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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은 정말 모를 일이다.
이 말을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사자성어가 ‘새옹지마’이다. 하나의 사건만 봤을 땐 안 좋은 일이나, 그 사건이 좋은 일을 불러온다. 기르던 말이 국경을 넘어간 건 안 좋은 일이나, 다른 말을 데리고 돌아온 건 좋은 일이다. 반대의 상황도 있다. 정말 안 좋은 사건인데, 그 사건으로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던 위기를 벗어난다. 말을 타던 아들이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건, 안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전쟁터에 끌려가는 일을 면했다. 그러니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한다. 사자성어에 나오는 노인은 이렇듯, 기쁜 일이 생기거나 슬픈 일이 생겨도 내색하지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마는, 꼭 필요한 부분이라 여겨진다.
일희일비할 때가 많다.
작은 일에 기뻐하고 또 소소한 일에 절망한다. 작은 일에 기뻐하는 건 감사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니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소한 일에 절망하는 건 매우 좋지 않다. 부정적인 감정은, 빠르게 그리고 크게 퍼지기 때문이다. 어디에? 마음에 퍼진다. 관련된 연구 결과도 있다. 좋은 소문과 나쁜 소문이 퍼지는 속도와 파장이다. 이는 굳이 연구 결과를 들먹이지 않아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뉴스도 그렇지 않은가? 나쁜 소식은 삽시간에 퍼지지만, 훈훈한 소식은 있는지도 모를 때가 많다. 뉴스를 공유한 횟수를 봐도 그렇다. 부정적인 뉴스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처럼,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부정적 감정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안일한 마음이 아니라, 면밀하게 따질 수 있는 행동은 부정적 감정에서 나온다. 부정적 감정을 긍정적인 측면으로 평가할 때는, ‘부정적’이라는 표현이 좀 그러니 여기서는, ‘예민함’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예민함 덕분이라고 말한다. 야생에서 생활하려면 온갖 위험에 예민해야 할 테니, 그럴 만도 하다. 따라서 무엇이든 극단적으로, ‘옳다’ 혹은 ‘그르다’로 가르는 건 좋지 않고, 위험하다. 적절함이 필요하다. 중요한 건, 부정적 감정에 너무 깊숙이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거다. 몸과 마음을 해치기 때문이다.
왜, 부정적인 감정에 깊이 빠져들게 될까?
연구를 통한 과학적 근거가 어딘가에 있겠지만,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보면 이렇다. 꼬리에 꼬리를 물기 때문이 아닐까? 부정적 감정 하나가 떠오르면, 그에 따르는 상황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상황으로 벌어질 수 있는, 다른 부정적 감정을 불러온다.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며 들어가는 생각으로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 깊이 빠져들지 않는 방법은, 그 고리를 끊는 거다. 그래서 어떤 심리학자는 말한다. 부정적 감정이 들면 나 자신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제삼의 인물로 설정해서 쫓아내라고 말이다. “지금 당장 나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인 감정으로 전환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한동안 많은 사람이 이 문장으로 마음을 전환했다. 많이 인용하는 걸 보면 그렇다. 지금도 누군가에게는, 매일 되새기는 문장일지도 모르겠다. 필자 또한 가끔 이 문장을 읊조리면서, 어서 지나가기를 바란다. 부정적인 감정을 잘 활용하는 것은 좋지만, 빠져있어서 좋은 점은 없다. 자신에게도 좋지 않고 타인에게도 좋지 않다.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으로 전환하는 방법은, 잊으려 노력하는 게 아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계속 넣는 거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그러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의지를 불러일으켜서라도 그리고 억지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첫발을 떼기가 어렵지, 한 발을 떼면 관성이 생긴다. 부정적 마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관성이 생기듯, 긍정의 마음도 관성이 생긴다. 이는, 감사의 관성으로 연결되고 행복의 관성으로 이어진다. 어떤 관성으로 이끌리기를 바라는가? 바라는 대로 하면 된다. 첫발만 떼면 된다. 매일 그렇게 하면 된다. 오늘도, 긍정의 관성 감사의 관성 행복의 관성에 마음을 맡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