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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og | 오바마 코드, 정치인들은 해독할 수 있을까?(12)] 보수와 진보의 의견을 균형 있게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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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24년09월08일 00시05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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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og | 오바마 코드, 정치인들은 해독할 수 있을까?(12)] 보수와 진보의 의견을 균형 있게 수용

​[들어가는 말 (매회반복)] 

 

버락 오바마. 그에게는 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세계인이 인정하는 지도자”, “최초의 흑인 대통령”, “비탄자들의 총사령관”, “미국에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 지도자”, “절대 신념을 잃지 않은 대통령”, “모범적이고 자상한 아버지이자 남편”, “쿨(Cool)한 지도자”

오바마는 많은 수식어로 전 세계인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는 국민과 가장 가까이에서 소통하고 공감했던 리더로 인상 깊게 기억되고 있다. 

오바마는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 미국 최초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대통령에 당선돼 제44대 미국 대통령이 됐다. 그는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해 총 8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퇴임 시 최종 지지율은 59%로 빌 클린턴(66%), 로널드 레이건(63%)에 이어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직전 대통령인 조지 W. 부시(34%), 다음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34%)에 비하면 엄청나게 높은 수치이다.

오바마는 퇴임 후 몇 년이 지난 2022년 NBC 뉴스의 설문조사에서도 공인(public figure) 중 긍정평가 51%를 받아 일론 머스크(31%), 조 바이든(42%), 케빈 매카시(13%), 도널드 트럼프(35%), 낸시 펠로시(31%), 마크 저커버그(8%)를 크게 앞질렀다. 

2018년 퓨 리서치의 설문조사에서도 44%의 응답자가 오바마를 최고 또는 두 번째로 최고의 대통령으로 꼽아 단연 1위에 올랐고 빌 클린턴(33%), 로널드 레이건(32%), 트럼프(19%)를 제쳤다. 존 F. 케네디는(12%)를 기록했다. 

오바마는 어떤 대통령이었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물론 그가 완벽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정책 중에는 필자의 철학과 맞지 않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민주주의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대통령이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많은 사람이 그를 높이 평가했던 이유다.

오늘날 많은 한국 정치인들이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지지를 받으려는 정치인이라면 오바마에게서 배울 게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시리즈로 나눠보기로 한다. 
 

 

하버드대 시절 오바마

 

저소득층이 몰려사는 지역을 개발하기 위한 버락 오바마의 사회운동가 활동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가 주로 일했던 지역은 시카고의 알트겔드 가든(Altgeld Garden)이라는 곳이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사회운동가였던 오바마에게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등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오바마는 이러한 현실에 점점 화가 났고 자신이 힘이 없음을 발견했다.

그가 좌절감을 느낄 무렵인 1987년 11월 시카고의 첫 흑인 시장이었던 해롤드 워싱턴이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이는 흑인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시카고 흑인들은 그를 롤모델로 생각하고 살았고 흑인 빈민가가 그의 노력으로 좀더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있었다. 수천 명이 그의 추모 행사에 참여했다. 대부분 흑인은 충격에 휩싸여 흑인 사회의 미래를 걱정했다.


오바마는 워싱턴의 활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정치가가 됐고 어떻게 지역 사회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고찰했다. 오바마가 내린 결론은 “변호사가 되어야 제대로 도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워싱턴 전 시장은 변호사로 활동하던 중에 정치에 입문한 바 있다.
 

오바마는 법학 학위가 있는 정치인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훨씬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3년 동안 빈민가 도시 개발 운동가로 활동했던 오바마는 하버드대 입학을 결심했다.

 

LA에 있는 옥시덴탈 칼리지를 거쳐 뉴욕의 콜롬비아대에서 정치학 학위를 받았던 그는 3년 동안 현장 경험을 쌓은 뒤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가 하버드대에 입학한 해는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는 다른 학생에 비해 2-3살 나이가 더 많았다. 동료 학생들은 오바마의 경험을 높이 샀다. 3년 동안 사회 운동가로 활동한 이력은 자신의 공부뿐만 아니라 동료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콜럼비아대학 때처럼 그는 하버드에서 공부에 올인했다. 공부하면서 관여했던 일이 있었는데 바로 미국 내에서 법률과 관련돼 가장 권위 있는 잡지인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에서 글을 쓰고 편집을 하는 일이었다. 이후 그는 이 잡지의 회장이 돼 영향력 있는 인물로 떠올랐다. 1990-91 학기 회장이 선거에서 자유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오바마가 당선된 것은 의외였다. 그는 이 잡지의 첫 번째 흑인 회장으로 기록됐다.

