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4년 5월1일 작성된 칼럼으로 오늘(2024년 7월22일) 김민기 선생님의 소천을 애도하며 다시 게재합니다.
Obituary는 부음, 사망기사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데 원뜻은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소식을 알리면서 동시에 그의 일대기를 소개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부음, 사망기사보다는 '오비추어리'가 더 나은 것으로 판단해 이렇게 제목을 붙였다.
Generated on DALL·E. 한 사람이 서러움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런 희망의 나라가 되기를 기도한다.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이슬’의 가사 중에서)
‘아침이슬’은 한 시대를 풍미하는 음악이었다. 지금도 음악 프로를 틀면 가끔 들을 수 있는 20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하는 명곡이다.
‘아침이슬’을 작사·작곡한 김민기는 불운한 음악가다. 그는 자신을 불운한 사람으로 부른다. 70, 80년대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군부 독재와 맞서 싸울 때 가장 애창했던 곡이 ‘아침이슬’이었다. 이 곡은 정부가 1973년 건전가요로 지정했지만, 운동권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2년 후 금지곡으로 신분을 바꿔버렸다.
겉으로 낸 금지의 사유는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른다'는 가사가 ‘불순하다’는 것이었다. 북한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자신은 전혀 운동권이 아니었다고 말한 김민기는 자신의 음악이 운동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이유로 박정희 정권 때, 전두환 정권 때 온갖 핍박을 받았다. 자신이 늘 일기장에 쓴 것처럼 김민기는 “불운한” 천재 음악가였다.
서슬이 퍼런 군정부에 찍혔으니 그의 인생은 지옥과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그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수’밖에 없는 삶의 연속이었다. 군 제대 후 대학(서울대 미대)을 미대학장 김세중 교수의 도움으로 간신히 졸업했지만, 그가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막노동이나 공장 취업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던 그는 공장 노동자들이 힘겹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공장의 불빛’이라는 노래극을 몰래 녹음해 테이프로 비밀리에 대중 속으로 퍼뜨렸다.
전에는 아니었지만 그제야 진짜 운동권이 되었던 것. 이 일로 그는 도시에서 사는 것 자체가 어렵게 되었고 이후 농부와 광부로서 시골에서 살게 되었다. 시골살이도 쉽지는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경찰에 보고 해야 했다.
군부독재가 종식된 후 그는 시골을 떠나 다시 도시로 오게 되었고 대학로에서 ‘학전’이라는 소극장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음악 콘서트, 뮤지컬, 연극 등이 열렸다. 학전 출신 스타 배우는 김윤석, 황정민, 설경구, 조승우, 장현성 등으로 그들은 이곳에서 큰 배우로 성장할 수 있는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이정은, 배성우, 배해선, 김희원, 안내상, 김원해, 방은진, 나윤선 등이 그 뒤를 잇는 명배우가 됐다. 김광석이 학전에서 1000회 공연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 그리고 유재하도 학전 출신이다.
엄청난 스타들이 거쳐 갔지만 학전은 늘 경영난에 있었다. 버는 돈을 마치 지분처럼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다 나눠주다 보니 극장 주인은 가져가는 돈이 별로 없었다. 1991년 개관한 학전은 2024년 3월 14일, 재정난 및 김민기의 건강 악화로 33년 만에 폐업했다.
그렇게 마음에 설움이 알알이 맺힌 인생을 그는 살았다. 국가 지도자를 잘못 만난 자의 운명이었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갈 줄 알았으면서도 ‘공장의 불빛’ 노래극을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녹음하게 해줬던 명가수 송창식은 "처음부터 천부적인 재질이 있었다”고 김민기를 극찬했다. 그가 1970년대에 작사, 작곡을 했던 1집 앨범을 들어보면 지금도 감성적으로 공감이 될 정도로 그는 놀라운 음악을 만들었다.
김민기와 학전의 이야기를 담은 SBS 스페셜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는 2024년 4월 21일, 28일 2주간 SBS를 통해 방영되었다. 이번 주 마지막 3회가 방영된다.
김민기 씨의 다큐멘터리를 보던 필자는 채수근 해병, 그리고 이태원 좁은 골목길에서 생을 마감한 젊은 친구들을 떠올렸다. 김민기 씨는 불운하고 불행한 인생을 살았어도 인생의 후반전에는 그래도 하고 싶은 예술을 하면서 살 수 있었지만, 모친이 무려 열 번의 시험관 시술 끝에 37세의 나이로 얻게 된 귀한 늦둥이 외아들 채수근 해병은 2023년 7월 19일 수해 복구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급류에 휩쓸려 20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아직 법적인 판단을 받은 상태는 아니지만, 정황으로 보면 사단장의 무리한 복구 작업 지시와 구명조끼를 입지 못한 것이 사망의 주된 원인이었다는 증언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수사단장이었던 박정훈 대령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작은 일’에 그렇게 사단장이 해임되면 안 된다며 사퇴를 번복하게 했고, 이 사건과 연루된 사람들을 줄줄이 승진시키거나 국회의원, 호주 대사 등으로 영전시키며 채 해병과 그의 가족 그리고 군대에서 의무복무를 했고 해야 하는 청년, 청년들 부모들의 마음에 설움이 알알이 맺히게 했다.
채 해병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정부 상태’를 느끼게 했고 분노를 품게 했다.
그리고 이태원의 좁은 골목길에서 압사로 세상을 떠난 수많은 젊은이와 그 부모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 대형 사고로인해 인생이 불운한 정도가 아니라 ‘지옥 같은’ 삶을 경험했다. 그런 부모들에게 정부 관료들은 ‘재정적인 보상’을 잘 해주면 될 것처럼 말해 더욱 분노를 자아냈다.
나는 언젠가 지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제가 하나 예언 비슷한 것 하나 할게요. 이렇게 많은 사람의 마음을 찢어지게 만들고 지옥처럼 만든 국가 지도자는 그 끝이 반드시 좋지 않습니다.”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을 군화로 짓밟은 전두환은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사과 없이 온 세상의 욕을 다 들으며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일일이 거론하지 않아도 마음을 찢어지게 한 지도자들의 최후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이라도 대국민 사과를 하고 채상병 특검법을 통과시키고 개헌하고 떠나면 이전 지도자들보다는 덜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는 과연 그럴 용기가 있을까.
그가 용기를 내어준다면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라고 외치는 국민이 많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