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by Shutterstock
KBS ‘9층 시사국’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챗GPT가 불러올 사회적 영향에 관해 다룬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필자가 주목한 장면은 실제로 챗GPT를 활용하도록 허용한 수업 장면이었다. 처음과 달리 부작용에 관해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 과감하게 학생들에게 활용하게 한 강의자의 결단도 대단했지만, 그 주목의 중심은 그 교육적 결과였다.
먼저 강의자는 학생들에게 특정 주제를 주고 논술 문제를 냈다. 그리고 다음 과정에서는 챗GPT를 활용해서 논술 답안을 쓰도록 했다. 챗GPT를 활용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어떻게 결과가 달라지는지 살펴보기 위한 간단한 실험이었다. 답안지를 전후 비교했을 때 정말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학생이 나왔다. 이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챗GPT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생각할 수 있는 사례였다. 이전 답안보다 더 좋게 답안을 쓰게 된 학생은 챗GPT를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전 답안도 훌륭하게 이미 쓴 학생들이다. 이 학생들은 반응이 어떠했을까. 챗GPT가 오히려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정작 좋은 답안을 만드는 데 실패한 것이다.
이것은 무슨 함의일까? 챗GPT가 필요 없이 훌륭한 답안을 쓴 이들에게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필요가 없었던 셈이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챗GPT가 답안의 수준을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챗GPT가 낳을 수 있는 교육적 효과를 생각하여 교육 목표와 활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점은 미래의 알파 세대에게는 더욱 중요할 수 있다.
만약 챗GPT에 의존만 한다면 훌륭한 학생의 성장을 가로막을 수 있는 셈이 된다. 우리는 흔히 천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지향하는 교육적 목표는 매우 훌륭한 소수의 인재 육성에 초점을 맞추는 셈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에 의존하는 학생이 훌륭한 인재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인 것이다.
초기에 챗GPT가 필요할 수 있다. 학습 수준이 낮고 어릴수록 챗GPT가 큰 영향을 미치겠지만, 어느 정도 수준을 넘어가게 되면 효과가 떨어지게 된다. 이후에는 생성형 인공지능을 능가하여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훌륭한 인재는 배출할 수 없게 된다.
교육관점에서 생성형 아이돌에 관해 가장 우려하는 것은 표절이나 부정행위일 수 있다. 이러한 면은 분명 발생할 수 있고 막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표절이나 부정행위를 하는 학생이 우수한 학생은 아닐 것이다. 당연히 그 반대일 가능성이 크다. 우수하지 않은데 우수한 척하기 위해 챗GPT를 활용하려는 이들을 차단해야 한다. 이는 공정하지 않으면 다른 선의의 실력자 학생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육기관이나 교육자의 역할에서 이런 표절이나 부정행위를 막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아예 표절이나 부정행위에 따른 결과물이 평가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지금도 이를 시도하는 곳은 있다. 문제를 냈을 때, 표절이나 부정행위를 통해 산출할 수 없게 해야 한다. 만약 제출 결과물을 비교했을 때, 비슷한 점이 발견되면 좋은 성적을 받을 수는 없다. 누구나 챗GPT를 활용할 수 있으므로 비슷한 질문에 답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질문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챗GPT를 대할 때 결과의 수준을 예상할 수 있는 명제가 되었다. 만약 그렇게까지 해서 남들보다 우월하고 차별화된 답을 얻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한 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축적이 된다면 그것도 또한 능력이 되는 시대가 될 것이다. 즉 질문을 잘 던지는 것도 능력이 된다. 나아가 기획을 어떻게 잘할 수 있는지 다른 능력을 배가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교육의 목표와 평가 기준이 달라져야 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하면 공교육에서 말하는 우수한 학생이 더 이상 생성형 인공지능 시대에는 능력 있는 인재가 되지 못하게 된다. 천재적인 인재냐, 창조적인 인재냐. 현실은 이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있기에 이대로는 생성형 지능 시대의 미래에 혼동이 반복될 수 있다. 천재를 더 우월하게 보고 그들을 기대하고 키워내려 하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사람보다 천재가 더 우리를 먹여 살릴까?
사실 사업이나 경제 관점에서 우리에게는 천재보다는 창조적인 사람이 중요하다. 하버드 대학의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ner)는 ‘비범성의 발견’(extraordinary minds)이라는 책에서 이런 부분을 강조했다. 천재와 창조적인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에게는 천재적인 사람이 필요할까. 창조적인 사람이 필요할까?
일단 결과물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으니 결과물 관점에서 가 차이점을 비교해 보자. 일단 천재의 작업 결과물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워낙 뛰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조적인 사람의 결과물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과연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것은 많은 사람이 공감했기 때문에 창조적이다.
스티브 잡스가 내놓은 여러 제품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천재의 산물이 아니라 창조적인 행위의 산물이다. 물론 챗GPT가 그런 창조적인 결과물을 미래에 내놓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미 스티브 잡스 제품은 과거형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챗GPT가 천재적인 결과물을 내놓는다면 사람들이 이해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창조적인 결과물을 내놓는다면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챗GPT에서 어떤 결과를 얻을지 부터 정해야 한다. 그것조차 정하지 못할 때 미래의 알파 세대조차 혹여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