 

 

당시 보수적인 편집인들이 그에게 표를 던졌기 때문인데 이유는 “적어도 그는 보수파의 의견을 신중히 들으려는 자세가 있었다”는 것. 오바마가 이 잡지의 회장이 되면서 경험한 것은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과 보수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의 견해 차가 극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보수파와 자유진영을 골고루 등용했다. 때론 흑인을 너무 등용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던 오바마는 “능력과 헌신도 그리고 개성을 보고 일을 맡겼다”고 설명했다.

 

오바마는 실용적인 것을 강조했다. 하버드에서 ‘흑인’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는 용어에 대한 토론이 있을 때 그는 “용어가 뭐가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열심히 살면서 우리의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더 좋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말해 호응을 얻었다.

오바마가 하버드 로 리뷰의 회장이 된 후 잡지는 비교적 평탄하게 운영됐다. 오바마의 친구였던 브래드 베렌슨은 “그와 일했던 동료 대부분은 자신이 제외된 느낌을 받지 않았다. 공통된 목표지점을 향해 힘을 합해 일하는 집단이었다”고 회상했다.

 

하버드에서 공부하면서 잡지 제작에 열심이었던 오바마는 여름 방학 중에는 시카고 지역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그는 또한 진보적인 성향의 교수였던 로렌스 트라이브 교수 밑에서 리서치 어시스턴트로 일했다. 트라이브 교수는 “이렇게 리서치를 잘하는 학생을 보지 못했다”고 법대생 오바마를 극찬했다.

 

하버드에서 오바마는 1991년 우등생(magna cum laude)으로 졸업했다. 졸업 직후 그는 다시 시카고로 갔다. 이곳에서 그는 민권 변호사로 일하기 시작했고 시카고법대에서 성문법을 가르쳤다. 하버드에서 그가 가진 꿈은 시카고 시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3년 동안 나눔을 가졌던 시카고의 빈민들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하려면 시카고 시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바마의 저소득층 지역 개발 활동은 그의 정치력 신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알트겔드 가든에서의 활동은 주민들의 냉소와 무관심 속에서 실패를 경험하게 했지만, 이는 오바마에게 현실 정치의 한계를 깨닫게 했다. 특히, 해롤드 워싱턴 시장의 급사는 흑인 사회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증폭시켰고, 오바마는 이를 통해 변호사로서 법적 지식을 갖춘 정치인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오바마는 하버드 로스쿨 입학을 결심하며, 자신의 정치적 도구를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하버드 로 리뷰의 첫 흑인 회장으로 선출된 것은 그의 리더십과 조정 능력을 입증했다. 보수와 진보의 의견을 균형 있게 수용하며, 실용적인 접근을 강조한 그의 리더십 스타일은 이후 정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버드에서의 경험은 오바마의 정치적 사고를 확장시키고,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기여했다. 졸업 후 시카고로 돌아와 민권 변호사로 활동하며, 그는 실제 문제 해결을 위한 법적 지식과 실천적 경험을 쌓았다. 이는 그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시키고, 실질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정치인으로서의 역량을 증대시켰다.

 

오바마의 시카고 활동은 정치적 신념과 현실적 접근의 균형을 맞추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경험은 그를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실용적 정치인으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시카고는 그의 정치적 출발점이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하와이에서 태어나 인도네시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다시 하와이로 돌아와 고등학교까지 다녔던 오바마는 LA와 뉴욕을 거쳐 시카고에 정착하게 됐다. 시카고는 그의 ‘제2의 고향’이자 정치적으로는 ‘제1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시카고에서 중요한 만남을 갖게 되는데 바로 영부인인 미셸 오바마와 데이트를 시작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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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기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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