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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뭐래?”
한 번쯤은 들어봤거나, 해 본 말이다. 언제 이런 질문을 할까? 누군가 나에게 의견을 물어볼 때다. 습관적으로 나온다. 정말 다른 사람에 의견이 궁금해서 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내 생각보다 다른 사람은 어떤 의견을 냈는지 궁금해서 묻는다. 이건 의견이 궁금하다는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다른 사람은 어떤 의견을 냈는지 알고 싶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묻는 것과 내 선택에 기준으로 삼으려고 묻는 것은 다르다는 말이다. 여러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할 때,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방식에 길들어서 인지도 모르겠지만, 내 의견이 무엇인지 살피는 것보다 많은 사람의 의견에 따라가는 것을 편하게 생각한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말과 행동을 하는 데 있어,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자연스레 의식하게 된다. 누구나, 좋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이 잘못됐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하는 것을 ‘배려’라고 착각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하는 말과 행동이, 배려는 아니다. 정작 당사자는 배려 받고 있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다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라고 하지만, 내 생각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다는 마음이, 떠나질 않는다. 의아하긴 하다. 상대방을 생각해서 하는 말과 행동인데, 왜 당사자는 배려라고 느끼지 않는 걸까?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타인이 원할 것 같은 말과 행동을 하면, 그 사람이 다 좋아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다음 질문에서 구분할 수 있다. 정말 그 사람을 생각해서 한 말과 행동이었나? 정작 자신의 편리를 위해서인데, 타인을 위한 다고 포장한 것은 아닌가? 자기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끼워 맞추려는 수작은 아니었나? 사람이 사람에게 전해주는 것은, 귀로 전하는 말이나 눈으로 비치는 행동이 아니다. 그럼 뭘까?
느낌이다. 느낌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거다.
너무도 좋은 말인데, 마음으로 스며들지 않은 적이 있지 않나? 귀에 거슬리는 말인데, 마음으로 깊숙이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던 적이 있지 않나?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오프라 윈프리 등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여성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마야 안젤루’가 한 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과 당신이 한 행동은 잊지만, 당신이 그들에게 어떻게 느끼게 했는가는 잊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일관성이다.
헷갈리게 하면 안 된다. 내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주변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럴 때는 이러고 저럴 때는 저러면 곤란하다. 따라서 생각의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 그러는 데 필요한 것이, 자기를 살피는 시간을 꾸준히 갖는 거다. 아무리 좋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라도 일관성이 없으면, 신뢰가 떨어진다. 가끔 서프라이즈 같은 느낌을 주면 신선하기는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은 불안하고 불편하다. 어쩌면 타인으로부터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가장 큰 배려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