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 시절 마이클 조던이 에어 조던 신발을 들고 촬영하고 있다. 사진 - 나이키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불리는 마이클 조던은 1984년 노스캐롤라이나대 3학년을 마치고 NBA 드래프트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4학년을 건너뛰고 프로 전향을 계획한 것이다. 2년 연속 올해의 대학 농구 선수로 뽑혔기에 그가 상위 지명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센터가 중시되는 분위기에서 조던은 전체 1번으로 지명되지는 못했다. 전체 1번 지명은 휴스턴대 출신의 아킴 올라주원(휴스턴 로키츠가 지명)의 차지였다. 센터를 더 중요시하는 분위기에서 역대 최고의 센터 중 한 명인 올라주원이 1번으로 지명되는 것은 그나마 이해가 됐다.
그러나 샘 부위가 전체 2번으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 지명된 것은 후에 논란거리였다. 블레이저스는 역대 최악의 지명을 한 팀으로 기록됐다. 사실 블레이저스가 조던을 지명하지 않은 일은 1984년 여름까지만 해도 비난거리가 아니었다. 심지어 시카고 불스의 고위관계자도 센터 두 명이 1, 2번으로 지명돼 어쩔 수 없이 조던을 지명한 것처럼 말을 했을 정도였다.
드래프트 다음 날 시카고 지역 최대 신문인 시카고 트리뷴지는 다음과 같은 칼럼을 게재했다. 버니 린시콤이라는 칼럼니스트는 '미안해하는(또는변명하는) 불스는 조던에게 껴버렸다(Stuck)'라는 제목으로 '아쉬움을 표명했다.' 이 신문은 시카고 불스는 유감을 표명했고 팬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구단 측은 센터를 영입하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고 조던을 지명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로드 쏜(Rod Thorn) 불스 단장은 "우리는 그가 7피트의 장신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훨씬 작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농구를 다루는 기사 중 최악의 기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반면 샘 부위를 지명한 블레이저스의 본거지인 오리건주의 신문은 어떻게 기사를 썼을까.
코밸리스 가제트 타임스는 1984년 6월 20일 자 기사에서 블레이저스 프런트 오피스는 마이클 조던 대신 부위를 선택한 것에 대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고 부위는 잠재력은 엄청나다는 스투 인맨 단장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후 조던의 맹활약에 블레이저스 팬들과 구단은 얼마나 땅을 쳤을까.
블레이저스 구단 관계자들은 바보 취급을 받았다. 부위가 NBA에서 평범한 센터임이 입증돼 비난은 더욱 거셌다.
부위는 신인 시즌에 10득점, 두 번째 시즌에 11.8득점을 기록했는데 그나마 두 번째 시즌에는 절반을 부상으로 결장했고 세 번째, 네 번째 시즌에는 거의 뛰지 못하고 그는 결국 뉴저지 네츠로 트레이드됐다. 그는 개인 통산 평균 10.9득점, 7.5리바운드를 기록하고 1995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반면 조던은 신인 시즌부터 두 번째 은퇴했던 1997-98시즌까지 부상과 은퇴로 뛰지 못했던 시즌을 제외하면 매년 리그 최다득점 1위를 차지했다. 평균 득점에서도 거의 매년 1위에 올랐다. 그는 신인 시즌에 NBA 올스타로 선정됐고 경기 평균 28.2득점, 5.9어시스트, 6.5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이후의 기록은 너무나 잘 알려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불스가 ‘어쩔 수 없이’ 지명한 조던은 구단뿐만 아니라 NBA 전체 그리고 농구 자체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주역이었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조던은 대회가 끝난 몇 주 후 불스 캠프에 합류했다. 불스는 당시 약팀이었다. 3년 동안 플레이오프 구경도 해보지 못한 팀이었다. 1983-84시즌까지 불스가 9년 동안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횟수는 2회에 불과했다. 조던은 “불스는 이제 매년 플레이오프에 나가게 될 것”이라는 공약했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첫날부터 그는 리그 최고의 선수임을 보여줬다.
로드 쏜 단장은 어쩔 수 없이 조던을 드래프트했다고 했지만 8개월도 안 돼 조던이 리그 최고의 선수가 되었음을 인정했다. 그는 1985년 2월17일자 시카고 트리뷴지 일본계 미국인 밥 사카모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인 마이클 조던이 있고 그는 이제 21세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선수를 보유한 팀은 한두 팀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중심으로 리그 최고의 팀을 만들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무도 마이클 조던이 이렇게 잘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이렇게 빨리 잘할 것으로 보지 않았다. 조던은 시즌 첫날부터 엄청난 선수였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불스는 조던 덕분에 1985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됐다. 신인 시즌에 올스타전 주전 선수로 뽑힌 그는 정규 시즌에 28.2득점을 기록, 신인상까지 받았다. 조던은 불스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 선봉장이었다. 대학 시절에는 딘 스미스 감독의 ‘펀더멘털 농구’에 순응하다 보니 화려함을 제대로 선보이지 못했던 조던은 불스에서 ‘화려한 농구’의 꽃을 피웠다.
