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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에 관한 이야기를 최근에 많이 하게 된다.
본질은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성질로, 아무리 상황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아니 바뀌어서는 안 되는 속성을 말한다. 본질이 바뀐다는 건, 곧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 되기도 한다. 본질이 곧 그것의 가치가 된다는 말도 된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 있다고 하자. 거기에, 그것과 똑같이 그린 그림이 하나 더 있다고 하자. 이 그림은 그 작가가 그린 그림이 아니다. 그림만 본다면 두 그림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 가치가 같아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전혀 그렇지 않다. 유명 화가의 명성에 따라 그 가치는 천지 차이가 된다.
왜 그럴까? 같은 그림인데 왜 가치가 다를까?
그러고 보면 음악도 마찬가지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라서 그런지, 유명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곡과 그냥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이 연주한 곡을 들으면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그냥 같은 곡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들으면 느낌이 다르다고 한다. 피아노를 치는 손가락에도 감정, 조금 더 깊게 말하면 혼이 담긴다고 한다. 그 혼을 느끼는 사람은 전율을 느끼고,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게 된다. 맞다. TV에서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그냥 노래가 아니라, 그 가수의 혼을 느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혼을 담은 본질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단순히 기교를 잘 부린다고 오는 건 아닐 거다. 한두 번은 “와!”라는 탄성을 내뱉게 할지 모르겠지만, 그 깊이가 깊지 않아 언젠가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바닥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하는 행동이, 꼼수다. 거짓이 거짓을 부르듯, 꼼수는 꼼수를 부르다 결국 한없이 추락하고 만다. 그래서 모든 분야에서는, 기본을 강조한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기초체력이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기술이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기술이 발휘될 수 있도록 체력이 버텨주지 않는다면, 기술도 무용지물이 된다는 말이다.
기본을 차분히 다지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오랜 인내의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건 사실이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처럼, 토끼가 저만치 가고 있는 것을 보는 거북이의 마음은 편치 않다. 나중에 어떻게 되든, 지나가는 사자나 호랑이에 등에 업혀서라도 앞서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 승리는 자신의 승리가 아닌데도 말이다. 그렇게 타인과의 비교는, 독약도 영양제로 생각하고 먹게 만드는 묘한(?) 기운이 있다. 그것을 참아내는 게 쉽지 않지만, 그 어려운 걸 해내야 한다. 그래야 기본을 잘 다질 수 있고, 본질을 흩트리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본질의 속성을 잊지 않아야 한다. 본질 하면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모소 대나무’가 자라는 모습이다. ‘모소 대나무’는 4년 동안 3cm밖에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4년 동안, 성장이 멈춰버린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5년이 되는 해부터 하루에 30cm 정도 성장한다고 하는데, 15m 정도까지 성장한다고 한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4년이라는 시간 동안 깊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본질은 이처럼, 뿌리를 깊고 단단하게 내리는 과정을 잊지 않고, 묵묵히 해야 할 것을 할 때 지키고 유지할 수 있다. 내가 이렇게 깊고 단단하게 뿌리내려야 할 본질은 무엇일까?