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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중(意中)’
사전을 찾아보면, ‘마음의 속’이라고 풀이한다. 자연스럽게 표현하면, 속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음이라고 다 같은 마음은 아니라는 거다. 이렇게 보면 된다. 사람은 본래의 자아가 있고 역할의 자아가 있다. 본래의 자아는 본성에 충실한 자아다. 하고 싶고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자아라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이 보통 이렇다. 그래서 순수하다고 표현한다. 다른 의도 그러니까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역할의 자아는 뭘까? 자기가 처한 역할에 따라 본성은 접어두고 역할에 맞는 자아를 발현하는 거다. 평소에는 내성적이고 말을 많이 하는 성향이 아닌 사람이, 회사에서는 외향적이면서 말도 많이 하는 사람이 되는 게 그렇다.
학창 시절의 필자도 그랬다.
집에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꼭 필요한 말만 했다. 말이라고 하기보다는 인사라고 하는 게 더 맞겠다. 학교 다녀오겠다는 인사와 다녀왔다는 인사, 그리고 밥 달라는 말과 안녕히 주무시라는 말이 거의 전부였다. 의도가 있거나 불만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돌이켜 보면,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말을 잘 하지 않는 성향인 것은 맞았다. 꼭 해야 하는 말을 하지 않아서, 어른들한테 한 소리를 들은 것도 여러 번이다. “아니, 왜 말을 안 해? 참 희한하네!”라고 말이다. 지금 필자를 아는 사람이 들으면, “정말?”이라고 할 거다.
아내도 이런 필자를 보고 놀랐다고 했다.
결혼하고 7년 정도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는데, 평소에는 매우 활발하고 말도 많이 하던 사람이 집에서는 말이 거의 없다는 것에 놀랐단다. 의식하고 그런 게 아니라 그런지, 이 말을 듣기 전까지는 내가 그랬는지 몰랐다. 결혼하기 전에는 그랬는지 몰라도, 결혼하고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집에서는 본래의 자아로 살지만, 밖에 나가면 역할의 자아로 자연스레 바뀌나 보다. 이때부터는 조금씩 의식하기 시작했다. 집에서도 역할의 자아를 조금씩 끄집어냈다는 말이다. 집이고 가족이라 편하다는 생각에 의식하지 않았는데, 편한 관계이더라도 역할의 자아를 불러일으켜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배려하고 하겠다.
속마음은, 본성의 자아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말이나 행동은 역할의 자아다. 이 두 자아가 일치할 때가,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이다. 그래서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는 거다.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생각한다는 건, 사람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목적에 따라 달라질 때가 더 많다. 목적이 있는 만남과 그렇지 않은 만남을 떠올려보면 된다. 편안한 사람이라도 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얻어내야 한다거나, 불편한 무언가를 밝혀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떤가? 평소와 다르게 편하지 않다.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대화 중에 가끔 이렇게 말할 때가 있다. 이는, 속마음을 몰랐다가 알았을 때 나오는 반응이다. 속마음을 몰랐을 때는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속마음을 알았을 때는, 왜 그랬는지 명확하게 이해가 된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와 함께, 이렇게 표현하는 거다. “그럼, 미리 말을 하지 좀 그랬어!”라고 말하는 건, 속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드러내는 거다. 평소에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속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는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냥 말을 좀 해주지!” 그래서 속마음을 드러내는 사람이 불편할 때도 있지만,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속마음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속마음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경청하면 가능하다. 경청은 귀로 듣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경청의 세부적인 의미는, 들을 청(聽)의 한자 풀이로 설명할 수 있다. 한자를 하나씩 뜯어보면, 귀 이(耳), 임금 왕(王), 열 십(十), 눈 목(目), 한 일(一), 마음 심(心)이다. 이 한자를 연결해서 설명하면 이렇다. “임금의 말을 듣듯이 열 개의 눈으로 보고 하나의 마음으로 듣는다.” 한자를 전공하신 분의 말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왕’은 실제 ‘왕’ 자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한자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니, 이렇게 설명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본다.
경청의 의미가 참으로 놀랍다.
이렇게까지 들으면 사람의 속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가장 중요하거나 어려운 사람이 하는 말을 듣듯이 하니 말이다. 열 개의 눈이라고 하는 건, 육감을 동원하는 것을 넘어선다. 가장 중요한 건 마지막의 의미다. 하나의 마음이다. 내 마음과 네 마음이 다른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마음과 하나 되고자 하는 마음. 즉 공감하는 마음으로 듣는다면 이해하지 못할 게 있을까?
모든 소통의 처음과 끝은 경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확하게 알아차렸으니 정확하게 이해할 것이고,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가?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가? 그렇다면 경청을 연습해야 한다. 경청을 연습하는 건, 소통을 연습하는 것과 같다. 경청만 잘해도 소통하는 데 지장이 없다. 말하는 사람으로부터, 잘 들어준다는 느낌만 전달해도 성공한 소통이다. 자기가 혼자 고민 이야기를 하고서, 덕분에 잘 해결됐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니 경청을 연습해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