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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og | 오바마 코드, 정치인들은 해독할 수 있을까?(11)]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법을 배움

등록일 2024년09월01일 01시00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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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og | 오바마 코드, 정치인들은 해독할 수 있을까?(11)] 

​[들어가는 말 (매회반복)] 

 

버락 오바마. 그에게는 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세계인이 인정하는 지도자”, “최초의 흑인 대통령”, “비탄자들의 총사령관”, “미국에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 지도자”, “절대 신념을 잃지 않은 대통령”, “모범적이고 자상한 아버지이자 남편”, “쿨(Cool)한 지도자”

오바마는 많은 수식어로 전 세계인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는 국민과 가장 가까이에서 소통하고 공감했던 리더로 인상 깊게 기억되고 있다. 

오바마는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 미국 최초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대통령에 당선돼 제44대 미국 대통령이 됐다. 그는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해 총 8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퇴임 시 최종 지지율은 59%로 빌 클린턴(66%), 로널드 레이건(63%)에 이어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직전 대통령인 조지 W. 부시(34%), 다음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34%)에 비하면 엄청나게 높은 수치이다.

오바마는 퇴임 후 몇 년이 지난 2022년 NBC 뉴스의 설문조사에서도 공인(public figure) 중 긍정평가 51%를 받아 일론 머스크(31%), 조 바이든(42%), 케빈 매카시(13%), 도널드 트럼프(35%), 낸시 펠로시(31%), 마크 저커버그(8%)를 크게 앞질렀다. 

2018년 퓨 리서치의 설문조사에서도 44%의 응답자가 오바마를 최고 또는 두 번째로 최고의 대통령으로 꼽아 단연 1위에 올랐고 빌 클린턴(33%), 로널드 레이건(32%), 트럼프(19%)를 제쳤다. 존 F. 케네디는(12%)를 기록했다. 

오바마는 어떤 대통령이었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물론 그가 완벽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정책 중에는 필자의 철학과 맞지 않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민주주의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대통령이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많은 사람이 그를 높이 평가했던 이유다.

오늘날 많은 한국 정치인들이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지지를 받으려는 정치인이라면 오바마에게서 배울 게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시리즈로 나눠보기로 한다. 
 

 

콜럼비아대학교에서 2년은 훗날 정치인이 된 버락 오바마에게 가장 중요한 2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그는 엄청난 분량의 독서를 했다. 오바마는 데이비드 멘델과의 인터뷰에서 “2년 동안 나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외로웠다. 그때 생각하는 남자가 자주 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2년 동안 소위 ‘오바마 사상’의 기초를 세운 그는 1983년 정치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졸업 후에도 맨해튼에서 계속 살았다. 그러면서 오바마는 외국에서 사업을 하는 기업을 위해 컨설트를 해주고 뉴스레터를 제작하는 회사에 취업하게 됐다.

 

그는 이 회사에서 1년 동안 리서치, 기사쓰기, 기사 편집 등의 일을 했다. 그는 그곳에서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양복을 입고 일하는 게 좋긴 했지만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자신의 꿈과는 맞지 않는 직업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1년 만에 그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간신히 월세를 낼 수 있을 정도만 월급을 받고 할렘과 브룩클린에서 일을 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했다. 그러던 중 제리 켈만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바마에게는 중요한 연락이었다. 켈만은 시카고 저소득층 지역에서 그들을 도울 사람을 찾고 있었다. 백인 유대인인 켈만은 시카고에 개발 지역 프로젝트(DCP)라는 단체를 시작했다. 오바마가 그곳에서 해야할 일은 주민들과 힘을 합해 더 좋은 지역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운동가의 역할이었다.

 

켈만이 맨해튼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한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눴다. 켈만은 오바마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켈만은 대학 교육을 받고 비교적 낮은 임금에도 일할 흑인을 찾고 있었는데 오바마는 적격자였다. 켈만은 오바마가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있음을 발견하고 더욱 그를 고용하고 싶었다.  

 

오바마는 일 자체도 마음에 들었지만 시카고라는 생소한 도시에서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게 좋게 느껴졌다. 결과적이지만 이곳에서의 경험은 오바마가 정치인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5년 6월 시카고에 도착한 오바마는 23세의 청년이었다. 그는 여전히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시카고에서 일하면서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지를 배웠다. 시카고의 사우스 사이드(South Side)는 미국에서 흑인이 집중된 가장 큰 지역이었다. 오바마는 그곳 주민들을 위해 일할 기회를 얻었다. 오바마는 한 번 맡겨진 일에 빠지면 깔끔하게 일을 해냈다. 물론 자주 실패를 경험했다.

