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by Shutterstock
“가위, 바위, 보”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을 놀이 중 하나다. 승부를 가려야 할 때 혹은 어떤 선택을 할 때, 우리는 가위바위보를 한다. 누구도 이견을 내지 않는 건, 공평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기고 지는 게 명확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세상에서는 특허를 냈어도 될 만큼, 짧은 시간에 큰 결정(?)을 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임은 틀림없다.
가위, 바위, 보는 매우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다. 어느 누가 매우 유리한 것도 없고, 반대로 매우 불리한 것도 없다. 정말 공평하다. 그리고 그 이유도 명확하다. 가위는 말 그대로 가위를 상징하고, 바위도 마찬가지로 바위를 상징한다. 보는 보자기를 나타낸다. 가위는 보자기를 자를 수 있으니 보를 이긴다. 하지만 바위는 자르지 못한다. 자르려다 날만 다 상한다. 그래서 가위는 바위에게 진다. 이렇게 강력한 바위를 이기는 건 보자기다. 좀 의아했다. ‘왜? 바위로 보자기를 내려치면 보자기가 망가지지 않나?’ 하지만 보자기가 바위를 이기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위를 감싸기 때문이다.
‘감싸기 때문에 이긴다?’
좀 억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감싼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봤다. 사람 관계에서 감싸주는 사람은, 거의 가 손해를 본다. 잘못을 감싸주고 이기적인 마음을 감싸주고 상처 준, 말과 행동을 감싸준다. 그리니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답답할 정도로 너무 감싸는 사람을 보면, 주변 사람이 오히려 더 흥분한다. 손해를 덜 봤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제는 좀 자기도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았으면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 속상하다. 주로 어머니를 보는 시선이 그렇다. 드라마를 보면 그렇다. 자기 이득만을 챙기려는 악독한 자식들을 끝까지 감싸는 모습을 보면서, 형제자매들은 자기 가슴을 때리며 답답한 마음을 표현한다.
감싸는 마음이 정말 이기는 게 맞을까?
사실 아직 마음으로 깊이 공감하진 못한다. 감싸면 손해를 본다는 건 명확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는 게 이기는 거라지만, 사실 지면 마음이 좋진 않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니, 그러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보자기도 그랬을까? 바위를 감싸면서 거칠한 부분에 닿은 면은 상처가 나고 구멍이 나기도 했을 텐데, 보자기는 괜찮았을까?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바위를 감싸고 있다면, 그래도 그걸 이겼다고 봐야 할까? 누가 봐도 완벽한 손해인데도 말이다.
사실 감싸서 이긴 게 아니다. 감쌀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이미 이겼다고 봐야 한다.
감쌀 수 있다는 건, 이미 마음이 더 큰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은 사람은 절대 감쌀 수 없다. 그러니 누가 이겼니 졌니 따질 필요도 없다. 고등학생하고 초등학생하고 싸운다고 하면, 그게 의미가 있을까? 고등학생이 졌다고 하자. 봐줬다고 생각하지,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있을까? 큰 사람에게는 이기고 지는 게 의미가 없다. 그러니 감싸는 건 결과가 아니라, 시작에서 이미 결판이 난다고 봐야 한다.
이기고 싶은가? 그럼 감싸면 된다. 마음이 큰 사람이 되면 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