMan [버락 오바마 조부모의 젊은 시절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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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가족의 재정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모친 앤은 하와이대의 인류학 석사과정에 들어가 경제활동이 많이 제한됐다. 배리는 엄마를 잘 도왔다. 가게에서 물건을 산다든가, 동생을 돌보는 일, 빨래 하는 일 등을 도왔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에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했다. 배리는 흑인으로서 당하는 차별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백인 여성과 엘리베이터를 타면 흑인인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어린 시절 경험이 그가 정치인으로서 성장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오바마는 어린 시절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다양한 문화를 직접 경험했다. 이러한 다문화적 배경은 그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오바마의 어머니 앤 던햄은 인류학 석사과정을 밟으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사회적 책임감을 가르쳤다. 이러한 어머니의 가르침은 오바마에게 공정성과 사회 정의에 대한 깊은 이해를 심어주었다. 또한, 오바마는 친부와의 만남을 통해 가정의 중요성과 책임감을 배우며, 아버지의 부재와 혼란스러운 삶은 그가 자신의 삶을 더욱 단단히 다잡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와이에서 조부모와 함께 살며 안정된 가정환경을 제공받은 오바마는 조부모의 지원 덕분에 푸나호우 사립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이 학교에서 오바마는 평균 B+를 유지하며 성실하게 학업에 임했고, 동시에 농구에 열정을 쏟아 부으며 팀 활동을 통해 협동심과 리더십을 배웠다.
특히, 오바마는 하와이에서 흑인으로서 겪는 차별을 경험하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은 그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계층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정치인이 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다양한 경험들은 오바마가 포용력 있고 공정한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의 다문화적 배경과 가족, 학업, 스포츠를 통해 배운 가치들은 그가 정치에서 다양한 시각을 이해하고 소통하며 정책을 수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오바마의 어린 시절 경험은 그가 국민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리더로서 기억되게 했으며, 이는 그가 미국 대통령으로서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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