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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저자 강연을 할 때다. 일주일 사이, 세 번의 강연을 했던 적이 있었다.
자리를 마련해 주신 분들의 배려와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강연을 준비하면서 깨닫게 된 게 있었다. 같은 내용이라도 다시 보면,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책이나 영화도 그렇지 않은가? 같은 내용인데 볼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문장이나 장면을 발견한다. 처음에는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책과 영화의 내용은 그대로지만, 읽고 바라보는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열 권의 책을 읽기보다, 한 권의 책을 열 번 읽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일정 부분 공감한다.
깨달음은 일상을 다르게 바라보면서 오기도 한다.
평소처럼 한 행동인데 머릿속에 머무르고 있는 생각과 버무려지면서, 다른 각도로 생각하게 되고, 그 생각이 새로운 깨달음을 불러오는 거다. 강연을 준비하면서 필자가 새롭게 깨달은 것도 그렇다. 평소에도 했던 경험이지만, <딸에겐 아빠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책을 출간하고 강연을 준비하면서, 머리에 똬리를 트고 있던 생각이 일상경험과 버무려지면서 새로운 깨달음으로 다가온 거다.
‘평등’과 ‘공평’이 그랬다. 비슷한 말 같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매우 다르다.
과정은 같지만,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건 평등이다. 과정은 다르지만, 결과가 같아질 수 있는 건 공평이다. 이것을 깨달았다. 아주 사소한 경험을 통해서 말이다. ‘화이트데이’ 때의 일이다. 세 딸아이에게 줄 초콜릿을 사기 위해 편의점에 들어갔다. 아! 당연히 아내 건 다르게 준비했다. 초콜릿 앞에서 잠시 고민을 했다. 첫째는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는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데….’
고민이 됐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고급 초콜릿이라, 이건 먹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는, 첫째만 다른 걸 사가면 둘째와 셋째가 혹시 샘을 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같은 것을 집어 들었다. 평등을 선택한 거다. 집에 가서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주는데, 역시 첫째의 반응이 미지근했다. “나 초콜릿 안 먹는 거 아시면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좋기는 하지만 이왕이면 먹을 수 있는 거면 더 좋았겠다고 했다.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는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다.
평등했지만 공평하지 않은 결과가 나타났다.
첫째는 먹지 못했으니 말이다. 어쩌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경험으로, 부모는 ‘평등’과 ‘공평’ 사이를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정답이라고 말할 순 없다. 어떤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결과를 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 고민하지 않는다는 건 더 자세히 살피지 않는다는 의미이니, 어쩌면 고민하는 시간이 더 가까워지는 시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부모는 어렵다. 부모로서 평등하게 한다고 하지만, 아이들의 상황이나 느낌에 따라 불공평하게 느낄 때가 있다.
어떤 때는 부모가 평등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는데, 아이들은 공평하다며 좋아할 때도 있다. 정말 알기가 어렵다. 다만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