조던의 화려한 농구는 시카고 팬들을 경기장으로 이끌었다. 조던이 불스 유니폼을 입기 이전보다 불스는 관중동원 면에서 87%의 성장을 이룩했다. 그는 신인 시절부터 원정 팬들을 몰고 다녔다. 원정 팬들은 홈팀 선수가 조던에게 파울을 하면 야유를 보낼 정도로 그를 좋아했다. 특히 조던이 덩크를 하려고 할 때 파울을 하면 그 선수는 비난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그가 인기를 끌자 나이키는 서둘러 조던과 계약을 맺고 에어 조던 신발을 판매했고 이는 나이키가 세계적인 기업이 되는 데 결정적인 계약이 되었다.
조던 덕분에 플레이오프(PO)에 진출한 불스는 그러나 PO 1라운드에서 밀워키 벅스에 1승3패로 무릎을 꿇고 탈락했다. 벅스는 한 명이 아닌 두 명, 세 명의 수비수를 조던에게 붙여 그의 움직임을 최대한 제한하려고 했지만, 그는 이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29.3득점, 8.5어시스트, 6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리고 매 경기 약 3개의 스틸을 했다. 애틀랜타의 단장인 스탠 캐스튼은 "조던이 할 수 없는 것은 없는 것 같다. 농구코트에서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극찬했다.
NBA, 그리고 농구팬들이 조던을 발견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NBA의 미래는 밝아 보였다.
조던이 1985년 5월 신인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사카모토 기자는 "드래프트 전체 1번 지명 선수인 아킴 올라주원이 아닌 조던이 신인상을 받았다. 조던은 신인상 투표기자단 78명 중 57 1/2표를 받아 20 1/2표의 올라주원을 크게 앞섰다. 조던은 "나 자신도 이 상을 받게 되리라 생각 못했다. 최고의 시즌을 보낸 것 같다"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케빈 라우어리 불스 감독도 만족감을 표명했다. 그는 사카모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조던은 82경기 전 경기를 뛰었다. 나는 그의 농구에 대한 사랑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마이클은 뛰는 것 자체를 즐긴다."라고 말했다. 이 기자는 또한 "마이클 조던은 원정경기를 갈 때마다 큰 인기를 끌었고 늘 기립박수를 받았다"며 리그에서 그에 대한 칭송이 자자함을 전했다. 특히 LA 레이커스의 팻 라일리 감독은 "조던은 그의 팀뿐만 아니라 리그 전체에도 놀라운 영향을 끼쳤다"라고 말했음을 이 신문은 전했다.
조던은 그뿐만 아니라 스포츠 마케팅하는 기업들의 타깃이 됐다. 루키 시즌에 그는 이미 최고의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1985-86시즌이 시작했다. 그의 두 번째 시즌이었다. 불스 팬들은 전년보다 더 좋은 성적을 기대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조던이 시즌 세 번째 경기에 다리 부상을 당했던 것이다. 그는 4주 동안 결장했다. 4주 후에 돌아올 것으로 보였던 조던은 그러나 64경기를 결장한 후에 복귀할 수 있었다. 부상 정도가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했던 것이다.
팀 닥터는 될 수 있으면 복귀하지 않는 게 낫고 만약 그가 뛰어야 한다면 출전 시간을 전반 7분, 후반 7분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던의 고집으로 복귀가 성사됐다. 조던은 조금씩 더 출전 시간을 얻었고 시즌 막판에는 이전처럼 많은 출전 시간을 할당받았다.
조던이 빠진 사이 불스의 팀 성적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행운이 찾아왔다. 30승 52패라는 형편없는 성적으로 불스는 플레이오프 턱걸이 진출에 성공했다. 조던의 플레이오프 진출 약속은 이렇게 깨지지 않았다.
하지만 PO 1라운드 상대는 당시 최강이었던 래리 버드의 보스턴 셀틱스였다. 조던은 1차전에서 63득점을 기록하는 맹활약을 펼쳤지만 래리 버드의 셀틱스를 넘어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을 했지만 불스는 2년 연속 1라운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셀틱스와의 1차전에서 49득점을 기록해 셀틱스 홈인 보스턴 가든에서 뛴 가장 많은 득점을 올린 선수가 됐던 조던은 1986년 4월 20일 2차전에서는 63득점을 올려 자신이 경신한 기록을 갈아치웠다. 래리 버드는 "우리를 상대로 그 어떤 선수도 그렇게 점수를 넣을 것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라고 경기 직후 말했다. 버드는 "그는 경기의 좋은 흐름 속에서 득점을 올리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에겐 두려움이 생긴다"라고 덧붙였다. NBA 2년차에 그는 래리 버드와 같은 선수에게도 두려운 그런 선수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