켈만은 끊임없이 오바마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눴다. 그는 오바마에 대해 “남을 돕겠다는 사명에 불탄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켈만은 이어 “오바마는 야망도 있었지만 항상 봉사정신이 그것과 섞여있었다”고 덧붙였다. 켈만은 오바마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처럼 큰일을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우스 사이드에서 일하면서 오바마는 이곳 주민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까지 오바마는 종교적인 믿음은 없었다. 오바마는 이곳 주민들이 교회와 목사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오바마는 따라서 교회 예배에 참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교회와 목사가 존경받는지 알고 싶었다. 제러마이아 A. 라이트 목사는 그가 출석한 교회의 목사였다. 교회명은 트리니티 연합 교회였다. 라이트 목사는 오바마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라이트 목사는 이후 오바마의 멘토이자 선생이 됐다. 라이트는 오바마에게 흑인의 인생에서 기독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줬다. 라이트 목사는 또한 오바마가 종교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자에서 기독교 실천가가 될 수 있도록 도왔다.

 

오바마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미 상원의원에 출마했을 때 성경을 항상 갖고 다녔다. 그는 성경이 이웃을 돕고 이타적인 내용으로 가득찼다는 것을 알고 이것이 자신의 신념과 맞다고 생각했다. 오바마는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커뮤니티 개발자로 일하면서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주민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했으나 지도자들은 협조를 하지 않았다. 라이트 목사는 “이는 현실적인 아이디어는 아니다”라고 조언했다. 결국 교회 지도자들의 도움으로 커뮤니티 개발을 못하게 된 오바마는 자신이 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주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열심히 듣기 시작했다. 자신이 목회자처럼 뛰어다녔던 것이다. 그는 하루에 20-30명씩 만나 그들의 고충을 들었다. 이곳 주민들은 자신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며 정부도 빈곤층 흑인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오바마는 알게 됐다.

 

그는 또한 빈곤층의 주택문제, 환경문제, 건강문제 등을 보게 되었고 이를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그가 시카고에서 커뮤니티 개발 사업에 참여하면서 배운 것은 이상은 현실과 함께 가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바마는 1987년 최초의 흑인 시카고 시장이 된 해롤드 워싱턴이 이곳 흑인들의 희망적인 존재임을 알게 됐다.

 

콜롬비아대학교에서의 2년은 버락 오바마의 정치력 신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사상적 기초를 다졌고, 외로움 속에서 깊이 있는 사고를 하게 되었다. 또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리서치와 글쓰기 능력을 키웠다. 이는 그가 정치인으로서 필요로 하는 분석력과 표현력을 강화시켰다.

 

시카고에서의 활동은 오바마에게 실질적인 정치 경험을 제공했다. 그는 저소득층 지역 주민들과 협력하며 커뮤니티 조직화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문제 해결에 나서는 실천적 리더십을 배웠다. 특히, 교회와의 협력을 통해 종교가 사회적 문제 해결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정치적 신념과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바마는 시카고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법을 배웠다. 이는 그가 정치인으로서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해롤드 워싱턴 시장과 같은 흑인 지도자들의 역할을 보면서, 자신도 그와 같은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다지게 되었다.

 

개인적 경험, 특히 아버지의 사망과 배다른 동생과의 교류는 오바마에게 깊은 감정적 자극을 주었다. 이는 그가 정치 활동을 하는 데 있어 인간적인 면모를 더하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능력을 키웠다. 이러한 경험들은 오바마의 정치적 비전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케냐의 아버지 버락 오바마 시니어가 사망한 후에도 버락 오바마 주니어는 배다른 동생인 아우마와 계속 연락을 하고 지냈다. 아우마는 독일 유학생이었다. 아우마는 버락을 만나고자 시카고를 방문했다. 아우마는 버락과의 만남에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아버지는 케냐에서 꽤 명망높은 경제학자였는데 당시 케냐의 대통령이었던 조모 케냐타에 직언을 했다가 쫓겨났다고 했다. 이후 그에게 직장을 주지 말라는 대통령의 명령으로 인해 아버지 오바마는 무숙자가 됐다. 이후 다시 직장을 얻게 됐지만 아버지 오바마는 이미 알콜중독자가 되어 있었고 음주운전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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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기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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